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절 콩이라고 부릅니다. 제가 콩처럼 깜찍하거나 볶은 콩처럼빤드르르해서는 아니에요. 콩, 이라고 발음할 때의 느낌이 좋아서... 일 거라 믿고 싶네요. 콩을 고수하던 그녀가 며칠 전 절 쿵,으로불렀어요. 영화 <메모리아>를 함께 본 다음에요.
<메모리아>는 쿵!으로 시작해서 쿵!으로 끝나는 영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제시카는 어느 날 그 소리를 들어요. 운명의 시작인 듯한, 지금 막 사건이 끝났단 신호인 듯한, 핵심이 곧바로 심장까지 돌진하는 듯한
쿵.
들을 때마다 까마득한 곳으로 떨어지는것처럼 철렁했어요. 그 소리가 왜 자기한테만 들리는지 그녀는 몰라요. 모르니까, 소리를 따라돌아다닐 수밖에 없죠.
우리한테도 그런 소리가 있어요.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살려고 국적을 바꾸거나, 맛의 기원을 찾아 밀림을 헤치거나, 사진 한 장을 위해 절벽을 오를 때 들리는 소리.
소리의 존재를 의식했든 아니든 소리가 곧 들리겠단예감은 가질 수 있죠. 예감한 사람은 출발할 준비가 된 사람이고요. 매일의 반복 속에서 소리의 실마리를 찾아 떠나려고, 운동화 끈을 단단히 묶는 사람.
쿵!소리가귓가에 머무르는 동안,영화를 한 편 더 봤어요. 메타포를 직설로 받아들이면 오해가 생기는 영화였어요. 영화에서 발견한이런 표현은 오래전전경린의 책에서 처음 만났을 거예요.
너무 사랑해서 널 먹을 수도 있을 것 같아.
위험하고 뜨거운 문장이라, 그 책을 읽었단 걸 아무한테도 말 못 할 정도였죠. 문장 앞에 주저앉아 턱을 괴고, 떠오르는 모든 이미지와 의미를 외면했어요. 묵직하게 떠오르는 하나가 나타날 때까지.
두 번째 영화는 이 문장에서 출발한 이야기였어요. 마지막에 이르기까지의 장면들은 다 마지막 장면을 위한 전주였고요. 영화는 어느 쪽으로도 해석 가능한 결말을 보여줘요. 출발이기도 도착이기도 한 쿵,처럼.
매런이 그를 제 속에 받아들였을 거란 해석엔 이의 없이 고개를 끄덕였어요. 그러면서도 저는 결국 그녀가 그를 '먹지' 않았을 거라 생각했어요. 그가 내 속에 있으면 손을 잡을 수 없잖아요. 안을 수도, 머리칼을 만질 수도, 눈을 바라볼 수도 없잖아요. 그는, 나의 밖에 있어야 나와 사랑을 할 수 있는 존재잖아요.<메모리아>의 그와 그녀가 서로의 저장 장치이자 안테나였던 것처럼요.
절 콩이라 부르는 사람은 만날 때마다 꽃을 줍니다. 꽃이 지기 전에 우린 다시만나고요. 꽃다발은다음 만남까지 가까워지는 시간을 재는 모래시계 같은 거예요. 한 송이가 시들해지면 이마가 서늘해지고, 꽃다발 절반이 고개를 떨군 날은 목이 잠기지만 마침내 한 송이만 살아남아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있는 걸 보면 그런 생각이 들어요.
곧 우리, 만나겠구나. 머지않아 제철 꽃을 품에 안고 거리를 활보하겠구나. 크게 웃느라 앞에 선 사람이 돌아볼 정도로 둘일 땐 더없는 명랑으로 피어서.
네 글이 미치게 보고 싶어. 그거 말곤 아무것도 안 보고 싶어.
글 쓰란 말 대신 그녀는 그렇게 말해요. 모든 일을 작파하고 책상 앞에 앉게 하는 말이죠. 어떻게 말해야 제가 움직이는지 아는 사람의 말이고요.좋아하는 책과 사람들을 빠짐없이 움켜쥐고 있다 하나만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도 엉엉 우는 우리는,감정에 빠지는 걸 기꺼워한다는 점에서 닮았어요.
함께 달 같은 떡을 먹었어요. 찬바람 앞에 막 내놓은 붕어빵을, 제사상에 가족들이 올려 줬으면 싶은 음식 얘길 하다사리가 다 불어 버린 김치찌개를.널 많이 좋아해,에 꼭 맞는답을 못 찾아 꿀꺽 삼킨 묵밥을.
테두리가그을린 그리움 같던 빈대떡도, 육즙을 땀처럼 흘리고 있던 만두도, 베트남 여행 이야길 들으며 파리 단골집을 떠올렸던 쌀국수도 같이 먹었고요. 떡 벌어지게 차린 상 앞에서 나 요즘 소식해,란 고백을 들었을 땐 젓가락으로 조심조심 들어올린 보쌈을 그녀의 소복한 밥 위에 올려놓고 싶었죠. 함께일 때만 특별해지는 사소한 걸 먹을 때마다
시드는 중인 꽃을 생각했어요. 과자와 과일과 떡과 초콜릿처럼 껍질만 남는 것들. 어디에나 있어서 기억과 한 몸일 수밖에 없는 것들, 잊지 말란 말 대신 주머니에 찔러준 삶의 증거들을.
그녀를 만나고 나서 겁이 없어졌어요. 틈날 때마다 표현하고, 상대의 표정으로 하루를 밝히고, 속이 다 비치게 웃다 마음을 들키고, 끝내 같이 있는 것 말고 뭐가 사랑이냐고 되묻는 걸 아무렇지 않게 하게 됐단 뜻이에요. 지나가는 모든 구름을 기억할 순 없지만
아, 저기 좀 봐.
하면서 닮은 사람이 가리킨 구름은 마음에 자국을 남기니까 잊을 수 없죠.
자국을 남긴 구름 같은 날이 얼마나 오래 선명할 지 몰라만날 때마다 서로를 찍고, 담고, 살피는 시간을 아낄 수 없어요.
아끼지 않는다- 지난 계절에 나온 제 책 제목을 부정하는 동시에 긍정하는 이 말로 사랑이란 말을 대신해요.사랑을 어떻게 다르게 말할까 고민하다 보면, 마음에 드는 말을 발견하게 되기도 하니까요.
다음 눈썹달이 뜨는 저녁에 밥 먹자는 말이나, 꽃이 시들기 전에 만나자는 말이나,
나의 쿵! 은 널 발견한 날이었단 말처럼.
쿵.
그녀가 떠오릅니다. 달처럼, 달떡처럼, 오래 닦아서 윤기 나는 웃음처럼.
진샤와 폴폴이 시에 관한 모든, 뭐든 주고받습니다.
이 글은 이병률의 시 <모독>에서 영감을 받았습니다. 감정과 몸의 허기, 우리를 살게 하는 약속의 새끼손가락을 한 편으로 그러모으면 아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