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안일_때 되면: 냉장고 정리
열지 않는 쪽을 택했다. 썩는 건 소리가 나지 않는 일이니까, 내가 열지만 않으면 충분히 무시할 수 있었다. 나는 그 정도는 뻔뻔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긁어 부스럼 같은 것도 부지런한 사람들이 하는 일이다. 미련한 사람들은 애초에 긁을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그렇게 반찬들과 참외들과 떡들과 김치들이 냉장과 냉동 속에서 죽어가고 있다. 과거에 대한 나의 미련과 함께.
시어머님이 연락도 오시는 것까진 참을 수 있어요, 그런데 진짜 못 참겠는 건 냉장고를 확확 열어젖히시는 거예요, 이거 어떡하죠?
원래 며느리들은 다 이렇게 예민 종자들인 건가, 며느리가 되면 시어머니를 미워하게 되는 세포가 자동 생성 되는 건가. 이십 대 후반 자주 보던 사이트에서는 이런 글이 자주 올라왔다. 냉장고 검사 왜 하시려 하는 거죠, 알아서 잘 해먹을 텐데, 제발 냉장고는 손 안 대셨으면 좋겠어요, 시어머니 오신다는 데 거실을 치울까요, 냉장고를 치울까요. 시어머니와 냉장고의 상관관계는 도대체 무얼까. 결혼의 삶을 생각해 본 적 없는 이십 대 미혼은 알기 어려운 무언가가 냉장고에 있었다. 그때의 나에게 냉장고는 반찬이 있는 곳, 콜라가 있는 곳, 어제 먹다 남은 치킨이 있는 곳이었다. 냉장고와 시어머니를 연결 지어 기분이 나빠질 그 무엇도 내게는 없었고 그렇기에 이해할 수도 없었다. 그들의 예민한 세포, 그 본질에 대해.
고백 타임이다. 냉장고의 맨 위에는 아이들이 어린이집에서 해온 김치가 있다. 17년인지 18년인지 모르겠다. '엄마 아빠 맛있게 드세요' 자기 얼굴의 스티커를 붙인 김치를 한 봉지씩 들고 왔었다. 밑 칸에는 대략 한 달 전 생산된 것으로 추정되는 고춧잎 볶음이 있다. 붉은색이었는데 점점 주황색이 되어가고 있다. 그 아래 칸에는 치킨무와 깍두기가 플라스틱 용기에 들어있다. 배달은 잘 안 해 먹으니 포장일 것이다.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은 올해 초였던가, 아니면 작년일 것이다. 뭣이 중한가, 어차피 오래된 것이다. 그 아래 칸에는 감자 고추장볶음이 락앤락을 차지하고 있다. 이것은 고추장볶음과 생산시기가 비슷할 것이니, 고작 해봐야 한 달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야채칸은 다행히, 곰팡이 핀 청양고추 한 봉지 말고는 다들 무사하다.
냉동실은 어떠한가. 맨 아래 칸 그것들은 아마도 고등어일 것이다. 그렇게 추정될 뿐 그 형체는 끝까지 답을 알려주지 않을 것이다. 육안으로 분별 불가능한 상태이니까. 이사 오기 전 봄에 선물 받았으니까 18개월 정도 되었을 아이스 젤리가 문에 가득하다. 오메기떡은 둘째 낳고 어머님이 보내주셨을 테니까 4년 정도 되었을 것이다. 말린 고구마, 김말이 튀김, 비ㅂ고군만두, 달지 않아 아이들이 먹지 않는 화과자와 마카롱과 이름 모를 빵. 이쯤 되면 김치냉장고의 사정은 충분히 상상 가능할 것이다. 노란색이었을 참외는 갈색이다. 검은 골프공이 왜 이리도 많이 들어있지, 아, 키위구나 아니 키위였구나. 엄마가 넣어두었을 각종 절임들은 패스, 엄마가 넣은 건 원래 엄마 손에 버려지는 게 진리.
친정엄마가 열어 봤으면 온 세상 '아이고'가 하하하하 웃으며 따라 나왔을 냉장고다. 아이고, 아이고~ 아이고오~ 하이고, 아이고! 시어머니가 열어 봤으면...... 아, 이건 생각도 하기 싫다. 시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결코 모르셔야 할 것이 하나 더 생겼다. 결혼 전 남편과 다녀온 제주도 여행, 그리고 우리 집 냉장고.
꼭 오늘만이 아니더라도 대체로 나의 냉장고는 이러하다. 대체로 꽉 차 있고 대부분 먹기 곤란한 것들이다. 예민할 수밖에 없었던 그 며느리들의 예민함을 이제서야 이해하게 되었다. 예민함을 이해하게 되었다는 것이, 예민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수치스럽기는 하지만 치울 생각은 딱히 없다. 차곡차곡 쌓여 있는 쓰레기들을 하나하나 꺼내 버리기만 하면 되는데, 나는 예민하기는커녕 게으른 낯빛을 하고 저들에 대한 글만 쓰고 있다.
나는 내가 왜 이러는지 알고 있다. 내가 미련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나는 미련이 특기이자 강점인 사람이다. 길게는 사오 년, 짧게는 한 달 이상의 음식들이 냉장고 여기저기서 발굴되는 것은 나의 미련과 관계가 깊다. 어쩌면 나의 냉장고를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단 하나, 미련 뿐일지도 모르겠다.
국어사전을 뒤져본다. 미련(未練), 깨끗이 잊지 못하고 끌리는 데가 남아 있는 마음. 미련한 내 마음과 달리 설명은 어쩜 이리도 깨끗한 건지. 김치는 아이들이 고사리 손으로 해 온 것이라 버릴 수 없다. 냉장고를 열 때마다 세 살의 첫째가 환하게 떠들어 댄다. 고춧잎 볶음이나 감자 고추장볶음은 맛이 괜찮았다. 요리의 즐거움을 깨닫게 해 준 반찬들이라 함부로 버릴 수가 없다. 치킨무와 깍두기, 고등어도 화과자도 마카롱도 오메기떡도 아이스 젤리도 군만두도, '언젠가는 먹겠지'하는 마음으로 두었다. 지금은 그 마음이 사라졌지만 그냥 두고 있다. 이것이 바로 미련의 실체이니까, 나는 미련이 많은 사람이니까 그냥 두고 있다. 게으름이 첫 번째 이유이긴 하지만, 나는 굳이 '미련'이라는 이유에 더 힘을 주고 싶다.
과거의 많은 시간을 깨끗이 잊지 못하고 질질 끌며 살고 있다. 미련에서 쉽게 뻗쳐 나오는 자책과 후회도 쳐내지 않고 고스란히 키우며. 쉽게 회피하고 포기하고 덮어두기만 했던 선택들 앞에 자주 불려 간다. 과거에 다른 결정을 했을 내가 당당하게 지금의 나에게 복수한다. 지금의 너를 이렇게 만든 건 그때의 너야. 나는 여전히 회피하며 웅얼거린다. 그래서 뭘 어쩌라고, 지금 내가 뭘 할 수 있겠냐고. 그날의 그 말, 그 오후의 침묵, 그 문자의 대답, 그 정류장의 악수, 그 의자의 음료수, 그 시절의 사람들. 그때의 모두가, 그리고 내가 끊임없이 지금의 나에게 물어온다. 그래서 지금, 행복하냐고. 이에 대답하지 못하는 것 역시 나의 미련임을 안다. 그래서 내 안의 미련은 너무 시끄럽다.
어쩌지 못하는 추억과 감정들이 물성으로 모인 곳이 냉장고다. 조용히 썩어가는 것들 모두 사연이 있어 어쩌지 못한다. 꺼내 버리고 씻어내고 닦고 말리면 기분 좋을 것을 알면서도 어찌할 수 없다. 이렇게 쓰고 보니, 나를 가장 닮은 가전이 냉장고인 듯도 하다. 겉은 조용하지만 안은 미련으로 꽉 차 있다. 겉으로 보면 회색이지만 문을 열면 환해진다. 가끔 필요한 소리만 낸다.
우리 집에 나 같은 건 하나만 있어도 되지 않을까 싶다. 미련하고 둔하고 게으르고 회피하기만 하는 존재가 또 있는 건 나도 싫다. 열어야겠다. 오래 묵은 정을, 바싹 말라 버린 추억을, 색이 변해가는 감정들을 꺼내 정리해야겠다. 비워내고 닦고 씻어내 새로운 것들이 들어갈 자리를, 미련 아닌 것들이 들어갈 자리를 마련해야겠다. 미련이 특기이자 강점인 내가 새로 채우는 것이 여전히 '지나간 날들을 깨끗이 잊지 못하는 마음'이라 하더라도, 오늘 비운 자리를 채우는 것은 오늘을 시작으로 하는 마음일 테니까.
지나간 것들에 후회나 자책이란 곰팡이가 자란 것을 치워내고, 새로운 과거가 될 오늘을 담은 용기容器를 넣을 테다. 그런 용기勇氣를 내보려 한다. 오직 이 마음과 행동만이 나의 시끄러운 미련을 사그라들게 할 수 있다.
문을 연다. 주황색 불빛이 쏟아진다. 내 안이 비워지고 희망이 채워진다. 그렇다. 이젠 분명히 알 수 있다. 희망, 그것이 구원의 이름이었다.**
* 제목은 보후밀 흐라발의 소설 '너무 시끄러운 고독'에서 차용하였습니다.
** 마지막 문장 또한 위의 소설 마지막 문장을 인용하였습니다. '일론카. 그렇다. 이젠 분명히 알 수 있다. 그것이 그녀의 이름이었다.' <너무 시끄러운 고독>, 13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