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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샤 Sep 15. 2022

비밀이 스며드는 시간

집, 안일_때 되면: 이불빨래



  나라는 사람이 그렇듯, 이불빨래도 정해놓고 하는 건 아니다. 그냥, 때가 있다. 때가 오면 한다. 이불 빨래를 할 때. 오늘 해야겠군, 혹은 내일 해도 되겠어, 다음 주쯤 하지 뭐, 하는 때. 어차피 평가에 반영되는 것도 아니고 검사를 하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닌, 내가 내 맘대로 하면 되는 일이다. 어디선가(인터넷이다) 최소 한 달에 한 번은 이불빨래 하라는 글귀를 보고 '매월 1일 이불 빨래하는 날'이라고 혼자 정했다가 단 한 번도 지키지 못했다. 매월 1일은 바쁜 날이기 때문이다. 달력도 넘겨야 하고, 그 달에 있을 일들을 대충 떠올려야 하고(떠올리기만 한다), 시간이 이렇게 빨리 가는구나 감탄도 해야 한다. 그러느라 이불빨래는 하얗게 잊는다. 

  그러면 언제 이불빨래를 해야 하는 걸까. 내게는 그때가 따로 정해져 있다. 때가 되면 이불이 말해주는 것이다. 비밀이 다 스며들었어, 오래된 비밀들을 털어낼 시간이야.






  아니 아니요, 그거요, 그 슬라임이요. 

  첫째의 잠꼬대를 듣다가 폰을 떨어뜨렸다. 한두 번이 아닌데 그 고통은 매번 오래간다. 어떤 때는 이마, 어떤 때는 광대뼈, 재수 없으면 눈에 정통으로 맞는다. 아야아아. 그러면서도 자꾸 피식피식 웃음이 나온다. 엄마가 꿈에서 드디어 슬라임을 사주는가 보군. 하영이가 학교에 가져왔다던 그 슬라임. 딱히 미안하진 않다. 그래, 꿈에서라도 소원 성취하렴. 

  아이들의 잠꼬대를 듣기 위해서라도 밤을 새우고 싶을 때가 있다. 아이들의 잠꼬대는 말 그대로 '화려하다'. 어쩜 이럴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또박또박하게 자기 할 말을 한다. 야, 그거 내 거거든, 언니, 저리 가아아, 빨리 와야 돼, 기다릴게, 하지 마라, 하지 마라고 했다, 엄마 정말정말정말정말 고맙습니다. 이쯤 되면 꿈속에 들어가 보고 싶을 지경이다. 왜 고마운데? 무슨 맛있는 걸 해줬길래? 동생들 몰래 초콜릿 준 거? 아, (꿈속 엄마가) 드디어 핸드폰을 사줬구나!

  꺄르르르르, 웃던 첫째가(이럴 땐 좀 무섭기도 하다) 갑자기 말한다. 근데 이거 비밀인데. 그러고는 새근새근. 새근새근 하는 비밀이라니. 그날 나는 정확히 새벽 네 시가 넘을 때까지 잠들지 못했다. 여덟 살의 비밀, 꿈속에서만 꿈속 누군가에게만 밝힐 수 있는 비밀. 잠꼬대로도 숨겨야 하는 그런 비밀. 내 안의 엄마도, 엄마의 허울을 벗어던진 나'도 궁금해했다. 나와 함께 살고 있는 여덟 살 인격체의 비밀, 그건 무얼까.

  1991년, 내 여덟 살의 비밀과 비교해 보면 답의 근사치에 갈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여덟 살의 비밀에 가닿기도 전에, 여덟 살이라는 시절 자체가 까마득하다. 나에게도 그런 나이가 있었다니, 나도 그 나이를 지나오긴 했다는 사실이 새삼 신기하고 신비로웠다. 여덟 살, 학교를 가고 공부를 하고 여전히 어리고 그러나 학교를 가고 공부를 하고 그래도 모르는 게 많고 '쟤는 왜 저럴까' 생각하기 시작하고 그러면서 '내가 어땠길래'도 생각하기 시작하는 나이.

  회색이었던 내 여덟 살이 천천히 칼라로 변하며 다가온다. 세네 개의 채널만 가진 채로, 손으로 돌려야만 화면이 바뀌는, 볼록하게 솟아오른 브라운관 속에서. 

  학교. 마룻바닥. 왁스. 왁스를 깜빡하고 안 가져온 날은 꼭 진현이가 손가락 크기로 잘라 줬다. 나중에 갚아, 하면서도 진현이는 웃었다. 박미경 선생님은 엉덩이를 옆으로 실룩샐룩하며 칠판을 지웠다. 그래서 우리는 다 같이 와아하하하하 웃었다. 진현이랑 눈이 마주쳤는데, 진현이가 나를 보고 더 크게 웃었다. 그래서 나도 더 크게 웃었다. 받아쓰기 백점은 진현이 뿐이었다. 나는 구십 점도 맞고 팔십 점도 맞았는데 진현이는 매일 백점이었다. 옷도 예뻤고 안경 속 눈도 예뻤고 입술 위에 작은 점도 예뻤다. 아, 갑자기 떠오른다. 그거였구나, 내 공식적인 첫 비밀! 이불 뒤집어쓰고 빌었던 그 비밀, 내일 짝 바꾸기에서 진현이랑 짝 되게 해 주세요.

  진현이는 2 분단이 되었고 나는 4 분단 맨 첫 줄에 앉았다. 진현이는 성이 기억이 안 나는데, 김재구는 성까지 다 기억난다. 냄새나는 김재구, 맨날 똑같은 옷 입는 김재구, 책도 안 갖고 오는 김재구, 도시락도 안 싸오는 김재구. 엄마한테 다 말했다. 이런 김재구랑 짝이 됐다고. 엄마는 자꾸 물었다. 재구 오늘도 도시락 안 싸왔나. 응, 그냥 혼자 앉아있었어. 엄마는 재구 오늘도 도시락 안 싸왔나,를 네 번쯤 물어보고는 그다음 날 도시락을 두 개를 줬다. 하나는 재구 줘, 다 먹고 통 받아서 갖고 오고. 재구는 '이거 엄마가 너 주래'하는 나를 몇 번 보고 '고마워'하고는 도시락을 다 먹었다. 매일은 아니지만 그렇게 엄마는 재구 도시락을 몇 번 싸줬다. 재구는 두어번 '고마워'라고 말하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그냥 먹었다. 남김없이 다 먹고 텅 빈 도시락통을 돌려주는 일만큼은 변함이 없었다. 

  박미경 선생님은 몇 차례 '음... 음....'하고 나서 말해 주었다. 재구가 일이 생겨서 오늘부터 학교에 나올 수 없대, 친구들한테 고마웠다고 말해달래. 그날부터 나는, 정확히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삼일 정도 혼자 앉아 있었다. 엄마한테도 물론 말했다. 엄마는 '뭔 일이로, 뭔 일이로' 했지만 나한테 물어보는 것 같지는 않아서 나도 대답하진 않았다. 뭔 일 때문에 학교에 오지 않는지는 나도 알 수 없어서 대답해줄 수 없기도 했고. 재구가 학교에 나올 수 없단 선생님 말에 혼자 조금 울었는데, 아, 이것도 비밀이었구나, 이유도 알지 못한 채 조금 울었었다. 어쩌다 지금까지 지켜온 비밀, 그 누구도 묻지 않고 궁금해하지 않아 혼자만 간직해온 비밀. 그런데 그때, 왜 울었을까, 나. 그건 여덟 살의 진샤만이 알겠지. 물어보고 싶은데 방법이 없다. 1991년에 묶여버린 비밀, 2022년에게서 힌트를 얻을 수 있을까. 시간 앞에 무력하지 않은 건 없으니까, 나의 비밀도 조금은 느슨해지지 않았을까.







  ㅇㅇ아, 어제 무슨 꿈 꿨어? 어제? 꿈 안 꿨는데? 아니야, 너 어제 자면서 엄청 뭐라 뭐라 했어..... 음.... 아~ 윤호가 또 나 괴롭혀서 하지 마라고 했는데 자꾸 괴롭혔어. 꿈에서도? 응. 다음엔 좀 더 큰 소리로 '하지 마!' 이렇게 말해, 알았지? 그리고 또 무슨 꿈 꿨어? 음.... 아! 아,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뭔데 뭔데. 아니야. 엄마한테 비밀이야? 엄마, 나 학교 늦어, 세수하고 로션 발라야 돼. 

  황급히 일어서는 여덟 살의 뒷모습이 수상하고 신비롭다. 비밀은 끝까지 비밀이어야 비밀이다. 그렇지, 그래야 비밀이고 여덟 살이지. 2022년에 힌트 같은 건 없고, 단지 어색한 얼굴의 나와 그만큼 어색한 마흔이라는 나이와 여덟살의 새로운 비밀이 생겨 버렸다. 어떤 비밀들은 시간 앞에서도 무력해지지 않고 더 단단해진다. 황망히 사라진 재구처럼, 부재한 재구의 자리를 보며 흘린 눈물처럼, 잠꼬대에서조차 밝히지 않는 마음처럼. 


  아이들이 어린이집과 유치원과 학교로 하루만큼의 몫을 챙기러 나간 후, 가장 먼저 이불을 갠다. 아이들 꿈의 가장 최측근에서, 어쩌면 아이 꿈을 목격했을지도 모를 이불이다. 이불은 아이의 잠 가장 가까운 곳에서 아이의 숨과 꿈과 땀과 침과 웃음 그리고 비밀을 모두 받아내고 스며들게 했다. 어쩌면 아이의 비밀을 알고 있을 이불이다. 이불이 감춘 비밀에 대해 채근하는 대신 들어안아 코를 묻고 들이마신다. 시큼하고 고소한 땀 냄새는 침묵한 채 나에게 알려 준다. 오래된 것들을 털어낼 시간이야. 


  대충 헤아려 보면 여름엔 2주, 겨울엔 한 달 정도 간격으로 이불을 빤다. 이불을 감싸던 오래되고 묵은 냄새들이 씻겨나가고 새로운 향기와 잠과 이야기를 받아들일 준비를 한다. 물론 그 모든 것을 묵묵히 지켜낼 준비도 더불어. 

  

  비밀이 스며드는 시간이 이불 아래에 누워 있다.




새로운 숨과 꿈과 땀과 침과 웃음 그리고 비밀을 받아내기 위해







집에서 안일한 태도를 가지려는 주부가 쓰는 집안일 에세이입니다. 집안일에 대한 글을 쓰며 그 순간만큼은 집과 나 모두에게 쉼을 주려 합니다. 5로 끝나는 날마다 보잘것없지만 피할 수도 없는 집안일을 늘어놓겠습니다. 집안의 일들이 갖는 소중한 의미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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