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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샤 Oct 05. 2022

계절의 맞은편

집, 안일_때 되면: 계절 옷 정리


  첫 문장은 쉽다. 대체로 쉽다. 생각할 것도 없이 그냥 툭 튀어나온다. 이런 글을 써야지 하면 이런 첫 문장이 나온다. 첫 문장을 고친 적은 거의 없는 것 같다. 첫 문장이 쉽게 시작되기에 이어지는 글도 대체로 쉽다. 크게 고민하거나 많이 생각하지 않는다. 그냥 쓴다. 생각나는 대로, 의식의 흐름대로.

  쓰다가 감정이 격해지면 조금 울기도 하고 킥킥 웃기도 하며 쓴다. 그러다 마지막에 이르면 나름의 고민을 한다. 개인적으로, 글의 시작보다 끝에 힘을 주는(또는 주고자 하는) 편이다. 마지막 문장을 읽고 읽는 이가 '하아'하고 탄식했으면 좋겠다. 어떻게 이렇게 끝맺을 수가 있지, 이런 생각을 했으면 한다. 그래서 마지막 문장을 나름 고민을 하고, 마음에 안 들면 하루나 이틀 정도 생각한다. 그러면 대부분 마음에 드는 마지막 문장이 나온다.(어디서?)

  퇴고는 두세 번이다. 쓸 때는 즐겁지만 내가 쓴 글을 다시 읽어보는 것은 즐겁지 않다. 맞춤법 검사기로 한 번, 한두 번 더 읽으며 주어 술어 신경 쓰거나 조사만 바꾸는 정도이다. 가벼운 발행의 글은 이렇게 가볍게 쓰고 읽고 고친다. 힘을 주려 하지 않는다. 힘을 주고 싶지 않다. 글쓰기 말고도 생활은 대체로 긴장되어 있다. 그 긴장을 풀기 위해 글을 쓰지, 글쓰기에서마저 고통받고 싶지 않다.

  이렇게 몇 개의 계절을 앞에 두고 글을 써 왔다. 글에 나를 담고 글로 나를 복기하고 글과 사람과 인생을 만들어내며 지내왔다. 그리고 지금 내 맞은 편의 계절은, 가을이다. 갑자기 떨어진 온도에 아이들 계절 옷을 빨리 정리해야 한다는 조급함이 인다. 그리고 지금 나는, 그런 조급함을 조금 밀어둔 채, 그런 조급함이 인다는 글을 쓰고 있다.






  옷 정리에 있어서 여덟 살과 여섯 살과 네 살짜리 딸 셋을 키운다는 것은, 여덟 살과 일곱 살과 여섯 살과 다섯 살과 네 살짜리 사이즈의 춘추복과 동복, 하복을 모두 가지고 있다는 의미이다. 저 나이대의 한복을 모두 구비하고 있다는 의미이다.(어린이집에서 요구하는 대로 잘 따르는 편이다) 속옷과 모자와 장갑과 유아용 스타킹과 내복과 액세서리와 수영복과 스키복과 기타 등등을 가지고 있음을 뜻한다. 옷방이 터지려고 한다는 소리다. 여기저기 주고 쓰레기봉투 대형으로 갖다 버렸는데, 여전히 옷이 줄지 않는다는 것이다. 미니멀이고 뭐고 개나 주고 싶어 진다.  

  계절마다 옷을 정리한다. 하루 꼬박이다. 옷방에 앉아 버릴 옷, 어딘가에 줄 옷, 갖고 있을 옷을 정리하다 보면 눈이 따갑고 목이 매캐하고 자꾸 코가 간지럽다. 하아, 이 짓거리를 언제까지 해야 하는 거지, 하며 온갖 짜증을 내보지만 들어주거나 받아주는 이는 당연히 없다. 온전히 엄마인 나의 몫이다. 탓할 사람은 오직 한 명, 과거의 나여, 그러게 왜 속도 없이 줄줄이 낳았어.

  뒤적뒤적 대충대충 정리하다가 손에 걸리는 원피스. 아, 이거 첫째랑 커플로 입겠다고 산 모녀 원피스. 첫째 세 살과 둘째 네 살을 잘 입고 막내까지 잘 입은. 낡고 낡아서 버릴 옷 쪽으로 휙 던졌다. 아, 이건, 대학 동기가 택배로 왕창 보내준 옷들 중에서 가장 맘에 들어했었는데, 막내는 계절이 맞지 않아 입히지도 못했네. 상태가 괜찮으니 누군가에게 줄 옷으로 분류. 이건, 남편과 심하게 다투고 내복 차림의 아이 둘을 무작정 데리고 나와 택시부터 잡아탈 때 둘째가 입고 있던, 그래서 십일월 찬바람에 이렇게 얇은 내복만 입힌 채 나왔다고 택시 아저씨께 혼났던 그 내복. 혼나는 걸 핑계로 맘껏 울 수 있었는데, 눈물이 아이 옷을 적셔 '미안해, 미안해'만 말했던 못난 엄마를 떠올리게 하는 내복. 그래서, 그 옷을 얼굴에 묻고 조금 울었다.

  그땐, 글을 쓰지 않았다. 그때 나의 의미는 아이의 젖통이자 보모이자 식모, 그런 단어들에 가까웠다. 나의 이름 석 자를 내밀고 어딘가에서 의미를 찾으려 하면 매번 실패할 수밖에 없는 때였다. '엄마' 속에서 내 존재를 잃어버렸으니, 실패할 수밖에 없는 세계이자 계절이었다. 그 계절을 맞은편에 두고 있던 나는 마치, 물 같았다. 첫째 앞에서 이렇게 변하고 둘째 앞에서는 저렇게, 남편 앞에서는 다르게 변했다. 그리고 마침내, 기화되고 싶었다. 어디로 흐르기도 싫고 그냥 공기 중으로 조용하게 사라지고 싶었다.

  셋째는 공기처럼 왔다. 투명하게, 소리 없이. 그냥 공기로만 계속 두고 싶었다. 셋째의 성장을 잊고 싶어 글을 택했다. 읽고 쓰다 보면 내가 몸 안팎으로 무언가를 길러내고 키워내는(정확히는 길러내고 키워내는 것 외에 다른 의미는 없는) 존재임을 잊을 수 있었다. 그와 동시에, 나의 물은 형상을 띄기 시작했다. 과거의 어느 시점을 용서하는 나로, 지금의 행복을 찾아가는 나로, 주변의 사람과 사물에 의미를 읽어가는 나로, 때때로 모양을 바꾸어 갔다.

  그렇게 글을 읽고 쓰며 몇 개의 계절을 마주 했다. 계절이 색과 모습을 바꿀 때마다 나 또한 부지런히 아이들 방을 비우고 채워나갔다. 아이들이 크는 만큼 내 글도 자랐다. 버릴 옷과 줄 옷과 입힐 옷을 분류하면서, 나 또한 마지막 문장을 고민하고 단어를 몇 차례 바꾸어 보고 다양하게 동사를 분류하여 문장을 풍요롭게 나열하려고 했다. 그때마다 내 맞은편에 자리 잡고 있던 모든 계절들은 고요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아이들의 발육을, 느리고 둔한 속도로 이루어지는 내 글의 성장을, 그리고, 거듭되는 정리를 거치며 계절처럼 익어가는 생의 성숙을.






  역시나, 구성이나 주제 따위 생각지 않고 여기까지 써내려 왔다. 계절 옷 정리를 가지고 써야 하는데 무얼 쓸까 하다가, 나의 글쓰기에 대한 글을 써보자, 하고 쓰다 보니 이렇게 됐다. 골똘한 생각은 오히려 글을 지저분하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심하게 담백할 정도로, 생각 없이 쓴다. 이래서 사유도 발전도 없다. 부끄럽지만, 어쩔 수 없다. 이게 내 글이다.

  마치 옷 정리 같다. 에라이, 그냥 해야지 별 수 있나 하며 시작한다. 하다 보면 예전 생각에 괜히 뭉클해지고 짠해진다. 아쉬워하고 아까워하지만 버릴 건 버려야 한다. 이만큼이나 컸구나, 하면서 새삼스레 놀란다. 허리가 아프고 눈이 침침하지만 한 번 시작한 이상 끝을 봐야 한다. 하고 나면 한 계절만큼 커져있는 누군가를 발견한다. 자라남의 의미를 눈으로 손으로 확인하게 된다.


  앞으로의 계절이 지나며 한동안은 계속될 것이다, 옷 정리도 글쓰기도. 아이들의 창조적인 거짓말은 늘어날 것이고, 나 역시 그만큼 창조적인 이야기를 써낼 것이다. 옷을 버리고 분류하면서 단어를 버리고 동사를 분류할 것이다. 그렇게 살아가고 자랄 것이다. 그렇게 자라고 늙어가다 어느 날 문득, 내 맞은 편의 계절이 낮고 작은 바람으로 속삭여 주었으면 좋겠다.


너의 아이들이 너의 글을 배경으로 잘 자랐다고.
아이들이 자란 만큼 너는 늙었는데,
너의 글은 늙지 않고 계속 자라고 있다고.
네 아이들처럼 청춘(靑春)의 얼굴을 하고 있다고.

그렇게
쓰면서 살면서
잘해 왔다고.




정리하며, 쓰며 살며, 그렇게



집에서 안일한 태도를 가지려는 주부가 쓰는 집안일 에세이입니다. 집안일에 대한 글을 쓰며 그 순간만큼은 집과 나 모두에게 쉼을 주려 합니다. 5로 끝나는 날마다 보잘것없지만 피할 수도 없는 집안일을 늘어놓겠습니다. 집안의 일들이 갖는 소중한 의미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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