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미, < 혼자라는 건 >
남자의 목소리는 생김새보다 가냘펐어요. 전국에 순댓국집이 몇 개가 있는지 아냐. 맞은 편의 남자는 대답 없이 깍두기만 집어 먹었죠. 전 소리 나지 않게 수저와 젓가락을 제 앞에 놓고 스테인리스 컵에 물을 따랐어요, 최대한 소리가 나지 않게. 삼만 개는 족히 넘을 거다, 시바. 남자도 깍두기를 하나 입에 넣고 계속 말했어요. 고속도로에 널린 게 순댓국이야, 그거만 해도 시바. 전 소리 나지 않게 물을 한두 모금 마셨고 그들은 특 순댓국을 말없이 먹기 시작했어요.
컵을 보며 전국의 고속도로에 널린 순댓국집들을 생각했어요. 정말 삼만 개는 족히 넘겠구나. 지금 이곳만 해도 벌써 몇 개야. 이십 년 전보다 두 군데나 더 생겼어. 제 앞에 놓인 순댓국을 후후 불면서, 거품을 걷어내면서, 문을 바라보면서, 그러다 문이 열리면 얼른 고개를 숙이면서, 순대가 몇 개가 들었나 세는 척 고개만 살짝 들어 방금 들어온 이가 누군지 확인하면서, 삼만 개가 족히 넘을 순댓국집 가운데 하필 이곳에서 혼자. 설마와 혹시를 번갈아 가며, 그때처럼 들키길 바라며 들키지 않기를 바라며.
순전히 걷고 싶어서였어요. 잠을 자기는 싫고 출출하고 자극적인 맛이 땡기고. 친구는 열 시 넘어하는 드라마를 보겠다 했으니 컵라면을 사 오는 건 자연스레 제 몫이기도 했지만, 낯선 여름밤길을 혼자 걷는 건 꽤나 설레는 일이었죠. 그 아인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않고 바코드만 찍었어요. 천육백 원입니다, 하지 않아도 될 말을 할 때만 흘끔 이 쪽을 봤어요. 대충 접어 주머니에 넣은 이천 원을 건네고 사백 원을 거슬러 받는 일이 거의 매일 밤 있었어요. 덕분에 아침은 대체로 팅팅 부어있었지만 그건 친구도 마찬가지였기에 스물한 살의 여자 둘은 당당하게 원룸 문을 열고 나갈 수 있었죠. 아침의 편의점은 저보다 키가 작아 보이는 중년의 여자였고, 몇 시 교대인 걸까, 하는 궁금증이 잠시 일었다 바로 가라앉곤 했어요.
저녁 여덟 시 즈음이었을까요, 여전히 긴 여름 해가 그제야 퇴근의 기미를 보일 때. 연극부 회장 오빠는 만 원짜리 몇 장을 내 손에 쥐어주더니 '요 앞 편의점 가서 돈 되는 대로 맥주랑 소주 사 와'라고 했어요. 그날따라 매일 가던 '안주공방'을 안 가고 공강에 책상을 밀어놓고 술을 마시자며. 원어연극 2부의 조연을 하던 신입생 놈이 연락도 없이 사라졌다가 예비역 오빠 손에 잡혀온 날이었거든요. 일찍 연극 연습을 접고 이른 오후부터 술을 마셨어요. 술을 못해서 안 마신 제가 가장 상태가 괜찮아 보였는지 제게 말한 거예요. 이건 심부름일까, 강요일까, 부탁일까 잠시 고민했지만 바로 엉덩이를 털고 일어났어요. 편의점을 가라고 했기 때문이에요. 새벽 교대 시간만큼 저녁 교대 시간도 궁금했던 까닭에, 새침한 표정으로 '선배는 만만한 게 나지' 하며 강의실 문을 열고 나왔어요.
아직 어스름이 있는 시간에 보는 그 아이는 뭐랄까, 방금 냉장고에 넣은 캔맥주 같았어요. 아직 준비되지 못한 그래서 더 기대가 되는. 그 시간에 들어서는 저를 본 아이가 조금 웃었어요. 이유는 몰라요. 아마 거의 매일 샤워를 하고 난 한밤중의 저를 보다가, 땀과 술기운과 안주랍시고 배를 채운 새우깡 냄새에 쩔은 모습이 우스워서였을 거예요.
갑자기 드라마의 훈남들처럼 손을 입에 가져가 흠흠 하더니, 어색하게 '어서 오세요'라고 하는 거예요. 저를 보고 하는 인사면 비웃어주기라도 했을 텐데 이쪽은 보지도 못한 채, 어서 오세요. 장바구니에 아무 캔맥주를 슥슥 담는 제 뒷모습을 보는 그 아이의 표정이 다 보였어요. 어떻게 아냐구요? 그런 건 그냥 아는 거예요. 그냥 알 수 있는 거라구요.
쿵, 카운터에 맥주와 소주 더미를 올리는 소리에 눈썹을 한 번 움찔하더니 그 아인 자연스러운 기계처럼 바코드를 찍어댔어요. 거스름돈을 준 그 아이는 괜스레, 봉지에 담아드릴까요, 저는 괜히 뾰로통하게 네. 극히 일반적인 아르바이트생과 손님이었던 그 아이와 저는 그렇게 몇 초를 마주 서 있었어요. 봉지에 담긴 맥주들은 바로 제게 오지 않았어요. 봉지는 잠시 그 아이의 손에 머물더니 바로 그 아이의 오른손으로 쥐어졌어요.
문까지 들어드릴게요.
네? 라든가 왜요?라는 말을 할 새도 없이 저는 그 아이의 뒤를 따르게 되었고 문 밖으로 나가 몇 발자국 더 간 후에야 봉지를 건네받을 수 있었어요.
그럼 또 오세요.
그 아이가 들어간 편의점 문은 하릴없이 종소리만 딸랑딸랑. 천천히 강의실로 돌아오며 생각하고 생각하고 생각했어요. 도대체, 왜? 그리고 내 심장은 도대체, 왜?
그다음 날이 어떤 날인 줄 아세요? 제가 태어나 순댓국을 처음 혼자 먹은 날이에요. 연극 연습 끝나고 다 같이 술 마시던 자리를 빠져나왔어요. 배가 아프다, 컨디션이 안 좋다, 오빠들은 몰라도 되는 그날이다, 뭐 할 말은 많았어요. 편의점 대각선으로 '병천 순댓국'이 있었거든요. 편의점서 딱히 살 건 없고 저녁은 먹어야겠고, 굳이 편의점 내부가 보이는 순댓국집에 스물하나 여대생이 홀로 들어가 '순댓국 하나 주세요'하고 앉은 거예요. 밀레니엄을 넘긴 지 이삼 년 밖에 지나지 않은 그 시절엔 여대생이 혼자 순댓국을 먹는 일은 거의 없었어요. 물론 처음엔 부끄러웠어요. 아주머니는 '혼자 왔어?' 또는 '학생만?'을 물었고 저는 민망함에 창밖만 보며 끄덕끄덕. 창밖엔 편의점과 편의점을 지키는 아르바이트생과 해가 막 산 뒤로 넘어간 능선이 뚜렷이 보였어요. 그건 그거대로 꽤나 낭만적인 풍경이었어요. 순댓국을 천천히 먹으며, 뜨거웠으니까요, 오래 그 풍경을 바라보는 기분이 좋았어요.
방학도, 연극 연습도, 개학까지도 한 달이 더 남았고 그중 이십칠일 정도를 편의점을 들렀어요. 어느 날은 아이스크림 어느 날은 홈런볼 어느 날은 캔커피를 사러. 그 아인 눈을 마주치고 조금 웃으며 '어서 오세요'라고 말했고 계산 후엔 꼭 눈을 보며 '또 오세요'라고 했어요. 또 오라니 또 가야지 다음 날은 뭘 살까, 고민하며 여름을 보냈어요. 물론 맞은편 순댓국집에서 혼자 저녁을 먹는다, 이런 말은 절대 꺼내지 않았구요.
요일만 기억나요, 목요일. 다음 주가 개강이라 연극 연습도 내일까지, 친구와의 원룸생활도 내일까지였어요. 오늘의 품목은 숏다리. 숏다리를 카운터에 올리고 이천 원을 주고 바코드를 찍을 때 '이름이 뭐예요?'라고 묻는 걸 이백 번쯤 연습했을 거예요. 숏다리를 카운터에 올리고 이천 원을 주고 바코드를 찍는데 그 아이가 말하더라구요.
다음 월요일에 입대해요.
그 와중에 건네는 거스름돈 오백 원은 꼬옥 받았어요. 일단 해야 할 말을 해야 했어요. 이백 번 이상 연습한 말은 잊은 지 오래였고.
다시 못 보는 건가요.
대답 없이 고개만 숙이고 있는 그 아이를 세워두고 문 쪽으로 걸어오는데 제 뒤로 들려오더라고요.
밥 혼자 먹지 마세요.
마침 방에 들어가니 손예진이 우는 장면을 보고 친구가 따라 울고 있었어요. 그렇게 슬퍼? 하고 저도 같이 울었어요. 둘은 각자의 몫만큼 슬퍼하느라 울어댔고 뜯기지 못한 숏다리는 짧은 다리를 그러모아 눈물만큼 짠 기운을 여물게 하고 있었어요.
남편이 첫 드라이브 데이트 갈 때 말해줬던 게 기억나요. 저런 산 능선을 군사용어로 공제선이라고 해요. 반짝이는 기지나 장비 같은 걸 두면 밤에도 잘 보여서 좌표 찍기도 쉽고. 그래서 아군이나 적군 모두에게 되게 중요해요. 지형지물을 잘 파악해야 하는 군인이 알려준 용어, 공제선.
그 아이에게서 밥 혼자 먹지 마세요, 라는 말을 듣고 나서 이곳에 혼자 앉아 보기까지 이십 년이 걸렸어요. 삼만 개는 족히 넘을 순댓국집 가운데 유독 이곳을 떠올린 건, 공제선 때문이었어요. 편의점 뒤로 보였던 해가 막 넘어가 공제선만 뚜렷이 보이던 그 풍경, 그 풍경의 주인공이었던 편의점이 문득 그리워졌기 때문이에요.
지금 다시 보니 공제선의 어딘가에서 무엇인가 반짝이네요. 어떤 중요한 기지나 장비겠지요. 저의 한 때 반짝였던 편의점도 그대로네요. 실은 간판이 바뀌었어요. 25였던 편의점이 seeu로. seeu. 많이 듣던 말, seeu. 또 오라고 해서 또 왔더니, 머리가 조금 희끗한 아저씨가 있어요. 인상이 좋아요. 손님들이 들어가면 눈을 마주치며 인사하네요.
순대는 여섯 개가 들었고 조금 싱거워요. 새우젓을 조금 풀어요. 먹기 좋게 식은 것 같아요. 말도 없이 먹던 남자 둘은 구겨진 티슈만 상 위에 남긴 채 사라졌어요. 국물을 떠서 입에 넣어요. 순댓국 맛이에요. 전국에 삼만 개가 족히 넘는다지만 맛은 비슷비슷한, 구수하고 담백하고 기분 좋게 허기를 채워주는 순댓국 맛. 맛이 조금 변했나, 잘.. 모르겠어요. 그때 맛이 어땠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아요. 맛으로 먹었던 게 아니었으니까요.
주변 풍경이 다 변해도 공제선만큼은 변함이 없어요. 그러고 보니 그때도 무언가 반짝였던 것 같아요. 그래서 잠시 별인가 생각했던 것도 같아요. 그곳의 좌표는 어떻게 될까요. 위도와 경도를 따르다 보면 어느 점에서 만나겠지요. 반짝임은 어느 숫자로 치환되어 드디어 명확성을 갖게 돼요. '반짝이는'이나 '별처럼'의 수식의 영역에서, 정확한 인식 또는 군사적 필요의 영역으로 편입돼요.
공제선의 좌표를 이어가 보아요, 모든 위치는 각자의 좌표값을 갖게 되겠죠. 그러다 어느 지점에서 멈춰요, 어느 불확실성이 확실해지는 곳에서. 그곳에 반짝이는 어떤 이가 있어요. 또 오라고 말해요. 그래서 이렇게,
왔잖아.
해가 산 뒤로 넘어가자 공제선이 더욱 뚜렷해져요. 반짝이는 곳에서 출발해 어느 방향으로 좌표를 따라야 좋을지 가늠해 봐요. 좌표를 따라 이동하다 보면 어느 순간 멈춰 서서 명확해질 수 있는 때가 올까요. 그때까지 수많은 위도와 경도를 그저 거쳐야 하는 걸까요. 좌표 위에서 헤매다 불확실이 불분명으로 흐려지면 그땐 어떻게 해야 하는 건가요.
공제선은 저리도 뚜렷한데 추억의 좌표는 갈수록 불분명해져요. 눈앞이 자꾸만 흐릿하게 일그러져서, 안 그래도 시간 속에서 닳아버린 위도와 경도를 정확히 보기가 더 힘들어요. 반짝이는 확실성 같은 걸 기대하기엔 이십년이란 시간의 다리는 너무나도 길어요.
순댓국은 식어서 맛이 없어졌어요.
아무래도 또 오지는 못할 것 같아요.
* 짧게 지어낸 이야기입니다.
*사진 출처: 딥블루의 일상 이야기 블로그
진샤와 폴폴이 시에 관한 모든, 뭐든 주고받습니다.
최영미 시인의 '혼자라는 건'에는,
처음으로 순대국밥을 먹은 날이 오롯이 들어있어요.
차마 울지 못한 건
안전하게 저녁을 보내야 하는
지금을 추억보다 급하게 삼켜야 하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