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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샤 Dec 06. 2022

투명한 존재들이 불투명한 흔적을 남길 때

소설 속에 웅크린 시


  미리 밝혀두려 한다. 지금부터 쓰는 글은 최대한 솔직하려 한다. 흔해빠진 수식어와 관용어구들만을 사용할 것이다. 문장 형식이나 아름다움 같은 것들은 고민하지 않을 것이다. 솔직하고 솔직해서 바닥이 투명하게 드러나는 그런 글을 쓸 것이다.




  안녕,

  뭐 어떤가. 안녕, 이라고 안부를 묻고 싶은 사람에게 안녕, 하고 묻는 것이 뭐 어떤가 말이다. 누군가는 그런 말을 하기 위해 꼬박 하루를 고민하겠지만은 나같이 둔하고 무심한 사람은 안녕, 하고 먼저 물을 거다. 대신 앞에 있다면 안아줘야지. 안녕, 하고 묻고 나서 상대가 대답도 하기 전에, 꼬옥. 대답을 듣는 게 중요한 일이 아니라는 것처럼.

  안녕, 하고 묻고 싶은 사람이 있다는 게, 그 사람과 연락이 닿을 수 있다는 게 그리하여 안녕, 하고 물을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진다는 게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알아서 나는 자신 있고 밝은 목소리로 안녕, 하고 물을 것이다. 전날 밤부터 연습했던 티가 나지 않게 하려고 일부러 큰 목소리로. 자,

  안녕.





  소설 속 시 같은 문장들에 대해 써보자고 했을 때 조금은 울적했다. 내가 소설 속에서 '아 이건 시잖아' 했던 문장들은 죄다


죽음


곁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죽음을 불러내야 할 때 소설은 돌연 시로 둔갑하였고 그래서 나는 오히려 다행이라고 안도하거나 때론 처절하게 슬퍼해야 했다. 죽음이 시 안에 흡수된다면 조금은 아름다워 지지 않을까 싶어 안도했고 같은 이유로 더 참혹하지 않을까 싶어 슬퍼해야 했다. 어떤 식이든 베개가 흠뻑 젖어서 베갯잇을 갈아야 했지만 그런 건 문제가 되지 못했다. 죽음도 눈물도 문장도 시도 투명해서, 그 모든 것이 내 안에 침잠해도 형태를 남기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이 난감해서 나는 자주 거울 앞에 섰다. 무언가가 내 안에 남아있긴 한 거 같은데 그걸 발견해 보려고. 거울 앞에 선 나는 그제야 알 수 있었다. 그건,



갈치가 내 몸을 먹는다. 너덜거리는 살점을 먹고 손상된 내장을 뜯는다. .......

몸이 조금씩 짓물러갔다. 몸속에서 푸른 가스가 피어오르고, 난 점점 가벼워짐을 느꼈다. 발밑의 폐선이 우물에 떨어진 돌멩이처럼 조금씩 작아져갔다.......

이제, 몸은 더 이상 내 것이 아니다. 바지에 붙어 있던 검은 고동들은 작은 틈을 비집고 들어와 허벅지에 빼곡하게 붙었다. 고동의 느린 움직임에 따라 조금씩 몸이 녹아가는 것을 느꼈다. 찢겨진 내장 속 배설물이 흩어졌다. 그것은 작은 먼지처럼 물속에 퍼져 어린 물고기들의 먹이가 되었다. 내부는 천천히 부패하고 있었다. 몸속에 가득 찬 가스는 나를 조금씩 떠오르게 했다.......

힘을 잃어버린 피부에 수없이 많은 생채기가 났다. 몇 번씩 몸이 위아래로 뒤집히고 온몸으로 단단한 우박이 뚫고 지나가듯 많은 충격들이 텅 빈 몸을 흔들었다. 피부가 벗겨진 손가락의 뼈가 하얗다. 툭, 오른손 검지의 끝마디가 물속으로 가라앉았다.......

나는 바람보다 가벼워졌다. 나는 바다를 건너고 산을 넘는다. 국경을 넘어 마을로 향한다....... 나를 기다리고 있을 당신의 머리 위로, 그리고 당신의 말라버린 성대 속으로. 조금만 더 기다려주면 좋겠다.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 <가나> 부분, 정용준 -



숲의 나무들이 언 눈의 무게를 간신히 지탱하고 있는 것을 뒤로한 채 마을을 살짝 빠져나온 노인이 비자 숲 우물에 뛰어들었다. 물이 말라버린 뒤여서 그의 투신은 실패로 돌아갔다. 그 소리가 퍽이나 요란했지만 아무도 듣는 사람이 없었다. 하늘에서는 달무리 속을 유영하던 새끼 상어 한 마리가 원 무지개를 에돌아 별자리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죽으려던 노인 쪽으로 한껏 날을 세우던 비자 이파리 속의 잎맥에서 어린 지문들이 도드라졌다. 별이 된 제 기포를 짚어보고 싶은 손바닥들로 숲이 밤새 술렁거렸다. 다행히 하늘의 별빛이 갈라지는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 <유빙의 숲> 부분, 이은선 -



밤이 이슥해지면 차츰 수효가 많아진 그림자들이 내 그림자에 기대어왔어. 여전히 눈도 손도 혀도 없이 우리는 서로를 맞아주었어. 서로가 누군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지만, 서로가 얼마나 오래 함께였는지는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어. 처음부터 함께였던 그림자와 새로 온 그림자가 나란히 내 그림자와 겹쳐질 때, 설명할 수 없는 방식으로 그들의 기척을 구별할 수 있었어. 어떤 그림자들은 내가 알지 못하는 고통들을 오래 견딘 것 같았어. 손톱 아래마다 진한 보랏빛 상처가 있던, 옷이 젖어 있던 몸들의 혼이었을까. 그들의 그림자가 내 그림자 끝에 닿을 때마다 끔찍한 고통의 기척이 저릿하게 전해져 왔어.

만약 그렇게 좀 더 시간이 흘렀다면, 어느 순간 우리는 서로를 알게 될 수 있었을까. 마침내 어떤 말을, 어떤 생각을 주고받을 방법을 찾아낼 수 있었을까.


                                                                         - <소년이 온다> 부분, 한강 -



  위의 소설들에 나온 가스, 기포, 그림자 이런 존재들은 천천히, 필요한 만큼의 시간을 움켜쥐고 투명해지고 있다. 육체와 질감을 가진 것들에서 무언가가 빠져나가고 있는 중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투명해질 것이지만 지금으로서는 어떤 과정을 거치고 있다. 나는 이 부분들을 느리게 읽었다. 마치 시를 읽을 때와 비슷한 속도로.

  시는 '지점'을 가지고 있는 문학이다. 읽다가(읽다, 라는 동사도 자주 시와는 어울리지 않는 기분이 든다) 어느 지점에서 멈춰야 한다. 곱씹고 처음으로 돌아가고 그 문장 속에서 멈추지 않는 그리하여 벗어날 수 없는 회전문처럼 돌아야 하는 그런 지점. 위의 소설들은 지점을 가졌다. 물고기와 고동이 내 신체를 관통하는, 마침내 바람처럼 그녀에게 가닿는. 어미 상어의 죽음 후 튀어나온 새끼 상어(이 또한 투명하다) 밤하늘로 향하는 시간 툭툭 떨어져 나가는 손의 지문이 무수히 바닥에 깔린 숲, 거기서 들려오는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투신의 소리. 어느 혼은 총알의 관통 순간만으로 죽었겠지만 어느 혼은 보랏빛으로 고통이 물들 때까지 죽음에 이르느라 젖고 또 젖어야 했던 그 모든 혼이 켜켜이 쌓인 곳의 그림자들이 어른거리는 순간. 이 지점들을 나는 빠르게 읽어나갈, 페이지를 자연스럽게 넘길만한 힘도 도리도 염치도 없었다. 시만큼 문장들도, 그들의 죽음의 단계들도 투명해서 나는 또 거울 앞으로 갔다. 거기서,



마침내 그들은 도미니크와 카트린이 살고 있는 오두막집의 문을 열었다. 그들은 벌거벗은 채 서로 꼭 껴안고 잠들어 있었다. 남자는 젊은 여자의 젖가슴 위에 손을 얹어놓고 있었다. 여자의 배는 땀과 정액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그들은 서로 사랑을 했던 것이다. 깊은 정적만이 깃들어 있었다. 군인들은 어떻게 해야 할지 망설였다. 육체를 서로 나누는 법이 없이 눈이 매섭고 말씨가 공격적인 남자들과 여자들을 찾아내게 될 줄로 기대했던 것이다. 성직자들의 태연하기만 한 모습과 창백함에 군인들은 감동했다.      


손끝 하나 건드리지 않고 그들은 다른 마을로 떠났다.


                                                               - <다다를 수 없는 나라> 부분, 크리스토프 바타유 -


  요즈음의 나는 삶의 목적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속으로 콧방귀를 뀐다. 풉, 웃기네. 살아보라지, 목적 같은 게 얼마나 쓸쓸하고 무력한 단어인지 알 테니까. 이런 가소로운 자세는 이 소설을 읽은 후부터 생겼다. 도미니크와 카트린이 탄 배가 프랑스를 떠날 때 그들의 목적은 얼마나 위대하고 고매하며 확고했던가. 그들의 온 생을 바칠만한 가치를 지녔던 목적은 그들 삶의 마지막과 비교했을 때, 풉, 웃기네. 정치와 종교와 군사와 권력은 그들의 창백한 나체 앞에서 눈꺼풀을 움직이는 소리조차 내지 못한다. 그래서 군인들은 손끝 하나 건드리지 못하고 다른 마을로 떠났으리라. 총을 든 군인이 나란히 누운 성직자들의 아직 뜨거운 나체를 앞에 두고 고요한 눈으로 바라보는 장면. 이런 시간과 장소를 우리는 한 글자로, 시詩라고 한다.



  놓친 것이 있다. 육체의 절멸, 그것만이 죽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육체는 껍데기일 뿐이라고 말하는 사내를 눈동자를 목소리를 어둠을 우리는 만날 수 있다, 소설을 가장한 시 속에서.


하지만 나는 다르다.

내 가슴속에는 약 천일 동안 야에코와 보낸 추억이 남아 있다. 또 백 그루가 넘는 사과나무가 있다. 지금까지 그래 왔듯이 나는 내일부터도 그 둘에 매달려 살아간다. 그 길뿐이다. 살아가는 게 아니라 매일매일 확실하게 죽어간다. 야에코의 인생은 드디어 시작되었지만, 내 인생은 끝났다.    

 

나는 신음 소리를 내며 뒤척인다.

 너머 달이 보인다. 달은 파랗지도 않고 빨갛지도 않은 현묘한 빛을 온 마을에 뿌리고 있다. 사슴 울음소리가 점점 다가오고 있다. 바람에 떨어진 사과를 먹으러 이쪽으로 내려오는 것이겠지. 실컷 먹어라. 전부 먹어치워도 상관없다. 나는 야에코네 사과를 먹을 테니까. 갑자기 달의 형태가 일그러지면서 빛이 번진다.


                                                                  - <달에 울다> 부분, 마루야마 겐지 -


  여자의 이름은 야에코다. 남자의 이름은 알 수 없다. 자신의 이름, 자신의 존재 그 무엇도 이 남자에게 중요치 않다. 남자에게는 삶 자체가 야에코이다. 야에코를 기차역에 내려주고 온 밤 남자는 죽었다, 정확히는 그의 영혼이. 앞으로의 생에서 그는 야에코네 사과를 먹을 것이다. 달을 보며 울 것이다. 사과나무를 돌볼 것이다. 그러나 남자의 인생은 끝났다. 죽음은 이렇게나 아무것도 아니다. 야에코를 보낸 남자에게 남은 것이라곤 야에코와의 추억과 야에코네 사과나무와 '내 인생은 끝났다'라는 파리해진 정신뿐이다.

  내 인생은 끝났다,

라는 문장을 나의 성대를 거쳐 육화해 보았다. 그러고 나서 나는 어떤 느낌과 부딪힌다. 그 느낌은 시를 읽다가 어느 지점을 밟는, 뭉툭한 느낌이었다. 그럴 땐 거울 앞에 서야 한다. 그곳에는



거울 속 나는

불투명한 무늬 속에 담겨 있었다

어쩌면 나의 것일지도 모르는 비자림 숲 지문과

내 옆에 서 있을

총알이 허리를 관통한 그림자와

바다거북을 따라 항해를 시작할 푸른 가스와

우윳빛 정액을 배꼽에 남긴 성직자들

사랑하는 여인에게 전별금을 건네주고 죽어가기 시작하는 이들의

입김이 내게 와

불투명한 얼룩을 남겼다


책의 앞면으로 돌아왔다

투명한 이야기들이 불투명한 무언가를 남기는

이 책의 제목이 뭐였더라


죽음은 말이 없어서

대신 시만 남겼다




죽음을 말하면서 알량한 목소리로 솔직함 어쩌고 하는 내가 싫어진다. 이렇게나 별로인 내가 감히 시를 읽겠다고 시집을 펼친 까닭에 방금 익기 시작한 자기혐오는 더 흉한 냄새를 풍기기 시작한다.

그럼에도 이런 내게 함께 읽고 쓰자고 말해주는 이가 있어 나는  

별거 아니라는 표정을 하고

이 계절의 어느 지점에 캐럴을 들을 것이다.

그런 우리 앞에는 삶처럼 반짝이는 오너먼트들이 영원함의 무게만큼 흔들릴 것이다.


그 때 우리 사이에 놓일 유일한 말은 아마도,

안녕.




* 대문 사진: 이은선 소설집 <유빙의 숲> 표지 일부





우리가 유일하게 함께 이야기했던 작가, 한강. 그녀는 소설가이자 시인이기도 하지요. <소년이 온다>의 성희 언니는 시집 읽는 걸 좋아해요.(정대, 성희, 진수... 이런 이름들은 너무 아파서 꺼내기가 두려워요, 앞으로 계속 그럴 거예요) 그때 성희 언니와 함께한 이들은 복숭아를 깎아 먹어요. 슬프지만 아마 그 복숭아는 맛있었을 거예요. 살아있었으니까요.

복숭아, 어떤 시였더라. 너무 많은 겹을 가져서 그 곁에 갈 수 없다는, 복숭아가 나온 시. 나희덕 시인의 <그 복숭아나무 곁으로>였어요. 한강을 함께 읽고 아파했더니 조금은 허기가 져요. 맛있는 거 먹을까요, 폴폴이 골라온 시 속의 음식들, 그 좋은 냄새 앞에 앉을래요.




진샤와 폴폴이 시에 관한 모든, 뭐든 주고받습니다.

우리 사이의 계절이 가을에서 겨울로 바뀔 때
너 아닌 무엇을 너라고 부를 용기를 내고
투명한 것들 속에서 불투명한 자국을 발견해 내고
마침내 그건
사랑이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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