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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샤 Dec 04. 2020

일상에 잡아먹히는 중이다

시어머니는 70년 인생을 건네주셨다

자야 한다. 머리가 띵하다. 심각한 거북목 때문에 안 그래도 두통과 이명과 눈 침침을 달고 사는데, 절대적 수면 부족으로 인해 일상이 힘겹다. 버겁고 먹먹하다. 그래도 정신 차려야 한다. 이 집에 나와 첫째 딸과 둘째 딸, 셋째 딸 뿐이기 때문이다. 몸의 버거움은 차치하고서라도 마음의 버거움이라도 털어내 보고자, 또 노트북 앞에 앉았다. 나는 이런 사람이다. 절대적으로 잠이 필요한데, 그 잠을 걷어내며 또 자판을 두드린다. 내일은 후회하겠지만, 마음은 가벼워지겠지. 후자의 선택이 내겐 더 절실한, 나는 그런 사람이다.  


   남편이 다른 부대로 이동했다. 주말부부 중이지만 코로나로 이동금지 명령이 떨어져, 강제 이산가족 중이다. 어머님은 분양받으신 집이 완공되어 1년간의 며느리 살이를 마치고 가셨다. 갑작스럽게 6인 가족이 4인 가족이 되어버렸다. 어른이 해야 할 일의 1/3 정도만 해내어도 되던 일상이, 갑자기 다 내 몫이 되어 버렸다. 요 며칠 브런치 글을 못 쓴 이유가 그 때문이다. 브런치를 시작하고 이렇게 오래 쉬어본 적이 없다. 그 전에는 잠을 줄여도 어찌 되었든 낮에는 조금 쉴 수 있었으나, 이제는 불가능하다. 낮에는 쉼 없이 꼬맹이 수발을 들어야 하고, 잠이 들면 어머님 짐이 나간 자리를 정리해야 한다. 밥을 하고 빨래를 하고 청소를 하고 설거지를 해야 한다. 아이들이 하원 하면 네다섯 시간은 육아 지옥 체험이다. 앉아있는 순간이 없다. 아이들을 재우면서 끊임없이 솟아나는 글감들에 파묻히다 어느새 잠의 어둠에 먹혀버린다. 밤에 잠시 깨면 브런치 댓글에 답만 겨우 달고 있다. 지금도 글을 쓸까 잠을 잘까 무수히 고민하다가 결국 노트북을 켰다. 내일은 더 시간이 없을 것만 같다. 이렇게 일상에 잡아먹히다 진짜 '나'가 없어져버릴 것만 같다. 무서웠다. 뭐라도 끄적여 보자, 는 마음으로 쓰고 있다. 눈이 너무나도 뻑뻑한데 그래도 일단 써야겠다. 써야 살아낼 힘이 생기는 사람이니까.






   19년 12월 17일 오신 시어머니는 20년 12월 1일 가셨다. 1년을 가득 채우고 가셨다. 내내 며느리 간다고 마음 안 좋아하셨다. 코로나로 이삿날도 지정해야 하는데, 늦게 접속했더니 남은 날이 그 날 뿐이었다. 서운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1년 동안 막내 도맡아 키우시고 집의 먹는 일을 해결해 주셨다. 밥하는 손은 타고나지 못한 내게, 먹는 일이 해결되는 것은 해방과도 같았다. 기본적인 반찬부터 온갖 국은 물론, 나는 집에서 해 먹을 거라곤 생각도 못한 고구마죽, 문어숙회 같은 것을 자주 해주셨다. '인내'가 주재료인 음식들이었다. 먹고 싶다고 말만 하면 닭볶음탕이나 닭죽, 갈비찜 같은 것도 후딱 해주셨다. 남이 해준 것이 가장 맛있다는 진리를 새삼 확인하며 그러나 그 진리와는 별도로 어머님은 정말 손맛이 좋으셨다. 늘 FM을 지켜야 하는 성향 탓에 모든 요리도 정석대로 하시니 맛이 없을 수가 없었다.

   이사 가기 얼마 전엔 배추김치, 깍두기, 파김치, 알타리김치까지 '김장 미션 클리어'하고 가셨다. 부엌일에 서툰 손을 가진 내게, 최소한 어떻게 하는 것이라는 정도의 가르침은 주셨다. 여전히 서툰 나의 손은 그만큼 해내지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이제는 마음가짐이 달라졌다. 부엌에 서는 것 자체에 큰 거부감이 들었었으나, 어머님이 보여주신 헌신으로 거부감만큼은 사라졌다. 그저 서서 썰고 볶고 끓이면 되는 일이다. 이 마음만으로도 나는 한 단계 레벨 업되었다.

   먹는 것만큼 크게 다가온 것이 육아였다. 아기를 '쉽게' 재우는 일, 우는 아이 '쉽게' 달래는 일, '쉽게' 먹이는 일을 손수 몸으로 보여 주셨다. 아기 씻기는 일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보여주셨고, 아기에 맞추어 놀아주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보여 주셨다. 어머님은 마치 '육아의 정석' 같았다. 아이와 함께 하는 모든 순간이 힘겨워 보이지 않았고 행복해 보였다. 나는 그것을 지켜보는 선에서 행복했다. 우리 아이에게 저런 할머니가 있다니, 그것이 부러웠다.  

   안타깝게도 육아는 '타고나는 기질'인지라, 어머님 가시고 3일이 지난 지금 내가 보고 배운 것은 거의 무효하게 되었다. 우는 아이에게 짜증내고 샤우팅을 몇 차례나 한지 모르겠다. 아이는 혼자 놀고 나는 폰을, 주로 브런치를 보았다. 아이와 함께 놀아주지 못할 만큼 나에게는 할 일이 많았다. 어머님께 죄송하지만, 그 묵언의 가르침들이 흡수되지 못했다. 이 사실 앞에서 가장 씁쓸한 사람은 '나'이다. 어머님께서 70년 인생을 탈탈 털어 건네주신 그 모든 것을 배우고 소화해내지 못하다니, 나는 또 얼마나 부족하고 무용한 사람인지 근래 3일 동안 철저히 깨닫고 있다.





   희생에 특화된 사람이 있다. 시어머니 같은 사람이다. '희생'이 현신(現身)했다면 아마 시어머니의 모습으로 나타날 것이다. 가족을 위해, 내 앞에 주어진 일을 위해 나를 기꺼이 희생하는 것에 천부적 재능을 타고 태어났다. 반면 나처럼 성글은 사람은 희생에 약하다. 희생에 거리를 두고, 밑바닥에서부터 은은한 거부감도 갖고 있다.

나는 나 자체로 살아내기도 바쁜 사람이다. 찬란한 게으름, 변명 같지만 이렇게 이름 붙이고 싶다. 나를 위해 살기 적합하게 태어나 온전히 나로 살기 위한 순간들을 행복해하는, 티 나지 않는 게으름. 티 나지 않을 수밖에, 나는 나를 위해서는 열심히 살아내니까. 그래서 '희생'과 같은 고귀한 단어와 결이 맞지 않다.



   1년간 어머님의 희생 덕에 나는 잘 지내고 건강해졌으며 브런치를 만나 글을 쓰고 오늘 구독자 100을 돌파했다!(글을 다 쓰고 보니 어제가 되었다) 어머님의 타고난 희생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나 혼자였더라면, 어울리지도 않는 '희생'의 갑옷을 입고 매일 철커덩거리며 집이라는 일터를 배회하며 육아에 잠식당하다 어느 순간 갑옷만 남기고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아, 정확히,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것 이상 정확한 표현을 생각해 낼 수 없다.(메마른 표현력..영화 '아가씨' 관계자들 보신다면 죄송합니다) 어머니가 계셔서 나만의 자유는 사라졌다. '한가한 것들이 책이나 읽고 글이나 쓰지', '엄마는 아이에게 최선을 다해야지, 쓸데없이 공부한다고 설쳐서 아이들이 아프고 그러는 거야' 같은 말들에, 나의 글들은 모두가 잠든 시간 안방 화장실에서만 가까스로 연명할 수 있었다. 그런 구원자가 갔고, 내 인생은 갑자기 독박 육아 앞에 휑덩그레 내던져졌다. 내 인생이 어째 더 망해가는 기분이다. 시어머님이 건네 주신 70년 인생을 하릴없이 복기만 하면서, 나는 내일도 또 일상에 파묻힐 것이다. 언제나처럼 글감은 쌓이고 쌓이고 쌓이기만 할 것이다. 마음 귀퉁이에서 곰팡이가 피는 어느 날, 오늘처럼 곰팡내 나는 글을 배설해낼지도 모른다.





   누구 하나 잘못하지 않았는데, 자꾸만 삶이 잘못되어 가는 기분 앞에서 어찌해야 할지 도저히 모르겠다. 나의 일상이, 나의 아이들이, 환기되지 못한 채 건조되기만 하다 어느새 증발되어버릴지도 모르는 나의 글들이 안쓰럽고 또 안쓰러울 뿐이다. 답도 없이 애처로운 마음을 부여잡고 안방 문 너머 캄캄한 밤과 잠의 어느 즈음으로 들어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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