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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현 Oct 13. 2022

기억

< 작당모의(作黨謀議) 20차 문제: 같은 문장으로 시작하기 >

   자고 일어나니 세상이 바뀌었다. 역시나 또 바뀌었다. 놀랄 일은 아니다. 매일 아침마다 겪는 일이다. 매번 자고 일어나면 내 세상은 바뀌어 있다. 어제의 세상과 오늘의 세상이 아직은 겹쳐있어 조금 혼란스럽다. 바뀐 세상에 적응할 시간이 조금 필요하지만, 이제는 익숙하다. 어제의 세상은 꿈처럼 순식간에 기억에서 사라진다. 기억은 빠르게 오늘의 세상으로 채워진다.


   일어났어?

   새로운 기억이 도착한다. 새로 채워진 기억은 목소리가 나른한 이 여자가 내 아내라고 말하고 있다. 그녀를 알게 된 지는 10년이 되었고, 결혼해서 함께 산지는 이제 6년이 되었다. 그녀와의 사이는 나쁘지 않다. 그녀는 정이 많은 사람이다. 나를 믿고 의지한다. 그리고 나를 사랑한다.

   누워있어. 커피 내릴게.

   내 빰에 가벼운 입맞춤을 한다.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그러려고 그랬다기보다 새로 채워진 기억이 그렇게 시킨다. 그녀가 커피를 내리는 동안 새로운 기억을 찾는다. 기억은 나의 숨겨진 모습을 비춘다. 이런. 나는, 그러니까 새로운 세상의 녀석은 그녀를 속이고 있다. 다른 여자를 만나고 있다. 어제도 그녀가 아닌 다른 여자와 함께였다. 단발머리에 피부가 투명하고 뿔테 안경을 썼다. 연수. 이제 겨우 스물여섯이다. 나는 서른여덟이다. 스물여섯과 놀아난다고 욕 하는 건 무의미하다. 이제는 그가 나니까. 이번 세상에서 나는 나쁜 놈인 듯하다.




   지금까지 몇 번의 세상을 바뀌었는지는 기억에 없다. 꽤나 많았다는 느낌뿐이다. 미처 다 없어지지 않은 기억의 부스러기들만 군데군데 흩어져 있다. 다만 이 세상도 오늘이 지나면 지워지고, 또 다른 세상을 다시 만날 거라는 것만큼은 알고 있다.


   괜찮아? 어제는 왜 그렇게 많이 마셨어.

   그녀가 안쓰럽게 쳐다본다. 새로운 기억이 도착한다. 어제 혜화동에서 연수를 만났다. 커피를 마시고, 밥을 먹고, 펍으로 자리를 옮겼다. 펍에서 맥주를 마시는 내내 연수는 내 손을 놓지 않았다. 내 시선도 그런 연수의 눈동자를 놓지 않았다. 많이 떠들었고, 많이 웃었고, 많이 취했다.

   식탁에 아침 차려놨으니 먹어. 난 출근해.

   그녀가 집을 나선다. 식탁 위에는 액자가 놓여있다. 그녀와 함께 찍은 사진이다. 그녀와 내가 얼굴을 맞대고 활짝 웃고 있다. 둘의 얼굴만으로 사진이 꽉 차 뒷 배경은 보이지 않는다. 새로운 기억이 도착한다. 5년 전 해운대 해변을 함께 걷다 핸드폰을 든 손을 길게 뻗어 찍은 사진이다. 비싼 호텔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은 후였다. 가격에 비해 맛은 별로였다. 해변을 걸으며 그 식당 다신 가지 말자며 웃었다. 그 모습을 담았다. 연수를 처음 만난 것도 석 달 전 그곳, 해운대에서였다. 내가 먼저 반했고, 연수가 응답했다.


   거실을 둘러본다. 안락의자 두 개가 창 밖을 보고 있다. TV가 있을만한 위치에는 책장이 있다. 책장에 꽂힌 책들이 가지런하다. 책 한 권이 눈에 띈다. 새로운 기억이 도착한다.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책이다. 그 책에 등장하는 주인공이 나와 꼭 닮았다면서 그녀는 몇 번이고 그 책을 읽었다. 이어서 두 달 전, 그 책을 연수에게 선물한 기억도 도착한다. 연수를 세 번째 만나는 날이었다. 미리 서점에 들러서 그 책을 샀다. 책장을 앞 뒤로 몇 번씩 넘겨 헐겁게 만들었다. 손때를 묻혔다. 그러곤 가방에 욱여넣었다. 공원 길 벤치에 앉았을 때 책을 가방에서 꺼냈다. 무심하게 연수에게 건넸다. 주인공이 매력 있더라, 라는 말과 함께. 선물이 아닌 것처럼, 그저 무심히 내 일상을 건네는 것처럼, 앞으로도 자주 그럴 것처럼, 그렇게 건넸다.


   거실 한쪽 벽에는 그림이 걸려있다. 그림 속 검고 파란 하늘이 매혹적이다. 신혼여행으로 간 노르웨이에서 사 온 그림이다. 그곳에서 그녀와 오로라를 봤다. 보라색으로 춤추는 오로라가 까만 밤하늘을 뒤덮었다. 그 모습에 압도되어 둘 다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건 좀 부럽다. 오로라를 직접 보면 어떤 기분일까. 기억으로만 꺼내 보는 오로라는 선명하지 않다.

   책장 위에는 턴테이블이 놓여 있다. 턴테이블 안에는 LP판 한 장이 들어 있다. LP판 안에는 유키 구라모토의 피아노 연주곡이 들어 있다.

   길거리에서 파는 걸 샀어. 턴테이블도 없는데, 그래서 들을 수도 없는데 안 살 수가 없더라. 언젠가는 들을 수 있겠지.

   그 말을 가만히 듣던 그녀가 그 해 내 생일 선물로 턴테이블을 샀다. 단 한 장의 LP판을 돌리기 위해서.


   집안의 구석구석 그녀에 대한 기억이 묻어있다. 그리고 그 기억 속에서 그녀는 언제나 나와 함께 있다. 그리고 그 틈새로 끊임없이 연수가 발을 얹고 있다. 연수를 네 번째 만나던 날, 집에 데려다주는 길 골목에서 연수와 긴 키스를 나누었다. 이대로 헤어지기 아쉬웠다. 손을 맞잡은 채 골목에 서서 밤하늘을 쳐다봤다. 연수는 노르웨이에 가보고 싶다고 했다. 난 연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우린 그곳에서 유키 구라모토를 들을 거야.


   거실 옆 작은 방에는 책상이 있다. 그 책상 위로 작은 상자가 놓여있다. 상자 안에는 분홍색 아기의 신발이 들어있다. 새로운 기억이 도착한다.

   우리 아이는 딸이면 좋겠어.

   그녀와 결혼 후 1년이 지났을 때 분홍색 아기 신발을 샀다.

   우리는 딸을 갖게 될 거야. 너를 닮아 이쁠 거야.

   그녀가 웃었다. 나도 그녀를 따라 웃었다. 분홍색 아기 신발이 작은 방을 놓이고 2년이 지나고 나서야 그녀가 임신했다. 5월, 봄이 한창인 어느 날이었다.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내게 임신 소식을 알렸다.

   우리 아이, 겨울에 태어날 거래.

   그 소식이 기뻐서 그녀의 손을 잡고 울었다.


   출산 예정일을 석 달 남기고 그녀는 아이를 유산했다.

   아이가 죽었어.

   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이틀이 지나고서야 그녀가 울었다. 그녀는 일주일간 울었다. 나는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새로운 기억이 도착한다.

   우리 아이는 딸이면 좋겠어.

   혜화동에서, 커피를 마시고, 밥을 먹고, 펍으로 자리를 옮기고, 맥주를 마시는 내내 손을 놓지 않고, 시선을 놓지 않고, 많이 떠들고, 많이 웃고, 많이 취했던 바로 어제, 그녀에게 했던 말을 연수에게 했다.

   너를 닮아 이쁠 거야.

   연수가 웃었다. 나도 연수를 따라 웃었다.


   내가 역겹다. 내가 가증스럽다. 내가 혐오스럽다. 아니지, 내가 아니지, 이건 내가 아닌 거지, 단지 오늘만 나인 거지. 내일이 되면 나는 내가 아닌 거지. 졸음이 쏟아진다. 매번 그랬다. 누군가의 일생의 기억이 하루 만에 쏟아져 들어오는 건 피곤한 일이다. 침대로 들어가 눕는다. 잠시 눈을 붙인다.




   인기척에 눈을 떴다. 퇴근한 그녀는 피곤해 보였다. 피곤해 보이지만 웃고 있었다. 그녀가 안쓰러웠다. 내일이면 또 기억에서 사라져 버릴 사람이지만, 그녀에게 이야기해주고 싶었다. 내가 떠난다고 이 세상이 그대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면, 혹시라도 내가 하루 동안 누군가의 몸을 빌리고 있는 거라면, 내일이면 원래의 주인이 이 몸을 다시 차지하게 된다면, 그녀가 더 이상 속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할 말이 있어.

   응?

   이 말, 꼭 해야 할 것 같아서.

   뭔데?

   난 사실, 그러니까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매일 다른 세상을 떠 다니며 살아. 자고 일어나면 바뀐 세상이 내게로 와. 이번엔 여기였던 거야.

   그녀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놀랄 만한 이야기이긴 하다. 아니, 아직 이해를 못 한 걸 수도 있다. 이해를 해야 놀라기도 할 테니까. 이해를 하든, 못 하든, 놀라든, 놀라지 않든 그건 중요한 게 아니지.

   나는, 아니 당신의 남편은 지금 바람을 피우고 있어. 상대는 연수라는 이름의 스물여섯 살 여자야.

   그녀는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숨 마저 멈춘 듯했다. 흔들리는 눈빛으로만 나를 응시했다. 그러다 고개를 숙였다. 나는 말을 멈췄다. 그녀를 바라봤다. 그녀의 어깨가 들썩였다. 바닥에 톡, 물방울 하나가 떨어졌다. 울고 있는 건가. 그녀의 반응이 조금 헷갈렸다. 벌써 울고 있는 건가. 이제 막 이야기를 꺼냈는데, 그녀는 이미 이야기를 다 들은 듯했다. 이미 다 들어서, 더는 궁금하지 않은 듯했다. 알고 있었던 건가. 다 알고 있으면서 모른 척하고 있었던 건가. 말을 계속 이어야 하나 고민이 됐다. 그녀가 숨을 크게 들이켰다. 고개를 들었다. 얼굴이 일그러져 있었다. 일그러진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슬픈 눈이었다. 아니, 알 수 없는 눈이었다.

   내가 연수잖아.

   그녀가 말했다. 그녀의 알 수 없는 눈이 떨렸다.

   당신 괜찮아지고 있었는데, 지난 2개월 동안은 괜찮았는데, 다 나은 듯 괜찮았는데.

   그녀가 바닥에 엎드렸다. 그녀가 울었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놀랄 수도 없었다. 기억이 안개에 싸인 것처럼 흐릿했다. 내가 연수잖아. 내가 연수잖아. 그러고 보니 그 말을 전에도 들었던 것 같다. 그때도 그녀의 얼굴은 일그러져 있었던 것 같다. 그때도 알 수 없는 눈으로 나를 쳐다봤었던 것 같다. 그때도 그녀가 바닥에 엎드렸고, 울었던 것 같다. 기억이 뒤죽박죽 섞였다. 어느 기억이 진짜인지 알 수 없었다. 머리가 아팠다. 부엌으로 가 냉장고 문을 열었다. 소주를 꺼내 병뚜껑을 돌렸다. 벌컥벌컥 마셨다. 들이부었다. 목구멍이 뜨거웠다. 아팠던 머리가 나아지는 것 같았다. 연수가 보고 싶었다. 졸음이 쏟아졌다. 머릿속으로 기억이 쏟아져 들어오는 건 피곤한 일이다. 침대 위로 쓰러졌다.




   일어났어?

   새로운 기억이 도착한다. 새로 채워진 기억은 목소리가 나른한 이 여자가 나의 아내라고 말하고 있다. 그녀를 알게 된 지는 10년이 되었고, 결혼해서 함께 산지는 이제 6년이 되었다. 그녀와의 사이는 나쁘지 않다. 그녀는 정이 많은 사람이다. 나를 믿고 의지한다. 그리고 나를 사랑한다.


   나 역시 그녀를 사랑한다.




작당모의 20차 문제는, '주어진 문장으로 시작하는 글쓰기'입니다. '자고 일어나니 세상이 바뀌었다'는 첫 문장은 작당의 이공계 출신 민현 작가님이 내셨습니다. 4인 4색의 바뀐 세상, 함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4인 4색, 결 다른 사람들이 글쓰기 위해 모였습니다.

제대로 한번 써보자는 모의이며, 함께 생각을 나누며 어울려 살자는 시도입니다.

격주 목요일 매거진에 글로 작당 모의할 예정이니 지켜봐 주시길 바랍니다.

자, 그럼 수작(手作) 들어갑니다~, 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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