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고 많은 단골손님들 중 하나였다. 특이한 점이 있다면 부부라는 것 정도. 이삼일에 한 번씩 와서 마른오징어와 땅콩 안주를 시키고 생맥주를 각자 두 잔 마시고 갔다. 아가씨가 참하네, 정도의 칭찬은 그들뿐 아니라 다른 이에게도 들었다. 술을 마시면 쉽게 나오는 말이어서 나는 그저 속없이 ‘감사합니다’하고 넘겼다.
낮은 더워도 밤바람은 시원해질 즈음 부부 중 여자 손님이 나를 불러 세웠을 때만 해도 나는 맥주를 추가 주문할 거라고 생각했다. 아가씨가 일을 참하게 잘하는 것 같아서 그래요, 실은 우리가 저기 골목 끝에 편의점을 하거든, 다음 달부터 주말 오전만 아르바이트해 주면 어떨까 하고.
호프집 아르바이트를 그만두고 간단한 아르바이트를 찾아볼까 고민하던 때였다. 하필 편의점이라니. 사장님 부부는 더 생각할 것도 없이 좋은데, 저분들 밑에서 일해 보고 싶긴 한데, 편의점이라니. 절대로 편의점 아르바이트는 하지 말자고 다짐한 후 오 년이 흐른 여름이었다.
스무 살이 아름다운 건 무엇이든 해볼 수 있기 때문이었고, ‘무엇이든’ 항목 중 가장 먼저 한 것은 편의점 밤샘 아르바이트였다. 단 두 달의 아르바이트에서 내가 얻은 것은 다섯 가지였다. 잠 못 자는 것의 서러움, 새벽의 고독, 돈벌이의 고단함, 폐기물의 행복, 그리고 ‘꿀밤’이었다.
폐기물이 거의 나오지 않을 정도의 대학가 대형 편의점이어서, 가끔 나오는 폐기물, 특히 삼각김밥이 주는 행복은 이십 년이 지난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것을 제외한 나머지는 그럭저럭 견딜 만했는데, 꿀밤에서 나는 울음을 참지 못했다. 졸음을 몰아내기 위해 잠시 핸드폰을 본 사이 선물용 오렌지 주스 열 병이 든 박스 하나가 사라졌다. CCTV 속 그는 조용히 들어와 그것만 가져갔다. 사장님은 빠르게 소리를 지르고 천천히 꿀밤을 때렸다. 한 대, 두 대, 세 대, 네 대, 다섯 대. 시급에서 깔 거니까 그렇게 알아. 굴욕, 치욕, 모욕 세상 모든 욕이 나를 뒤집어썼고, 그렇게 서서 꿀밤을 맞은 나는 사장님보다 차라리 나를 욕했다. 왜 그걸 못 봤을까, 나는 대체 뭐 하느라 못 봤을까, 어쩌다 그것 하나 지키지 못해 법정 시급보다 오백 원 적게 받는 시급마저 까먹는 걸까.
서울역의 독고 씨가 대구행 열차에 오르는 독고 씨가 될 수 있었던 건, 염 사장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염 사장님은 그의 사람됨 하나로 그를 직원으로 고용하였고 조용히 믿어 주었다. 그 힘을 바탕으로 독고 씨는 청파동의 인물들에게 각자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온기를 나누어 준다. 앞이 보이지 않는 고시생, 아들과의 관계가 단절된 중년의 여성, 기댈 곳 없이 지쳐가는 가장, 실패의 확신 말고는 확신할 것이 없는 극작가, 이들에게 독고 씨는 새로운 삶을 여는 열쇠를 주었다. 옥수수수염차, 전기난로, 도시락, 캔맥주 같은, 지극히 편의점다운 열쇠. 그들은 열쇠를 돌려 새로운 삶의 문을 여는 힘까지 독고 씨에게 받았다.
마지막은 독고 씨였다. 그는 새로운 인생의 열쇠를 염 사장님으로부터 받아 스스로가 문을 열었다. 쉽지 않았지만 해냈다. 모두에게 독고씨가 있듯이, 그에게는 염 사장님이 있었다.
주말 오전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첫날, 포스기를 익히고는 밀려오는 후회를 어찌하지 못했다. 진열대의 컵라면이 나를 보고 비웃었다. 결국 여기로 제 발로 올 거였으면서. 가끔 문을 열고 들어오는 초등학생들이 껌과 사탕을 사 갔고, 지나가던 아저씨들이 비슷한 종류의 담배를 사 갔다. 불편했다. 그냥 호프집 저녁 아르바이트나 계속할걸.
오후 세 시가 되자 예의 사람 좋은 얼굴의 사모님이 오셨다. 별일 없었지요? 일요일은 교회 예배 끝나는 시간만 좀 붐빌 거예요, 수고했어요, 내일 봐요. 편의점을 나오는 내 손에 폐기 삼각김밥이 세 개가 있었다. 집에 가자 엄마는 삼각김밥을 눌러 볶음밥을 해주었다. 이상하게 눈물이 났다.
일요일은 사모님 말씀대로 열두 시 전후만 손님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잘생긴 젊은이가 한 무리의 초등학생을 데리고 왔다. 초등부를 맡은 청년부 성도였고, 그의 맑은 얼굴 덕분에 일요일 오후가 해사했다. 한가해진 나는 책도 읽고 마지막 학기 조별 과제도 했다. 하루 만에 편의점이 편해졌다.
사 개월은 빠르게 지나갔다. 늦가을의 어느 일요일 오후, 청년부 성도와 꼬맹이들이 한 차례 휩쓸고 간 후 나는 카운터 의자에 앉아 졸고 있었다. 학기는 막바지로 치달았고, 과제는 그만큼의 속도로 많아졌다. 영어 논문은 읽어도 읽어도 이해하기 힘든 문장들이 이어졌고, 어느새 사장님은 내 앞에서 영어 논문과 졸고 있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죄송해요.
이 말 말고 할 수 있는 말이 없어서 ‘죄송해요’라고 한 번 더 말했다. 사장님의 표정은 묘했다. 이런 인류는 처음 본다는 눈과 코와 입이었다. 나는 재빨리 나의 시급을 생각했고, 두 시간이 까일지 세 시간이 까일지 계산했다. 사장님은 냉장고를 열어 박카스를 두 병, 캔커피를 두 캔을 가지고 왔다.
죄송하고 싶지 않으면, 이런 거 마셔 가면서 해요, 계산 안 해도 되니까.
염 사장님이 떠나는 독고 씨를 가볍게 안고 그의 등을 두드려 주었을 때, 나는 사장님의 손이 떠올랐다. 내 앞에 커피와 피로회복 음료를 밀어준 손으로 어깨를 가볍게 두 번 툭툭 쳤다. 다섯 대까지는 아니어도 세 대까지는 꿀밤을 맞을 각오한 나의 어깨가 가볍게 위아래로 들썩였다. ‘감사합니다’라고 하고 싶었는데 눈물을 닦느라 말하지 못했다. 편의점의 편안하고 따스한 기운이 늦가을의 찬바람을 밀어내고 있었다.
지인은 내게 이 책을 추천하며 말했다. 재밌고 감동적인데, 이런 인물들은 존재하지 않아, 판타지 소설이라고 생각하면 돼. 지인은 틀렸다. 독고씨처럼 인생의 밑바닥이 어찌 생겼는지 보고 온 사람도 어딘가에 있고, 청파동 사람들도 당장 내 주변에 몇이나 있다. 무엇보다, 염 사장님 같으신 분은 내가 직접 겪었다. 염 사장님처럼 직원을 생각하고 보살피는 사장님을 나는 보았다. 그들에게서 인생의 작은 진리를 배웠고 지금까지도 그것을 간직하며 살고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이해를 바탕으로 한 배려였다.
어제 친구에게 책을 권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소설인 것 같아, 그래서 더 재밌고 감동적이야. 친구가 물었다. 왜 불편한 편의점이지? 나는 웃으며 말했다. 내가 너한테 인수인계한 편의점 사장님 부부 기억하지, 그분들처럼 직원 마음 불편하게 하는 사장님이 나오거든. 직원들 울리는 사장님.
친구는 조용히 웃으며 책의 표지를 바라보았다. 독고 씨의 네모난 등이 거기에 있었다.
포천 도서관 전국 독후감(지정도서 김호연 소설 '불편한 편의점') 공모전 입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