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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샤 Dec 14. 2020

셋째를 임신하고도 바라는 것이 없는 이들의 심리

내가 속물인 건가

   한 명은 7개월째, 한 명은 6주였다. 그 날 우리 집에 놀러 온 아이 엄마 둘 모두 셋째를 임신한 상태였다. 나를 포함해 첫째, 둘째, 셋째가 모두 2살 터울이었다. 세 아이 육아의 고됨을 이미 알고, 충분히 예감하는 이들이었기에 대화의 99%는 육아로 이루어졌다. 그래도 그들은 90년대 생이었다. 어차피 할 육아, 빨리 아이들 낳아 기르고 30대엔 자기 인생 살면 될 일이었다. 그들이 내 나이가 되면 첫 아이가 중 2이다. 나는 지금 6살, 4살, 2살 뒷바라지하느라 나를 돌보긴커녕 하루하루 겨우 버티고 있는데, 몸이 여기저기 안 좋아도 수리할 시간도 없는데. 이쯤 되면 또다시 그들에 대한 치기 어린 시기로 마음이 부글부글하지만, 나는 나이 많고 다 들어주는 좋은 언니이니 절대 티 내서는 안 된다. 늘 웃는 얼굴로 그들을 맞이해 주고 투정을 들어줘야 한다. 


"그래서, 셋째 가졌는데 뭐 안 받았어?"


친구 1: "뭐 받아야 돼요?

친구 2: "그르게.. 뭐... 가 필요한가?? 뭐 필요하지?? 아참, 언니는 건조기랑 김치냉장고 받으셨죠?"

친구 1: "아, 맞아. 언니 셋째 임신해서 형부가 사주셨다고~ 글쎄요... (한참 생각하다) 전 뭐 필요한 게 없어요. 굳이 받고 싶은 것도 없고요."

친구 2: "저도요. 지금이 너무 만족스러우니... 남편이 다해주니 필요한 게 없어요. 아기나 잘 커서 잘 태어났으면 좋겠어요."

본인: "................ 그렇구나................."






   2019년 1월 1일, 두 줄로 새해 첫 날을 맞이했다. 말도 안 돼, 말도 안 돼, 말도 안 돼, 제발, 내 눈이 잘못된 거야, 이건 아니야. 두 줄 확인하고 처음으로 든 생각이었다. 첫째와 둘째를 어렵게 가져서, 아이는 어렵게 오는 거거로만 알았다. 이렇게 금방, 쉽게 오는 게 아니었다. 그러나 너무나도 확실한 두 줄이었다. 15개월 둘째는 아직 걷지도 못했지만 어쨌든 오는 3월이면 어린이집에 보낼 거였다. 어린이집에 보내면 나는 운동도 하고 책도 보고 외국어도 공부하고 도서관 프로그램도 참석해야 했다. 하고 싶은 게 너무나도 많았는데, 두 줄이라니. 

   화장실에서 나와 남편을 보는데, 눈에서 왈칵 쏟아졌다. 나를 본 남편이 화장실을 갔다 오더니 내 뒤에 서 있다. 굳이 돌아보고 싶지도 않았다. 그는 약간의 기쁨을 감추며 나를 어찌 달래야 할지 몰라 당황한 표정으로 서 있었겠지만, 그랬기에 더욱 그의 표정을 보고 싶지 않았다. 남자에게(특히 나의 세대주에게) 임신은 그냥 '힘들지만 여자로서 해야 할 일'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늘 일찍 셋째를 갖고 싶어 했다. 아들 셋 낳아 육군, 해군, 공군 보내는 것이 꿈인 그였기에, 막내만큼은 아들을 바랐다. 나이도 늦어서 가능한 한 일찍 셋째를 보고 싶어 했다. 그와는 달리, 나는 사실상 둘째까지 만이었고 셋째를 굳이 가져야 한다면 '늦둥이'였다. 두 아이 육아에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좀 쉬고 싶었다. 아이들은 어린이집에 맡기고 휴식으로 가득 채운 일상을 보내고 싶었다. 그런데, 셋째라니! 하아............ 세상은 도대체가 내 맘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다는 걸 또다시 체험했다. 왜 하필 새해 첫날 아침! 

   남편은 우는 나를 그저 두었다. 세 시간이 지나자 나를 이렇게 저렇게 달래기 시작했다. 다섯 시간이 지나자 조금은 짜증을 낸다. 그만 좀 울어요. 마음만 같아선 2박 4일도 울 수 있지만(그렇다, 하루는 밤을 새워서도 울 수 있었다!), 일단은 진정하기 위해 노력했다. 쉽게 진정할 수 없었지만, 새해 첫날부터 너무 많이 우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울음이 가시고, 진정이 되었다. 다시 눈물이 터졌다. 돌이 두 달 지나도록 걷지도 못하는 아이와 엄마 껌딱지인 첫째가 엄마 옆에서 같이 울었다. 

   남편은 어디라도 나가자고 했다. 가고 싶었던 카페를 말했다. 나도 참, 그 와중에 가고 싶은 카페 생각이 났다. 아이들을 옷 입히고 나갈 준비를 하며 눈물이 멈췄다. 가는 차 안에서 내내 울적했지만, 그래도 울지는 않았다. 울고 싶었지만 하루 종일 울기엔, 가고 싶었던 카페를 가는 길이었기에 아주 조금 설레기도 했다. 

   카페는 예상보다 훨씬 좋았고 예뻤다. 플랜테리어가 잘 되어 있었다. 한 겨울에 실내에서 초록을 보니 마음의 어둠도 조금은 푸르러졌다. 아파트 아는 동생을 만났다.

   "언니 눈이 왜 그래요?"

   셋째를 임신했어,라고 차마 말할 수 없었다. 그냥 웃고 말았다. 

   복합 공간이어서 쇼룸이라던가 체험 공간도 같이 있었다. 편안한 공간을 둘러보고 사진도 찍으며 의식적으로 나의 몸 상태를 잊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남편이 물었다.

   "좀 괜찮아졌어요?"  

   그저 끄덕였다. 사실 괜찮아지지 않았다. 쉬지 않고 육아를 하느라 바닥치고 지하로 뚫고 들어간 자존감이 뭉개지는 하루였다. 어떻게도 회복이 되지 않았다. 





   임신을 하고 아이를 낳아보니 그랬다. 남자 역시 말로 표현 못할 책임감과 갑작스러운 변화에 당황스럽고 힘들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은 그뿐이었다. 그러나 여자들의 삶은 출산 이후, 출산 이전으로는 절대 돌아갈 수 없는 삶을 살게 된다. 육아의 고됨과 지난함에 대해 굳이 구구절절 쓰고 싶지는 않다. 육아를 경험해 본 자라면 더 설명하지 않아도 알 것이고, 육아를 경험하지 못해 본 자라면 아무리 설명해도 진정성 있게 체득하며 이해할 수 없다. 나의 경우, 아이를 어찌 다뤄야 할지 모르는 세대주 때문에 사실상 육아의 모든 부분은 온전히 나의 몫이었다. 울면 달래고 씻기고 입히고 먹이고 재우는 모든 과정은 이 몸에게만 주어졌다. 남편은, 그 옆에서 어찌할지 몰라했다. 가끔 기저귀를 갈고 아이가 울면 더 크게 소리를 질렀다. 초보 아빠의 서투름으로 인한 모든 불편을 감수해야 했던 건, 역시나 초보 엄마였던 나였다. 내 안에서 산후우울이 자꾸만 쌓인 채 그냥 방치만 했다. 계속 아이를 달래고 씻기고 입히고 먹이고 재우고,를 반복했다. 그리고 집안일도 했다. 육아와 가사는 병행할 수 없어,를 매일 속으로만 되뇌며 육아와 가사를 병행했다. 마음이 자꾸 문드러지는데, 그걸 알아채지도 못하며 육아에 파묻히고 있었다.   


   가장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건, '육아'의 대상이 모두 아빠의 성을 따른 이름을 지닌 아이들이었다는 것이다. 아빠와 엄마 둘의 결실로 태어나고 받아들인 아이인데, 전통을 따른 '제도' 때문에 아이들의 이름에서 나는 철저히 배제되었다. 물론 나 역시 그렇게 컸다. 우리 네 식구 가운데 엄마만 이름의 첫 글자가 달랐다. 우리는 한 식구인데, 왜 엄마만 따돌림받는 것 같이 성이 달라. 그게 싫었다. 엄마도 김 씨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그러면 완전체 가족이 될 것 같았다. 그러나 자라고 보니 그건 그저 '제도'일 뿐이었다. 아니, 제도의 허울을 쓰고 부계 중심사회를 유지하려는 전통과 사회적 관습이 한데 뭉뚱 그러져 우리의 인식을 지배하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죽을 고생하고 낳아 나의 피땀 눈물로 키우는 아이들이 '아빠의 성'만을 이어받는다는 현실에 매일 지쳐갔다. 어디 말도 할 수 없고, 어디 말해서도 안 되는 내 안의 부침이었다. 아빠의 피땀 눈물이 녹아내린 사회생활과 가장의 무게로도 아이들은 먹고 자란다. 모르는 바가 아니다. 그러나 그만큼, 최소 가정 내에서는 그것보다 더 엄마의 노고로 자라는 아이들이지만, 그들의 존재 자체를 존재로서 증명하게 해주는 이름에서 철저하게 나는 배제된다. 나의 이름 역시 엄마는 배제한 체 아빠만 드러내고 있다. 

   결혼과 동시에 성도 남편을 따라야 하는 미국이나 일본에 비하면 행복한 건가. 꼭 그렇게 굳이 비교까지 해서 행복해져야 하는 건가. 나는 왜, 어쩌면 당연할 수도 있는 이런 것을 가지고 유난스럽게 불행을 자처하는 걸까. 우울이 유난히 나를 덮치던 날, 문득 깨달았다. 이런 것까지 들먹이며 내가 내 불행의 생채기를 내는 이유는, 나의 처절한 육아를 표출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의 노고로 크는 아이인데, 이름에서라도 내가 드러나길 바랐다. 이 아이의 성장의 지분에 나도 있어요,라고 내보이고 싶었다. 아무리 해도 다른 데서는 티 낼 수 없으니, 이름에서라도 '나의 존재'가 나타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의 노고를, 고생을, 고통을 누군가 알아주길 바랐다. 그러나 이름에서 나타나는 결실은 '남편'의 것만 드러난 채, 나의 육아는 내 안에서만 사그라들다 마음에 그을음을 남겼다.    



    그렇게 셋째까지 임신했다. 여전히 육아와 가사는 병행할 수 없는 나였다. 

   "건조기랑 김치냉장고가 필요해요. 애 셋 키우려면 있어야 할 것 같아요."

   조금의 침묵이 흐른 뒤, 남편이 대답했다.

   "그럽시다."

   그 주말, 우리는 가전 판매점으로 가서 최신형 건조기와 스탠드형 김치냉장고를 계약했다. 남편은 거리낌이 없었다. 어차피 애셋 육아를 오롯이 책임져야 한다면, 가사노동이라도 줄여야 했다. 김치냉장고는 김치를 좋아하는 남편을 위한 것이었다. 건조기와 김치냉장고를 산다고 가사노동이 획기적으로 변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셋째 임신에 대한 보상은 받은 것 같았다.


   셋째를 임신하고도 아무것도 바라는 것이 없다니. 그런 이들이 내 눈앞에 있었다. 도대체 남편들의 육아 태도가 어떻기에 저런 마음일 수 있는 걸까. 그들은 늘 말하곤 했다. 


   남편이 오면 다 해 줘요. 나는 그냥 누워 있어요. 남편만 기다려요. 남편 없으면 너무 힘들어요.


   남편 있으면 밥도 더 제대로 차려야 하고 설거지도 더 많아진다. 늘 기운 없이 앉아있는 내 모습을 못마땅해하는 남편과 자꾸 싸우기만 해서, 남편 있으면 더 힘든 내게 그들의 생활은 상상이 힘들다. 그러다 보니 셋째를 임신해도 아무것도 원하는 것이 없는 그들의 심리를 나는 이해하기 힘들다. 그들 역시, 남편이 있으면 더 힘들다는 나의 말을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이해할 필요는 없지만, 나도 그들의 심리가 이해되는 상태였으면 좋겠다. 얼마나 많은 육아와 가사를 옆에서 도와주면 셋째 임신에도 필요한 게 없다고 하는 걸까. 나는 지금도 식기세척기랑 무선청소기(로봇청소기와 핸디 청소기뿐이다)가 필요한데. 이쯤 되면 그냥 내가 속물인 건가 싶어 지는 거다. 내가 바라는 게 많고 물욕이 많은 건가 싶어 지면, 또다시 자존감이 낮아지고 그에 비례해 우울감은 높아지게 된다.





   비록 아이들의 이름에서 나는 배제되었지만, 아이들의 생김새는 남편이 배제된 듯하게 크고 있다. 아이들의 말투와 성향도 점점 나를 닮아가 나와 좀 더 통하는 기분이다. 이렇게 보상받는 것 같다. 무엇보다, 남편은 셋째 돌 이후 나에게 '노트북'을 사주었다. 물론 내가 요청한 것이지만, 이 역시 거리낌 없이 사주었다. 이거면 되었다. 


   나는 감당할 수 없는 가사와 육아에 파묻힐 때면, 그저 나를 되찾고 싶을 때면 노트북을 켠다. 그러면 모든 것이, 모든 면에서 괜찮아진다. 엄마와 아내가 아닌, '진짜 나'로 노트북 앞에 존재하게 된다. 노트북을 두드리는 나는, 엄마와 아내로 주저앉았던 나를 보듬어 준다. 여전히 서툰 엄마와 아내로서의 내가 치유되는 시간이다.

   수면 부족 하나 아쉬운데, 그것마저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마음이 된다. 이거면 되었다 싶다. 이제 조금, 셋째를 임신하고도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은 그들이 어떤 마음인지 알 듯도 하다. 나는, 노트북과 글을 쓰는 시간이면 그 외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게 되었으니까.    




   

   참, 이제 셋째가 없는 삶은 상상이 안 되고 상상도 하기 싫고 상상할 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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