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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샤 Oct 01. 2022

당신

취기가 실린 바람은 눈물과 웃음의 순서를 헷갈리는 경향이 있었어요. 알코올에만 잘 취하는 건 아니었어요. 숫자로 도수가 매겨질 수 없는 비에도 바람에도 햇살에도 쉽게 취했고, 이별할 때는 비나 바람이나 햇살이 있었어요. 이별할 땐 늘 취해있었던 거예요. 웃음을 먼저 보인 건지 눈물을 먼저 참은 건지는 알 수 없어요. 바람도 헷갈리는 걸 저라고 어찌 알 수가 있을까요. 

그 기차역 뒤의 풍경에는 초록이 넘쳐흘렀고, 또 다른 기차역에는 새벽의 미명이 낮게 깔리고 있었어요. 한낮의 공항은 에어컨이 켜놓은 마음으로 우리의 사이를 달래고 있었구요. 그 모든 순간을 이별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오직 담아둔 마음은 '다음'. 물론 말로는 하지 않았어요. 거추장스러운 약속은 이별에 어울리지 않으니까요. 조용한 의식 아래 밀봉해 둔 선언 같은 거예요. 다음, 다음에 봐, 다음에 만나. 

그런 말은 꺼내는 순간 모두가 알아차려버리기에 더욱 꺼낼 수 없어요. 다음, 은 이 세계에 없다는 것을 말이에요. 그렇게 어설프게 슬프고 아쉽기가 싫어서 다들 손만 흔들어요. 그땐 초록과 미명과 에어컨도 알게 돼요, 이 세계에 부재하게 될 '다음'을.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약속의 언어들을. 다행이에요, 기차에는 정해진 시간이 있어서요. 그렇지 않았더라면 결국 누군가는 먼저 눈물을 보였을지도 몰라요. 헤픈 감정이 기차보다 먼저 도착하게 했을지도 몰라요. 


당신, 이라고 불러도 될까요. 당신(當身). 듣는 이를 설정해 놓지 않고 부르는 이인칭 대명사 앞에서 과거의 몇몇이 호출당해요. 아, 당신은 과거가 아니려나. 운전은 잘하지 못해도 1종 면허는 있는, 납작하기보다 입체적인 삶을 살길 바라는, 여전히 사랑의 바운더리에 둔다는, 사랑하는 이들이 켠 등불 쪽으로 간다는, 이 시간에도 글을 쓰고 읽는 이들의 이름을 당신 안에 나열해요. 고백은 쉽지 않지만 다행스럽게도 오늘은 비가 와요. 비는 고백을 부추겨요. 

아직 시동을 끄지 않은 차에서 괜히 심장을 부여잡아요. 사랑한다고 말했다가 또 어느 기차역에서, 어느 공항에서 손을 흔들게 될지 몰라 마음을 평평하게 잡아당겨요. 팝업북같이 일어서는 마음을 이기지 못해 '사랑한다'라고 써요. 지우고 '당신을 떠올립니다'라고 써요. 고딕체의 네모 글씨가 자꾸 동그랗게 변하는 건 비가 와서 그런 거예요. 당신의 이름에 동그라미가 있어서 당신이 보내는 편지에 동그란 젖은 자국이 있어서 창가에도 동글동글한 것들이 맺혀서 어쩔 줄을 모르겠어요. 그래서 겨우 책을 읽고 영화를 봤어요. 


차가운 물을 틀어 시금치를 씻고 콩나물을 씻어야겠죠. 차가운 물에 흔들리는 시금치와 콩나물과 손과 시간을 보다가 문득 당신을 이름을 부르는 순간이 오겠죠. 핸드폰을 들고 난감한 고백을 전하겠죠. 어느 역에서 이별할 것인지 그건 그때에 가서 운명이 정해주겠죠. 그 시간까지 우리는 순서대로 차근차근 순간을 밟아가겠죠. 

그러나 당신과 내가 할 이별에는, 누추한 낯빛을 하고 '다음에 만나'라고 소리를 내볼래요. 초록이나 바람이나 에어컨을 배경으로 하지 않고, 그들의 도움 없이 '언제 어디서 또 봐'라고 일반적이고 상식적이며 평이한 약속을 할래요. 그래서 이별이 이별답지 않도록 할래요. 기차에 오르고 비행기에 타면서 혼자 울지 않을래요. 서로가 울고 있는 걸 알면서 혼자만 울고 있다는 듯 그렇게 억울해하지 않을래요. 촌스럽게 해 놓은 다음 약속이 세련되게 기억될 수 있게 역과 공항과 우리의 거리에 다음을 가득 뿌려둘래요. 만남이 있으면 이별이 있다는 그런 진리 같은 거짓은 믿지 않을래요. 만남 속에서만 햇빛을 보고 비를 맞고 바람을 쐴래요. 그리고 그 이름은 당신이어야 해요. 


사랑해요, 다음에 만나, 같은 말들을 함부로 하도록 해요. 성글고 거칠게 길바닥에 깔아 두고, 발길에 닳도록 해요. 반들반들해진 그 말들 위에서 우리, 어리석은 얼굴을 하고 철없는 표정으로 웃어요. 우리의 할 일은 오직 그것뿐이에요. 


시금치를 씻고 데치러 갈게요. 당신의 이름을 부르고 볼품없는 고백을 해도 놀라지 말아 주세요. 나를 취하게 한 건 바람이에요. 눈물이 먼저인지 웃음이 먼저인지 헷갈려하지 마세요. 그런 건 중요치 않아요. 취한 바람이 우리 곁에 있었다는 것, 우리에겐 이별 말고 다음이 있다는 것, 이 모든 걸 바람이 증명하고 있다는 것. 이것만 기억하면 돼요. 



부디, 

당신, 

빗길에 운전 조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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