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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작당모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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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샤 Oct 13. 2022

정원

< 작당모의(作黨謀議) 20차 문제: 같은 문장으로 시작하기 >



  자고 일어나니 세상이 바뀌었다. 그녀가 내 곁에 누워있다.      


  정민이 이놈은 결혼을 하고 애를 셋을 낳아도 한결같은 놈이다. 우리 나이에 키스까지는 그냥 악수 정도 아니냐. 게다가 이혼녀잖아. 키스나 악수를 해, 아니면 둘 다. 그러고는 킥킥킥킥 웃었다. 나는 맥주잔의 식어가는 거품을 바라보았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녀는, 내가 눈치챈 바로는 딸 하나 아들 하나였다. 카운터에 올려진 가족사진에는 그녀와 아들로 보이는 사람과 딸로 보이는 사람이 있다. 잠깐 스치듯 본 핸드폰 배경 화면도 세 명이었다. 아이 아빠라든가 남편이나 신랑 같은 사람은 없었다. 그래, 우리 나이에, 아이가 둘이면 키스는, 키스 따위는. 

  차라리 대놓고 키스가 나을지도 몰랐다. 그건 분명 욕망의 눈빛이었다. 나를 원하는 게 분명했다. 내가 헷갈리는 건 그녀가 원하는 것이 나의 영혼 일지 나의 육체 일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녀가 나의 눈을 보면 그녀는 나의 영혼을 원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녀가 나의 어깨와 가슴을 힐끔 볼 때면 나의, 적어도 나의 육체를 원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매번 ‘정원 화원’의 문을 열고 나올 때마다 어지럽다. 난잡하게 섞인 꽃 냄새 때문만은 아니다. 그녀의 눈빛이 나의 어디에 주로 머물렀는지, 그 순간들의 합계를 내야 하기 때문이다. 어떤 날은 영혼이고 어떤 날은 가슴 정확히는 가슴 근육이다.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이다. 기껏 원하는 게 그녀의 손을 잡는 것이라고 생각한 날, 꿈에서 그녀 안에 나를 넣었다. 그녀의 살을 부여잡는 상상을 하고 화원의 문을 열면, 그녀의 눈빛이 내 영혼을 씻어 주었다. 매일 그렇게 씻기고 싶은데, 화원으로 가는 택배는 많지 않다. 5일 연속 택배가 없던 날은 옆의 ‘울고먹는떡볶이’로 가야 할 택배를 들고 괜히 화원의 문을 열었다. ‘아, 죄송합니다, 잘못 왔네요’하며 최대한 자연스러운 실수인 척 웃었다. 그날이었다. 어쩌면 그녀도 나를 기다리는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하게 된 것은. 그녀 눈빛에 잠깐 머물고 간 감정을 나는 보았기 때문이다. 반가움이 눈빛에서 넘실대고 있었다.

  택배기사는 누구나 기다려. 나의 말에 현수는 쯧쯧 혀를 차며 정민에게 말했다. 그만하자, 아무리 말해도 아무것도 못할 놈이다. 정민은 한 수 더 뜬다. 저 새끼가 한가해서 저래. 둘째 놈이 학교에서 팔을 부러져서 왔는데 마누라는 어디 있는지 학교 선생 전화도 못 받고, 김대리가 말을 못 알아 처먹어서 내가 또 다했어, 나만 꼰대 되는 거야, 전세 나온 옆 동 보러 가려 전화했더니 그새 나갔대, 네가 지난 번에 말한 코인은 요즘 어떠냐, 같은 말들이 희미하게 들린다. 오히려 또렷해지는 건 바리스타, 그래, 2,200원짜리 바리스타였다. 

  저기, 잠시만요. 그녀가 불렀다. 이거 드시면서 운전하세요. 인스턴트커피는 잘 마시지 않는다. 커피 맛이 아니라 커피 맛을 이상하게 흉내 낸 맛이다. 집 앞 52년생 할머니가 내려주는 ‘52 커피’의 3,200원짜리 아메리카노만 먹는다. 가끔 택배만 기다리며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인스턴트커피를 받긴 하지만 대부분 동료들에게 준다. 나와는 아무 관계도 없는 음료 아니 물품이다. 어, 어, 감사합니다. 눈이 마주친다. 그녀가 나에게 원하는 건 영혼이구나. 영혼을, 끈덕지게 원하는구나. 나는 그리고 아마도 그녀는, 잘못 배달 온 물품을 사이에 두고 서로의 영혼을 원했다.

  그녀의 눈빛을 등 뒤에 두고 나와 상가건물 맨 끝에 있는 편의점으로 갔다. 바리스타, 바리스타, 바리스타, 2,200원. 그녀가 먹는 바리스타, 2,200 원하는 바리스타, 아마도 여기서 샀을 바리스타. 천 원을 아끼면서, 어쩌면 그녀와 우연히 마주치게 해 줄지도 모르는, 오 나의 바리스타. 벌써 환청이 들리는 듯하다. 아... 안녕하세요. 환청의 발원지는 왼쪽 귓가이다. 환청은 대부분 환상을 함께 몰고 온다. 민트색 체크 에이프릴을 입은 그녀를, 이렇게나 눈앞에 단단하게 존재하는 그녀를 나는 왜 환상이라고 둥글게 생각해 버린 걸까. 환하게 빛나고 있어서 그랬던 걸까, 환한 웃음에 마음이 둥글어져서. 

  여기서도 뵙네요. 

  우리는 어색하게 그리고 정겹게 바리스타 앞에 서 있었다. 그녀는 조금 주춤하다가 바리스타 하나를 집는다. 그건 원래 단골손님 드리려 한 건데 오늘 못 오신다고 해서. 다시 사실 건데 왜 절 주셨어요, 묻고 싶었지만 묻지 못했다. 묻고 싶었지만 묻지 못한 질문에 굳이 그녀가 말했다. 그녀 손의 커피를 낚아채 계산대로 갔다. 심드렁한 표정의 아르바이트 아가씨는 급하게 마스크를 썼다. 카드 여기 꽂아 주세요, 에 뒤따라온 그녀가 황급히 말한다. 아니, 이러시지 않으셔도 돼요. 괜찮습니다. 이러고 싶어서 이러는 겁니다. 뒷말은 입안에서 녹여버렸다. 그녀의 바리스타는 나의 바리스타보다 조금 더 차가운 몸을 가지고 있었다. 문득 그녀의 손을 만져보고 싶다는 충동이 거칠게 일었다. 따뜻하겠지 어쩌면, 뜨거울지도. 

  그럼 잘 마실게요. 

  가벼운 눈인사 끝에 미소를 올린 그녀가 먼저 편의점을 나갔다. 내 손의 미지근한 바리스타가 심심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뜨거운 내 심장을 식히기라도 하겠다는 듯이.

  40대 중반에 소나기 찍고 있구만. 커피 하나에 이렇게나 설렐 일이냐, 부럽다 너의 순정이, 미혼남만이 가질 수 있는 순수함이지, 그럼 그럼. 정민은 킥킥킥킥 하고 웃었다. 정민의 웃음소리에 나는 다시 두 가지를 떠올렸다. 키스와 악수. 악수를 먼저 할까, 키스를 먼저 할까 나름 진지해졌다. 두 가지를 동시에 하는 걸 상상하니 자세가 우스웠다. 둘 중 하나만 해야 한다면, 그건 키악스. 뭐든지 하고 나면 꼭 얘기해 줘라, 좀 궁금해지긴 한다. 현수가 바리스타처럼 심심한 표정으로 말했다.

  에코 물산과 디자인 백. 하필 두 개다. 하루에 하나씩 그래서 매일 가고 싶은데 이렇게 꼭 두 개가 하루에 배달된다. 어쨌든 오늘은 당당히 정원 화원의 문을 열 수 있다. 그리고, 그다음엔, 키스 아니 악수 아니 키스 아아니 악수를 해보자.

  차에 시동을 껐다. 심호흡은 좀 전에 다 했다. 문을 열고 나가서 정원 화원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된다. 고작 10미터도 안 될 거리가 아득하기만 하다. 

  안녕하세요. 오늘은 머리를 묶지 않은 그녀가 눈을 들어 나를 본다. 안녕하세요. 

  오늘은 두 개입니다. 네, 감사해요. 

  어제,

  커피 잘 마셨어요. 네, 저도요.

  이제 악수를 하면 된다. 뭐라고 하지, 악수 좀 해봐도 되겠습니까, 악수를 하고 싶습니다, 악수 부탁드립니다, 악수를 해보신 적 있으십니까, 악수가 좋으십니까 키스가 좋으십니까, 악수, 악수, 악수, 악, 악, 악, 악.

  마침내 입을 연다.

  그럼 수고하십시오.

  네, 안녕히 가세요. 그녀는 눈빛을 내 어깨에 올려둔 채 작게 입을 열어 대답했다. 

  손은 이미 거칠게 악수를 하고 있고 입은 그녀의 입술을 깨물고 있지만 발은 어느새 문을 열고 있다. 내 몸의 부조화가 이리도 조화로울 수 있다는 사실을 43년 만에 깨달았다. 정원 화원이 한 걸음씩 멀어진다. 하늘에 구름이 많아졌다. 차라리 비가 쏟아져라, 내 발과 손과 입과 5분 전의 머뭇거림을 다 씻어가 버려라.

  부아아앙, 진동이 내 손에 떨림을 더했다. 저기... 여기 화원인데요. 여전히 입을 작게 열어 말하는 그녀의 입술이 떠올랐다. 상상 속에서 입김을 불어넣고 키스를 이미 몇 차례나 했던 입술. 네. 출발하셨지요? 아, 아직 아닙니다. 엇, 그럼 잠시만요. 

  고새 머리를 묶은 그녀가 이쪽으로 온다. 왼손에 바리스타 하나 꼬옥 쥐고서. 뻔한 여자다. 그래서 최대한 뻔한 눈빛으로 그녀를 보려 한다. 여전히 고민을 하면서, 키스가 더 뻔할지 악수가 더 뻔할지. 

  운전하시다가 졸리실 때 드세요. 

  바리스타를 빤히 바라보았다. 받으면 안 된다. 받으면 키스도 악수도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다. 나는 손을 세워 그녀에게 내밀었다. 누가 보아도 악수를 청하는 모양의 손이었다. 그녀는 나를 보고 손을 보고, 다시 내 눈을 보았다. 그녀 손의 바리스타를 빼앗아 대충 차 안에 던져놓고 빈 그녀의 손을 나의 악수로 채워 넣었다. 그녀는 입을 열지 않고 나의 악수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손은 생각보다 뜨거웠다. 

  운전하면서 졸릴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녀가 네? 하고 입을 여는 순간 그녀의 입술을 닫았다. 악수와 키스는 동시에 이루어졌다. 생각만큼 어색한 자세는 아니었다. 짧고 약한 저항이 있었고 길고 강한 악수와 키스가 이어졌다.     


  자고 일어났더니 나의 세상이 바뀌었다. 그녀의 헝클어진 머리에서 꽃 냄새가 났다. 그녀가 눈뜨길 기다렸다가, 내 새로운 세상의 이름을 물었다. 

  정원이에요, 한정원.

  어제까지의 내 세상에 없던 정원에 텅 빈 바리스타가 뒹굴고 있다. 나는 지금, 정원의 한가운데에 서 있다.



      


* 소설입니다.

* 사진은 특정 브랜드 홍보 및 PPL의 목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아님을 밝힙니다.

* PPL 받고 싶습니다. 


작당모의 20차 문제는, '주어진 문장으로 시작하는 글쓰기'입니다. '자고 일어나니 세상이 바뀌었다'는 첫 문장은 작당의 이공계 출신 민현 작가님이 내셨습니다. 4인 4색의 바뀐 세상, 함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4인 4색, 결 다른 사람들이 글쓰기 위해 모였습니다.

제대로 한번 써보자는 모의이며, 함께 생각을 나누며 어울려 살자는 시도입니다.

주 목요일 매거진에 글로 작당 모의할 예정이니 지켜봐 주시길 바랍니다.

자, 그럼 수작(手作) 들어갑니다~, 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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