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진샤 Oct 17. 2022

집안, 일逸

일탈逸脫은 집안에서부터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아이들의 내복은 내 옆에 널브러져 있다. 점심으로 대충 끓여먹은 라면 그릇이 그 옆에 있다. 일단 다 미뤄놓고 노트북부터 열었다. 열었으면? 글 쓰는 거지. 어떤 글? 집안일하기 싫다는 글.


  그렇게 봄과 여름과 가을 동안 글을 썼다. 설거지를 하기 싫을 때마다 설거지에 대한 글을 썼고, 청소기를 밀기 싫어서 청소기에 대한 글을 썼다. 글을 쓰고 나면 청소기에 애정 어린 마음이 생겼고, 설거지는 내 소중한 집안일이 되어 있었다. 노트북에 마음을 훌훌 털어놔서인지 그것들은 집안의 '일'이라기보다 집을 '안일'한 곳으로 만드는 소담한 행위로 변해 있었다. 집안일에 대한 글을 쓰길 잘했다, 스스로 칭찬하며 가벼워진 엉덩이를 일으킬 수 있었다.

  분명 글을 쓰기 시작할 땐 '이딴 집안일 진짜너무대박아주매우심히극히 하기 싫다'라고 하려고 썼는데, 쓰다 보면 어느새 내 삶의 이곳저곳, 그때 저때, 그 사람 이 사람이 드러났다. 친정엄마와 시어머니의 목소리가 스쳐갔고, 친구들의 얼굴이 지나갔으며, 그날의 바람과 온도가 잠시 머물렀다. 무선청소기를 바라보고 있으면 친구의 SNS에 걸린 청소기 사진과 그걸 보고 팔로우 취소를 누른 내가 떠올랐다. 가스레인지를 보면 끓어올라야 하는 '기다림의 시간'에 대한 생각이 났고 세탁기와 건조기, 건조대를 보며 내가 원치 않게 잃어버리고 살아왔던 것들을 되살려냈다. 아쉽고 소중하고 귀한 것, 다름 아닌 '마음'이었다.

  결혼 전과 후의 나의 마음이 달랐고 아이를 낳기 전과 후의 마음이 달랐다. 친구들을 바라보는 나의 마음과 친정엄마와 시어머니를 대하는 마음, 고사리 손으로 엄마를 돕는 아이들을 보는 마음과 아이들이 갖고 노는 장난감을 치우는 마음, 가득 찬 냉장고를 바라보는 마음과 식재료를 꺼내 씻고 썰고 다듬는 행위를 하는 마음, 모든 마음이 달랐고 극과 극에 달했으며 시달렸고 싫었고 피하고만 싶었다. 그러나 그 모든 일은 '나'의 일이었고, 그 마음은 '나'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일을 나의 주업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현실, 그 현실로부터 우리 가족의 안온한 일상이 이어진다는 안정적인 피로, 보람이나 만족같이 하찮은 감정 이외에 그 어떤 보상도 이루어지지 않는 나의, 못난 일, 집안일. 피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 싶어 나는 로봇청소기와 건조기를 들였다.(이모님 3 대장의 끝판왕이라는 식세기'님'도 이사 후에 오신다!) 그러고는 곧 깨달았다, 그들을 운용해야 하는 사람 또한 나임을. 어떻게 해도 벗어날 수 없는 나의, 집안, 일. 벗어나고 싶어 카페로, 도서관으로, 공원으로 나갔고 돌아오면 오롯이 나를 기다린 집안일은 주인을 오래 기다린 강아지처럼 나에게 와락 안겼다. 집에서 벗어나던 순간과 변함없는 모습으로.

  그래서 나는, 집안에서 하찮고 소담한 일탈을 하기 시작했다. 집안일이 하기 싫을 때마다 노트북을 켰다. 집안일에 대한 글을 썼다. 청소와 설거지와 빨래와 쓰레기 버리는 이야기를 쓰는데 자꾸 울었고 자주 웃었다. 다 쓰면 노트북을 접고 미련 없이 일어나 집안일을 척척 해냈다. 찌개는 더 맛이 있어졌고 물걸레 청소를 뿌듯하게 마쳤다. 글이, 집안일하기 싫다고 투정 부리는 나를 다르고 얼래 주었다. 글이, 행주와 빗자루와 개수대와 창틀 먼지의 본질까지 나를 데려다주었다. 나는 그 앞에 가만히 앉아 그들을 바라보았다. 내 안에 흔들대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마음에서 떠오르는 이야기들을 건져 노트북으로 옮겼다. 맑아진 마음은 집안일을 바라보는 내 눈도 맑아지게 했다. 다정한 선순환이었다.


  '집안, 일'이라고 쓰고 '일'이라는 한자를 무심히 검색해 보았다. 내가 찾는 어떤 다른 의미가 있을 수 있을까, 막연한 호기심으로(전공 병이다). 일逸, 편안하다, 즐기다, 숨다, 달아나다. 피식 웃었다가 이내 하하하 하고 소리 내어 웃고 말았다. 집안일, 최대한 편안하게 할 거고 피할 수 없으니 되도록 즐길 거고 그러나 자주 어딘가 숨고 싶어지고 달아나게 하고 싶어 지는, 나의 집안-일逸. 역시, 집안일은 안일하게 해야 한다. 






  지금 이 글을 마치면 나는 좀 더 착해진 엄마가 되어 아이들 옷을 갤 것이다. 좀 더 상냥해진 아내가 되어 설거지를 하러 주방에 설 것이다. 이 모든 게 글이라는 온화하고 따스한 일탈 덕분이다. 앞으로도 당분간은 글쓰기라는 일탈을 집안에서 집안일과 함께 하려 한다. 집안일을 안일하게 대할 수 있게 해주는 그 일탈만이, 나의 영혼을 깨끗이 빨아 널고 내 마음의 먼지를 털어내고 내 정신을 헹구어내는 유일한 작업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글을 쓰며 내 안을 환해지게 하고 집안일을 하며 내 밖을 깨끗이 할 수 있는 일, 나는 나의 일을 사랑하게 되었다.   






*사진 출처: 블로그 '쑴의 일기장'




집에서 안일한 태도를 가지려는 주부의 집안일 에세이였습니다. 집안일에 대한 글을 쓰며 그 순간만큼은 집과 나 모두에게 쉼을 줄 생각으로 썼습니다. 5로 끝나는 날마다 보잘것없지만 피할 수도 없는 집안일을 늘어놓으며 행복했습니다. 

지금까지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이전 25화 계절의 맞은편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