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진샤 Aug 15. 2022

재기 발랄한 관리자

집, 안일_때 되면: 쓰레기 버리기



  여자들이란.

  굳이 설거지하는 나를 불러 옆에 앉히고는 한다는 소리가, 여자들이란. 굳이 유튜브 영상을 보여주며 한숨까지 내쉬며 한다는 소리가, 여자들이란. 아니, 그거 하나 해주는 게 뭐? 어차피 나갈 거 몇 걸음만 더 걸으면 될 거 뭐? 출근길에 음식물 쓰레기 손에 쥐어주는 게, 그게 도대체 뭐?

  그러나 나는 온순한 마눌이니까 그저 한숨을 쉬어줄 뿐이다. 표정관리가 잘 안 된 것 같다. 일어서서 다시 주방으로 향한다. 도대체 뭐? 왜, 어쩌라고? 보여주는 의도가 뭔데? 난 단 한 번도 손에 쥐어주지 않은 것 같은데, 여자들이 다 그러는 것도 아닌데, 뭐?

  짤그락 짤그락 설거지 소리와 유튜브 소리와 아이들의 태블릿 소리만 순서대로 날 뿐이다. 그 누구도 그 영상에 대해, 그 한숨에 대해, 그 마음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






  남편에게 고맙고 미안하면서도 어쩔 수 없었다. 남편이 자기 키만큼 쌓인(도대체 쓰레기는 왜 이리도 쉽게, 많이 나오는 걸까) 재활용 쓰레기를 버리러 가는 뒷모습을 보며 나는 찌릿한 젖을 아이에게 물렸다. 돌까지의 모유 수유란, 아이와의 합일 또는 합체를 의미한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수유만을 생각하겠지만 수유 두 글자에는 먹이기, 트림 시키기, 재우기, 울면 달래기가 기본으로 포함된다. 이런 자잘하고 재미없는 말은 관두고 하여튼, 아이를 낳아 기르는 동안 쓰레기는 남편이 버렸다.

  내가 보기에 남편은 그것을 맡은 것을 뿌듯하게 여기는 듯도 했고 자신의 의무를 다하는 것에 대해 당연하게 생각하는 듯도 했다. 나는 고마우면서도 미안했다. 그래서 음식물만큼은 더욱 내가 챙겨 버렸다. 음식물 쓰레기 냄새가 너무 나서 당장 버려야 하는데 아이가 배고프다고 울어 어쩔 수 없이 남편이 버려야 하는 몇 번만 제외하고. 미안해하는 내게 남편은 몇 번의 끄덕임을 보이며 나갔다. 그 몇 발자국이 미안해서 버리고 들어온 남편에게 다시 미안하다고 했다. 남편은 별말 없이 손을 씻으러 들어갔다.

  부부싸움 후 나의 권유로 '그런 미신 같은 거 왜 하냐' 구시렁거리며 검사한 남편의 MBTI는 '엄격한 관리자'였다. 그럼 그렇지, 역시나 나랑 반대. 기 쎈 엄격한 관리자에게 심약한 재기 발랄한 활동가는 알아서 기가 죽었다. 그래서 더 미안하고 고마워했다, 별 말없이 쓰레기를 버려주는 것에.

  한편으론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는 거다. 남편의 뇌 속에서 분명 '쓰레기 버리기'는 집안일 담당인 여자의 일일 텐데, 그걸 저렇게나 열심히 해주는 이유. 내가 아이를 키워서? 무기력하고 우울해 보여서? 쓰레기 쌓이는 건 두고 볼 수 없어서? 쓰레기 버리기가 취미라서? 답을 찾지 못한 채 우리는 주말부부가 되었다.

  일주일에 한 번, 재활용 쓰레기를 버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어렵다기보다 귀찮은 일이었다. 그렇다고 안 버리면 재활용 쓰레기통이 폭발해버릴 것 같으니 해야만 했다. 일요일마다 쓰레기를 버리러 나가보면, 반반 정도였다. 남자 반, 여자 반. 남자들은 별 감정을 드러내지 않은 표정으로 쓰레기를 분리해서 버렸고 그건 여자도 마찬가지였다. 누구 하나 '내 일, 남의 일'같은 걸 생각하지 않는 일상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아, 도대체 쓰레기 버리는 일에 남녀를 따지는 나, 왜 이러는 걸까. 혼자 왜 이렇게 심각한 걸까. 플라스틱 쓰레기들을 쏟아부으며 머리 속 쓰레기들도 부어 버렸다. 그만해, 그만 하자. 쓰레기 버리는 일에 '쓰레기젠더론' 쓰고 계시네. 쓰레기들은 계절에 상관없이 꾸준히, 성실하게 나왔고 나도 덩달아 꾸준히, 성실하게 버렸다. 일 년이 지났고 우리는 주말부부를 끝냈다.

  나는 하던 대로 쓰레기를 버렸다. 남편은 의무적으로 쓰레기를 버리려 했다. 어느 날 퇴근하고 온 남편이 '우리 마눌 오늘 재활용 버렸네요?'라고 놀라도 덤덤했다. 많아서요. 이야, 우리 마눌 쓰레기도 버릴 줄 알고. 저게 칭찬일까, 놀리는 걸까, 생각하느라 힘 빼는 건 오래전에 그만두었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재활용 쓰레기는 내가 맡아 버리고 있다. 물론 음식물 쓰레기도 줄곧 내가 버리고 있고.

  그러던 어느 날, 설거지하는 나를 굳이 불러내 영상을 보여 준 것이다. 출근하는 남편을 '잠깐만' 불러 세운 여자가 남편 손에 투명 비닐장갑과 음식물 쓰레기를 쥐어주고 현관문을 닫는, 남편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투명장갑을 끼고 쓰레기를 들고 가는 영상. 여자들이란. 나는 조금 웃어 보인 것 같은데 표정관리가 아무래도 잘 안 된 것 같아 마음이 쓰인다. 그러면서도, 뭘 어쩌라고, 내가 한 번이라도 그런 적 있느냐고, 이딴 걸 나한테 보여줘서 어쩌자는 거냐고, 도대체!

  수도꼭지를 잠갔다. 그거 도대체 나한테 왜 보여준 거예요? 수도꼭지를 다시 틀었다.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해봤자 '여기 좀 앉아봐'부터 해서 500년 전 이야기를 들을 게 뻔했다. 유교가 싫다는 분이지만 생각만큼은 유교에 가장 가까운 분이다. 조선을 망하게 한 게 유교한 자들 때문이라 유교가 싫은 것뿐이다. 뭔가 보고 느끼라고 보여준 거겠지, 그만 생각하자. 설거지를 마치고 개수통을 비우니 음식물 쓰레기 봉지가 가득 찼다. 마스크를 쓰고 아이들에게 말한다. 엄마 음쓰 버리고 올게. 조금 큰 소리로.







  결혼 10년 차, 두 세 달전까지만 해도 여전히 이해할 수 없어서 '이해하지 말자'며 덮어둔 마음들을 조금씩 이해하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건 MBTI 때문이다. 남편과 부딪힐 때마다 밤에 아이들을 재우며 '엄격한 관리자'를 검색해 본다. 계획을 세움, 감정보다 책임감, 체계적, 책임감, 전통적, 기억력 좋음, 의리, 변명과 허튼수작 싫어함, 준법정신, 전투적, 완벽주의, 고집스러움, 하아. 잘난 체, 공감능력 없음, 설명충 키키키킥 자의식 과잉, 위로 바보 키키키킥. 엄마 왜 자꾸 웃어요? 아냐 아냐 얼른 자. 10년을 함께 살면서도 이해할 수 없었던(어쩌면 남편 스스로도 알지 못했던) 남편의 이런저런 성격이 객관적 활자로 드러난다. 동시에 내가 '이해하지 말자'라고 한 부분도 계속 이해하지 말아야지 결심하게 되었다. 나는 어떻게 해도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니까, 그저 '저런 사람이구나' 하고 받아들이는 수밖에.

  남편에게 집안일은 '여자의 일'인 것이다. 그런 남편에게 '남자의 집안일'은 정해져 있다. 전구 갈기, 고장 난 부분 집수리, 곰팡이 없애기나 무거운 것 들기 같은 (자신이 생각하기에) 더럽고 험한 일. 쓰레기 버리기 역시 더러운 일에 해당하기에 남편이 도맡아 했을 것이다. 그런데 두고 보니 마눌이 꽤 챙겨서 잘한다. 원래 여자의 일인 집안일을 여자가 맡아서 하는, 정상 상태로 돌아간 것을 확인하고는 더 이상 하지 않는다.

  남편의 MBTI를 분석한 후 나는 적어도 쓰레기 버리기에 있어서만큼은 '재기 발랄한 관리자'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인생 편하게 살자, 내일의 일은 모레에 해보자, 좀 망하면 어때'주의인 내가 '관리자'가 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쓰레기 버리기 하나 정도는 할 수 있을 것도 같다. 때 되면 버리기만 하면 된다. 남편을 이해하고 맞춰가는 한 방식으로서 이 정도라면 얼마든지 할 수 있다. 늘 까먹고 잃어버리고 덜렁대고 잘 울고 그만큼 잘 웃는 마눌에 맞추기 위해, '엄격'하지만 많은 부분 포기하고 내려놓은 남편을 위해 '쓰레기 버리기 관리자' 정도는 얼마든지 될 수 있다.

  쓰레기 버리기 맞추는 것에 10년이 필요했다. 결혼생활이란 이런 것이란 생각을 하며 쓰레기통을 본다. 며칠은 더 두어도 되겠다. 어설프지만 조금씩 관리자가 되어가고 있다.


 

차오르는 데에 시간이 필요한, 쓰레기, 그리고, 이해



아늬 근데 진짜, 그날 그 유튜브는 도대체 왜 보여준 거예요? 내가 언제 당신 출근할 때 손에 쥐어줬어요? 그런 적 없는데. 음쓰만큼은 내가 버리는데. 앞으로 나보고 그렇게 하지 말라고? 그럴 생각 전혀 없는데. 남편 음쓰 버리게 하는 여자들이 한심해서? 도대체 왜 굳이 보여준 거예요? 네?





집에서 안일한 태도를 가지려는 주부가 쓰는 집안일 에세이입니다. 집안일에 대한 글을 쓰며 그 순간만큼은 집과 나 모두에게 쉼을 주려 합니다. 5로 끝나는 날마다 보잘것없지만 피할 수도 없는 집안일을 늘어놓겠습니다. 집안의 일들이 갖는 소중한 의미와 함께.     

이전 19화 고사리의 소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