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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샤 Dec 31. 2022

리뷰를 쓰는 이유

박화진_<아끼는 마음>



  리뷰는 쓰지 않는다. 내가 쓰지 않아도 리뷰는 넘쳐난다. 리뷰를 쓴 이들 모두가 그런 마음으로 쓴 건 아니겠지만 내게는 모두 '이 책 너무 좋아요 꼭 읽어보세요'로 읽힌다. 책이 좋은 건지 책의 리뷰가 좋은 건지 헷갈릴 즈음 일단 독서리스트에 올린다. 독서리스트만 몇 권이 될 것만 같다. 그렇게 리뷰를 쓰는 사람이 많은데, 굳이 내가 하나 더 보탠다고 무슨 의미가 있나 싶다. 나 없어도 하등 문제없는 리뷰의 세계. 누추한 자존심이다.

  무엇보다, 리뷰를 잘 쓰지 못한다. 리뷰든 독후감이든 나에게 책에 관해 말하라 하면 '재미있다', '주인공이 멋있다', '행복하게 끝나서 좋았다' 또는 '슬프게 끝나서 슬펐다' 정도로 마무리된다. 도무지 멋들어지게 쓸 자신이 없다. 이런 내가 책에 관해 쓰면 오히려 책의 내용을 왜곡시키고 좋지 못한 인상을 줄게 뻔했다. 리뷰 말고도 쓸 게 많고 쓰고 싶은 게 많은 나는 모난 고집처럼 나의 글을 쓴다. 짧은 감상은 남길지언정 '리뷰'나 '독후감'은 내 글쓰기에는 포함되지 않는다 포함되지 못한다.


  서두를 장황하게 늘어놓는 이유는, 내가 얼마나 큰 용기를 냈는지 보이기 위해서이다. 리뷰를 못쓰는 사람이 쓰는 리뷰라는 명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거칠고 성긴 리뷰 때문에 어떤 진심이 잘못 읽힐 위험을 미리 방지하기 위함이다. 이 모든 까닭을 다 덮을 이유 단 하나, 리뷰를 쓰고 싶게 하는 책이기 때문이다.  







  독특한 문장이나 문체를 가진 작가들이 있다 아니 많다. 그들의 문장과 문체에 자주 매혹되고 절망한다. 어떻게 이런 문장을 쓸 수 있을까, 무얼 먹으면 이런 문체를 지닐 수 있는 걸까. 그러나 단순한 나는 쉽게 인정한다. 이것은 그 혹은 그녀만의 문체, 문장이야. 내가 감지하지 못할 정도의 노력이 있었을 테고 이렇게 써내게 되었겠지. 수용 말고는 할 수 없는 나는 그때부터 즐거운 마음이 되어 그 혹은 그녀의 문장과 문체를 읽어 내려간다. 행복한 독자이자 감상자가 되는 건 이렇게나 간단한 일이다. 지구의 중력을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는 이가 신계의 존재를 흠모하거나 시기 질투해서는 안 된다.

 

  그녀의 문장은 시기나 질투나 절망이나 이런 흡사한 종류의 감정과는 다른 기분을 불러일으켰다. 마음에 내려앉았다가 어느 순간 녹아내렸다, 6월 어느 나른한 오후 두 시의 아이스크림처럼. 가슴에 조용히 붙은 줄 알았던 문장이 새벽에 잠시 본 달처럼 잊혔다. 잊혔다고 생각된 문장은 초저녁의 달을 보는 순간 가슴 뒤쪽에서 고요히 떠올랐다.

  마음이 '나도 그랬던 적이 있었어'라고 내 기억을 두드리게 하는 문장 앞에서 오래된 일화를 따라가 본다. 운동장을 달리던 네가 땀을 닦는 걸 바라보는 데 옆에서 친구가 소리쳤어, 민 힘내, 넌 내 옆의 친구를 보며 활짝 웃었고 그래서 나도 활짝 웃을 수 있었어, 그걸 친구가 볼까 봐 한 발 물러서야 했던 95년의 네모난 운동장과 동그란 너의 땀과 조금 각이 졌던 나의 마음이. 그런 생각을 하고 책으로 돌아오면 그녀의 이야기들은 멈추었던 넷플릭스가 다시 재생되는 듯이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기다렸어'하고 나긋하게 말해주듯이.


  나도.

  맞아.

  그랬었지.

  라는 쉬운 문장들 말고 좀 더 매끈하고 고상한 단어로 그녀의 문체를 설명하고 싶지만 내가 책을 읽으며 가장 많이 내뱉은 말들이 저 단어들이었다는 심심한 고백을 해야겠다. 내가 잊고 있던 나의 찰나의 그러나 소중했던 순간들을 고스란히 가져다주었다.(이런 뻔하고 밍밍한 표현으로밖에 드러낼 수 없는 나의 메마른 표현 앞에서 내 모니터 속 활자들은 바닥이 마른 어항 속 붕어의 아가미 같다)  

  그녀는 그녀의 문체로 그녀의 이야기를 할 뿐이었다. 그 속에서 나는 나의 이야기들을 건져낼 수 있었고 혹시.. 의 마음으로 그녀의 이야기 위에 겹쳐놓았는데, 어색하거나 울퉁불퉁한 부분은 없었다. 그건 감정의 속살이었다.


2월의 끝에 잠시 스친 봄바람 같은

벚꽃이 다 졌구나라고 말하는 입술 옆으로 떨어지는 마지막 벚꽃 잎 같은

태어난 지 두 시간 만에 보는 아이의 한일一자 발톱 같은

우리 안에 알아도 몰랐다는 듯이 지나온 감정의 속살들이 살며시 누워있었다, 이 책의 여기와 저기에.


  이 책 안에 만지게 되는 문장과 문체에서 나는 최초로 불인정과 불수용을 경험했다. 쉽게 받아들이고 넘어갈 문장이 아니었다. 감感을 순수하게 각覺하게 하는 문장과 문체는 배우고 익혀 나의 것이 되도록 하고 싶었다. 구조나 형식, 글의 본질과 사유 이러한 것들을 뛰어넘는 문제였다. 내가 진짜 살아있구나 살아서 이런 맛을 보고 저런 색을 느끼는, 그 모든 감각들을 잘 뭉쳐 그리움도 만들어내고 사랑도 조각해내고 마침내 쓸쓸함마저 다소곳하게 피어나게 할 줄 알았던 사람이었구나,라는 투명하고도 호릿한 진리를 깨우치게 한다.


공기 속을 떠도는 침묵은 스폰으로 떠먹는 티라미수처럼 조용히 으깨진다  
                                                                                 
- '테이프를 붙인 마음' 중


먼 마을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이 떠나는 사람의 흰 입김 끝에 매달린 겨울이다

 - '모르는 게 나을까요' 중


어떤 가능성은 시장 구석 파란색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꼬치 하나에 떡볶이 두 조각을 꽂을 때 확장된다   
 
 - '그냥 떡볶이가 아니라' 중



잃었던, 잃은지도 몰랐던 감각들이 소소소 피어나고 나는 이 문장들을 읽기 전과는 다른 사람이 된다.

새로운 감각을 지닌 그리하여 가녀리고 쉽게 날아가는(폴폴) 것들을 오래 볼 수 있는

어떤 냄새 앞에서 1막의 향기와 2막의 분위기와 3막의 방향까지 알아차릴 수 있는

눈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려도 왜 우는지 묻지 못한 말을 입술 끝에 매달아 놓는,

완전히 다른 사람.


생경한 기분이 된다.

단 몇 문장만으로 사람이 이렇게나 바뀔 수 있구나 하게 만드는 책을 가만히 내려놓고

나는 내 왼손으로 오른손을 잡는다. 가운데 손가락의 상처는 아물려면 멀었고 뭉툭한 손끝이 예쁘지 않은, 여전한 손이다. 이렇게나 나의 겉은 변함이 없는데 속 안의 것들은 조금 전과 같은 것이 전혀 없다. 그건 작가가 행간에 솜씨 좋게 숨겨 놓은 손톱깎이로

깎아내고 다듬어내고 '지금은 어때' 하고 물어봐주어 마침내 보이게 된

최초의 정서였다.

그건 오로지 그녀의 문장과 시선만이 해낼 수 있는 일이었다.

사랑한다는 말 없이 사랑을 말하고 그립다는 글자 없이 그리움을 토해내게 하고 보고 싶었다는 말 대신 함께 먹는 것들을 앞에 두고 흰 눈웃음만, 그녀가 건네온 서정의 이력서를 느리게 훑어보며

나는 그렇게 다른 사람이 되었다.







  하루가 지나면 새로운 해이다.

  새로운 해에 지금까지의 나와 다른 사람이 되고 싶은 누군가가 있다면 이 책을 쥐어주고 싶다. '희미하고 연약하고 부서지기 쉬운 것들 위로 부는 바람을 간직하는*' 기분을 알고 싶다면, 그 커다란 감각 속에서 다시 태어나는 나를 만나고 싶다면, 그건 생각보다 쉬운 일이라는 걸 경험하게 될 테니까.

  바로 이것이,

  리뷰를 못쓰는 내가 용기를 내어 리뷰를 쓴 이유이다.



혼자 하는 사랑이 상대 없이 스스로 완전해질 때
다 울고 난 얼굴처럼 개운해진 슬픔을
처음 보는 바다 보듯 본다


- '올해 말일에 만날 수 있을까' 부분



* 작가 소개



아끼는 만큼 애틋한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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