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 미안해요. 남편이 2주 훈련이라 친정집에 와 있거든요. 다다음주에 돌아가요."
갑자기 자유부인이 된 이유로, 그동안 못 본 아파트 친구들을 만나고 싶었다. 그간 못 나눈 이야기나 하고 싶어서 연락을 했더니, 친정집에 가 있단다. 어쩔 수 없지, 다음에 보는 수밖에, 하고는 다른 친구를 찾는 손놀림이 느려진다. 친정, 친정집. 나도 친정집 있어. 없는 거나 마찬가지긴 하지만.
친정집을 못 간지 4년 반이 되었다. 2016년 여름 즈음 가고 그 이후는 이러저러한 이유로 못 가고 있다. 물론 가장 큰 이유는 임신, 출산과 거리이다. 군인 가족이라 이사를 자주 다니는데, 자꾸만 친정과 멀어지고 있다. 그 사이는 나는 쉼 없이 아이를 가지고 낳아 기르느라 움직이기 힘든 상태가 되었다. 그러나 이 것들은 사소한 이유이다. 역시나 가장 큰 이유는, '친정집'이다.
결혼하던 해, 반지하 같은 1층 집에서 나와야 했다. 맞은편 옥탑에 가건물 집이 있었다. 밖에서 보면 사람 사는 집 같지 않았지만, 그전에 살던 집보다 평수는 컸다. 월세도 적었기에 '1년만 버티고 다른 곳으로 이사하자'는 네 식구의 의지를 모아 이사했다. 그때만 해도 8년 가까이 살게 될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이사하고 두 달 후에 결혼이었다. 결혼 전 남편에게는 집을 보여 주기 싫어, 일부러 먼 곳에서 차를 세워달라고 했다. 집 앞이니 얼른 먼저 출발하라고 하고, 남편이 떠나는 걸 보고 나서야 터덜터덜 걸어 집으로 갔다. 신혼여행 다녀와 처음 친정집에 와 본 남편에게, 집 때문에 놀랐냐고 물었다. 남편은 대답을 꺼내기까지 시간이 좀 걸렸다. 어떻게 말해야 아내가 기분 상하지 않을까 꽤 고민했다.
"사실 좀 놀라긴 했는데, 군부대 병사들 중에 그런 집에 사는 친구들 많이 봤어요."
그런 집. 많이 고민해서 대답해 준 건 고마웠지만, 귀에 거슬리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런 집. 그렇지, 그런 집이지.
그래도 광명에 살던 시절, 첫째가 돌 갓 지나던 그 시절에는 가까워서 나름 자주 갔었다. 어쨌든 친정이고 나의 부모님이 계신 곳이다. 오래 살지는 않을 집이니, 아이가 기억을 못 하는 때이니 들락날락했다. 이사를 다니기 시작한 후부터는, 나 역시 둘째를 임신한 상태여서 장거리 운전이 힘들어져 자연스레 가지 못하게 됐다. 무엇보다, 가기가 꺼려졌다. 옥탑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가파르다. 딱히 고소공포증이 없는 나도 난간을 잡지 않으면 긴장되는 계단이다. 물론 난간은 녹슬었다. 집으로 들어서면, 여름은 덥고 겨울은 추웠다. 바람은 어느 방에서나 들어왔다. 화장실은 바깥 온도와 같게 느껴졌다. 오래된 가건물이라 여기저기 벌레도 보였다. 나 혼자야 어쨌든 친정이니 가겠지만, 나는 아이를 데리고 다녀야 한다. 첫째는 잘도 커서 말도 잘하고 예전 일도 기억할 줄 아는 나이가 되었다. 첫째에게 파마 할머니(5살일 때 친정엄마가 파마를 해 준 이후 친정엄마는 파마 할머니가 되었다) 집을 보여줄 순 없었다. '파마 할머니는 집이 왜 이래?'라고 말할 것이 뻔하다. 듣지 않아도 될 소리를 굳이 듣고 싶지 않았다.
내가 가지 못하니 친정엄마가 우리 집으로 와준다. 아이들을 봐줘야 할 때나 내가 육아에 버거워할 때 도움을 청하면 와준다. 운전을 못하는 친정엄마는 지하철을 두 번 갈아타고 버스를 한 시간을 타고 10분을 걸어서 와준다. 다리가 아픈 엄마가 분명 한 짐 들고 오실 게 뻔해서 와달라고 하고 싶지 않지만, 그래도 도움이 필요할 땐 어쩔 수 없다. 또 엄마 밥이 먹고 싶기도 하다. 이번엔 잔치국수가, 다음번엔 강된장이, 엄마가 해주는 그것들이 그렇게도 먹고 싶은 것이다. 엄마가 와줄 때마다 '운전할 수 있는 내가 친정집으로 가는 게 더 나은데'라는 생각이 뭉게뭉게 커진다. 친정집. 친정집. 나는 친정집이 있지만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갈 수 없는 친정집. 마음의 거리가 너무나도 멀어 닿지 못하는 친정집.
동네에서 서울로 가는 광역버스가 생기기 전에는, 엄마는 용인터미널에서 내렸다. 나는 30분 정도를 달려 엄마를 데리러 가거나 데려다주었다. 그럴 때마다 첫째는 '파마 할머니' 데리러 간다고 좋아라 함께 했다. 버스가 많은 곳에서 늘 파마 할머니가 차에 타서 집으로 같이 갔다. 그 이후, 첫째는 용인터미널을 지날 때마다 외친다.
"엄마, 여기 파마 할머니 집이잖아. 파마 할머니 집에 가자."
이번 주 새로 입주하는 아파트로 가신 시어머니 댁에 주말에 가기로 했다. 남편이 그곳에서 출퇴근을 하고 있다. 시어머니도 아이들을 보고 싶어 하시고, 무엇보다 아이 셋과 주말을 잘 보낼 자신이 없는 내가 내린 결론이다. 세 밤만 자면, 두 밤만 자면, 한 밤만 자면 할머니 집에 가서 할머니도 보고 아빠 본다는 사실에 첫째는 매일 행복해했다. 그러다가 오늘, 할머니 집에 가면 뭐도 하고 뭐도 한다며 한참이나 떠들던 딸이 갑자기 묻는다.
"그런데 엄마, 왜 파마 할머니 집에는 안 가? 나 파마 할머니 집에도 가고 싶어."
외할머니 집의 부재를, 도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아니다, 외할머니 집은 부재하지 않는다, 다만 나의 마음이 가닿지 않을 뿐. 한 시간 반만 달리면 언제든지 닿을 수 있는 나의 친정집은, 나에겐 아이들과는 갈 수 없는 곳이 되어버렸다. 아이들이 커갈수록 더더욱 가지 못하는 곳이 되고 있다. 나는 어느샌가 친정집이 없는 사람이 되었다.
사실, 나도 잘 알고 있다. 부모님에게 그 집이 지금으로선 최상의 집임을. 아빠의 일터와도 가깝고, 지하철역이 가까워 서울 여기저기 다녀야 하는 엄마에게도 좋다. 오래 살아서 주변의 편의시설을 이용하기도 좋고, 월세도 싸며 두 분이 지내시기에 불편함이 없으시다는 것을. 그래서 아들과 딸이 이사를 권해도 크게 필요성을 못 느끼심을 나도 잘 알고 있다. 그러니까 친정집이 없다는 것은, 순전히 나의 이기심인 거다. 어쩌면 욕심일 수도 있는 이기심. 어려서부터 부모가 없거나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신 분들이 보기에 나의 이런 이기심은, 가소롭고 배부른 소리로 느껴질 수도 있다. 친정부모님 두 분 건강 큰 문제없이 잘 지내시는 것만 해도 어디냐고 하면, 할 말이 없다.
그러나 늘 불행은, 내 주변과의 비교로부터 시작되는 것 아니던가. 나의 친구들은 다들 친정과 가까운 곳에 산다. 가깝다의 개념이, 아파트 옆 동 옆옆동 수준이다. 한 친구는, 육아휴직이 끝나간다는 이유로 부모님이 포항에서 용인으로 이사를 하셨다. 다른 한 친구는 친정엄마와 너무 가까이 있어 불편하다는, 친정엄마 때문에 스트레스받는다는 불만을 내게 털어놓는다. 어쩜 하나같이 그런 친구들만 있는지. 아파트에도 똑같다. 군인아파트라 장기 훈련이 있을 때나 어린이집 방학 기간에, 친구들은 하나같이 친정집으로 간다. 나만 아파트에 남겨진 기분이 든다. 꾸역꾸역 아이들과의 시간을 견뎌낸다. 그래, 난 친정집이 없어. 원래부터 없는 걸 자꾸 욕심내면 나만 힘들어져. 자꾸만 자기 합리화해봐도, 그럴수록 옥탑방은 더 선명해진다. 가고 싶지만, 갈 수 없는 곳.
이렇게나 확실히 있는 집을 못 가는 건, 도대체 뭐 때문일까. 아이들에게 외갓집에 대한 안 좋은 추억을 남기고 싶지 않음, 계단의 위험함, 벌레들이 출현에 아이들을 대피시켜야 하는 분주함, 아무리 이런저런 핑계를 대봐도 결국은 부끄러운 게다. 그냥 자꾸만 비교가 되는 거다. 나는 왜 남들 다 있는 제대로 된 친정집이 없는 거지. 왜 친정집에 가서 엄마 밥 맛있게 한 그릇 먹고 아이들 맡기고 낮잠 한 판 달게 자고, 나는 왜 그럴 수 없는 거지. 나도 친구들처럼 '이번 주말 친정집 가야 돼'라고 말하고 싶은데. 나도 '오랜만에 친정 오니까 너무 좋다' 이런 말 잘할 수 있는데.
거리상으로는 친정과 비슷한, 새로 이사한 시어머님 댁에 내일 가본다. 남편이 나와 아이들 준다고 이것저것 사놓았단다. 친정에서 받을 환대까지 다 받을 예정이다. 그래, 그거면 됐다. 어느 한쪽이라도 환대받을 수 있으면 되었다. 이렇게 나를 다독여 본다. 애써 다독이다 보면, 친정집에 대한 괜한 원망이 사그라드는 것이다.
거의 1년을 보지 못한 친정엄마가, 12월부턴 와준다는 친정엄마가 허리를 다쳐서 움직이질 못하신다. 수술을 받아야 하고 회복을 해야 한다. 또 언제 엄마를 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냥, 그냥 엄마가 보고 싶어서 괜히 집을 탓해 본다. 못난 마음으로, 그래도 그리운 그 못난 집을 탓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