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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샤 Sep 25. 2022

외면할 수 없는 외면

집, 안일_때 되면: 창틀 청소



  내 눈은 마음보다 편하다. 외면하고 싶으면 외면해 버린다. 마음은 그러지 못하지만 눈은 제 맘대로 피해 버린다. 이를 테면 창틀 것은 것. 대부분은 나의 상상만큼 극단적인 상태는 아니지만(상상 속에서는 늘 극단의 극단까지 가버리니까), 그래도 나는 어쨌든 그 '상태'를 확인하기가 두려운 것이다. 평소에 물티슈 한 장 쓱 뽑아 슥슥 닦으면 될 일을, 그 일을 하지 않고 미루고 미루다 결국 눈으로 보는 것마저 피해버리는 지경까지 오게 되었다. 외면의 끝에는 외면할 수 없는 나의 마음만 남게 되어 끝내는 행동으로 옮기게 될 것이지만, 그전까지는 최대한 외면해 보려 한다. 외면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이를 테면, 창틀 먼지처럼 티 나지 않게 그러나 결국 티가 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쌓이는 감정들을.






  매일 아침 9시 10분. 마법의 시간이다. 아이를 학교에 내려주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작은 마트에 들른다. 처음 간다면 두 가지에 놀라게 되는 마트. 농협 마트라고 해서 들어갔는데 우리 집 앞 편의점보다 작아서, 그 작은 곳에 없는 게 없어서. 당연히 없을 거라 기대하고 물어보면 척척 내놓는 직원들의 당당한 표정을 몇 번 접한 후론 거의 매일 가고 있다. 어제는 무와 콩나물과 두부를 샀고, 오늘은 어묵과 대파와 양파를 샀고 내일은 아마도 요구르트와 가지와 소시지를 사게 될 것 같다. 더는 필요한 게 없으니 하루 쉬어야지, 했던 날 보란 듯이 고무장갑에 물이 새어 들어왔다. 어쩔 수 없이 들러야 한다, 9시 10분 마법의 시간.

  내가 가는 시간만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내가 느끼기에, 내가 가는 9시 10분 마트의 모든 이들은 마법처럼 웃고 있다. 먼저 인사를 건네고 눈을 마주친다. 장본 물건들을 직접 상자에 담아준다. 좀 무겁다 싶으면 차까지 실어다 준다. 뭐지, 이 무해한 친절, 무결한 다정, 무구한 웃음은.

  삼일 정도만 마트의 고객이 되어보면 안다. 친절과 다정의 정체는 '습관'이라는 걸. 동네 특성상 주 고객은 할머니들이다. 할머니들은 양배추나 무, 양파와 소주 5병처럼 무거운 것들만 산다. 내가 살아온 세월이 이 정도야, 보란 듯이 낑낑거리며 장바구니를 채운다. 그리하여 마트 직원들에게 손님들의 짐을 차까지 들어주는 건 자연스럽고 당연한 임무이다. 할머니들의, 정확 그 옆으로 달아나려는 발음과 '그거... 아 그거 있잖아 그, 그...'로 시작되는 스무고개 물건 맞추기에 집중하려면 동그랗게 부드러운 자세로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런 이들의 얼굴을 매일 아침 대하고 나면 나도 친절과 다정에 샤워를 하고 나오는 기분이 된다. 좀 더 매끄럽고 보들보들한 마음가짐으로 하루를 대할 수 있게 된다.

  매일이 모여 몇 달이 되고 몇 달과 몇 년이 모여 시간이나 시절로 대체된다는 생각이 드는 즈음, 어김없이 이사 이야기를 하게 된다. 이런 건 왜 꼬박꼬박 잘도 반복되는 건지. 몇 번의 이사는 나에게 원치 않는 가르침을 심어주었다. '이사 가도 자주 봐'라든가 '놀러 갈게', '정리 다 되면 연락해' 같은, 분명 진심이지만 곧 진심이 아니었음을 확인하게 될 말들의 하찮음, 사는 곳의 터전을 바꾼다는 것은 매일 보는 사람들의 얼굴을 바꾸는 일임을 깨닫는 것, 한 번 떠난 장소를 별 볼 일 없이 다시 찾아가 보고싶은 마음과 그러고 싶지 않은 행동 그 불일치 앞에서의 난감함 같은 것들.

  그래서 이사 때는 시쳇말로 '정 떼느라' 혼자 바쁘다. 티를 내지 않아서 아무도 묻지 않지만 그래서 더욱 마음이 소란스럽다. 정 떼는 일의 역설은 다음과 같다. 도서관 사서들의 목소리에 괜스레 집중하고 집 앞 마트 점원들과의 시시콜콜한 대화에 적잖은 의미를 두고 놀이터에서 만난 앞 동 엄마가 내미는 고구마의 고소한 냄새를 기억하려 애쓴다. 이 얼마나 퍽퍽한 역설인가. 진하게 기억하고 선명하게 각인하기, 모든 얼굴과 장소와 냄새와 바람의 방향이 어제처럼 떠오르면, 그래서 그들과 다시 연락함에도 어제처럼 살가우면, 비로소 정을 뗄 수 있게 된다.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고 그 와중에 잘해주지 못한 것이 지저분하게 자꾸만 떠오르고 그리하여 '잘 지내' 묻고 나서 '그때 내가 너무 했지, 미안해' 하고 싶은데 그러지 못하면 그것이야말로 정을 떼지 못한 것이다. 정이란 마음의 살과 같아서, 너덜너덜 붙은 채 제대로 떼지 못하면 아침과 저녁으로 신경이 쓰인다. 건드릴 때마다 아프다. 외면하고 싶은 데 자꾸 마음이 간다. 혼자서 소리 없이 해내야 하는 일이라서 더 난감하고 곤혹스럽다. 정을 쏟아부은 만큼 쉽게 떨어지는 마음, 다(多)정(情)만이 가질 수 있는 역설이라 무얼 탓할 수도 없다.

  이곳에서 잘 떼어내고 싶은 다정은 죄다 마트에 있다. 카운터 아저씨 아줌마, 감자와 당근의 무게를 달아주던 점원, 긴 설명 없어도 알아서 내어주는 정육 코너. 살면서 또 어디선 이렇게 순박하고 천진하고 무구한 친절과 웃음을 만날 수 있을까. 아쉽고 아깝다. 소란스러운 내 마음 알지 못하는 이들은 어제와 같은 아니 어제보다 더 정든 얼굴을 들이밀며 말한다. 안녕하세요, 포인트 번호 말씀해 주세요, 안녕히 가세요.

  이들에 대한 마음을 외면해야 하는 시간이 다가오는 데 외면할 수 없게 만드는 무언가가 자꾸만 마트 주위를 서성인다. 고객들은 향한 단정하고 다정한 마음들, 온정이나 애정 같은 말로 표현할 수 있는 표정들이 이 마을 곳곳에 있다. 외면이 가능하긴 할까. 마음의 살을 떼어내느라 한동안 아픈 시간을 가져야 한다는 사실, 이것만을 외면하고 싶은데 자신이 없다. 단 하나, 다정에 취약한 나 자신만을 외면하고 싶어질 뿐이다.







  장을 봐온 것들을 냉장고에 넣어둔다. 청소기를 밀다가 그동안 외면해온 곳에 눈을 둔다. 외면하고 싶은 마음을 외면한 채, 창틀을 본다. 역시나 상상만큼은 아니다. 약간의 먼지와 머리카락과 지우개 가루나 과자 부스러기, 작은 플라스틱 조각들. 닦고, 닦고, 닦아낸다. 작은 집 거미들이 기어 나온다. 약간의 시간과 노력이면 창틀은 깨끗해진다. 손댄 김에 유리도 닦는다. 아이들의 선명하던 손자국들이 투명해진다. 외면했던 사실들은, 일상의 자잘한 것들은 이렇게 생각보다 쉽게 투명해지고 정갈해진다.

  그렇게, 비슷한 방식으로 하면 된다는 걸 나는 알고 있다. 같은 농도와 질감 웃음을 띠고 말을 건네면 된다. 그동안 감사했어요, 이사를 가게 되어서요, 다음에 캠핑 갈 일이 있거나 근처 오게 되면 또 들를게요, 같은, 별 의미 없고 이루어질 가능성도 거의 없지만 그래도 다정하기 짝이 없는 말을. 그리하여 듣는 이들 또한 쉽게 '그래요, 이사 잘 가시고 나중에 되면 또 봬요'라고 아무렇지 않게 대답할 수 있게 하는 말을. 어려운 일이 아니니 어렵지 않게 해내면 된다. 창틀 청소 같은 일이다. 상상보다 쉽게 해내고 끝내는.

  내 안에 소복이 쌓인 감정들을 외면한 채, 이사 후 적응이라는 일상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내가 외면해온 감정들은, 그러나, 창틀 먼지처럼 조용히 내 안에 쌓여 있다가 어느 날 문득 티가 날 것이다. 예전의 적잖았던  이사 날들, 끌어안았던 모든 이들의 진심과 다정이 오늘의 창틀 청소에서 불현듯 모습을 드러냈듯이.


  지난날, 헤어짐을 앞두고 내 안에서 애써 해온 모든 외면들을 나는 종내 당면하게 되었다. 어설프게 덮어둔 감정들은 언젠가 생의 어느 찰나에 외면할 수 없는 외면으로 모습을 드러낸다는 것을, 결국에는 창틀 청소처럼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쌓이고 묵은 감정들을 닦고 투명하게 만드는 그때의 내가 지금보다 성숙해있길 바랄 뿐이다. 지금 미성숙을 핑계로, 아쉽고 아까운 마음들을 길게 외면하고 있는 중이다. 내가 마지못해 외면한 이들이 먼저 알아채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외면하려 하지만 결국 마주하는 것은, 내 안의 묵은 외면





집에서 안일한 태도를 가지려는 주부가 쓰는 집안일 에세이입니다. 집안일에 대한 글을 쓰며 그 순간만큼은 집과 나 모두에게 쉼을 주려 합니다. 5로 끝나는 날마다 보잘것없지만 피할 수도 없는 집안일을 늘어놓겠습니다. 집안의 일들이 갖는 소중한 의미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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