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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샤 Mar 17. 2021

시대와 바람이 시를 드러나게 할 테니까

변명







  더운 공기 훅훅 걷어내면서 시가 와르르 쏟아지던 때가 있었어요. 오랜 동면에서 깨어난 시 쓰는 이를 눈치채고 시들은 정말, 폭우처럼 쏟아졌어요. 파박파박파바바박 소리까지 난 것 같아요. 그 모든 시를 단 하나도 받아내지 못했어요. 대부분 아이를 재울 때였어서, 그저 애처롭게 한가한 시 쓰는 이만 나무라며 아이를 재웠어요.


  그러다 문득, 내가 사랑했던 시들이 떠올랐어요. 대부분은 고등과정 교과서에 실린 시들이에요. 국어 시간은 싫었지만, 시를 하는 날은 좋았어요. 화자의 의도, 화자의 역사적 상황, 비유와 은유, 다음 중 맞지 않는 것은? 이런 단어들과 질문은 별로였지만, 그런 질문을 위해 검거되어 고개 숙인 용의자처럼 지문에 드러누운 시들은 하나같이 좋았어요.



  가장 좋아한 시는, 역시나 윤동주예요. 그 청년을 떠올리면, 부끄러움이나 수치심 같은 여린 어휘들이 따라다녀요. 그 상황에 그저 시 밖에 쓰지 못했던 그 마음, 그 와중에 참 쉽게 쓰여서 퍽이나 난감했던 젊은 시인의 뒷모습을 떠올려요. 그래서 '쉽게 쓰여진 시'와 그런 이를 유난히 못마땅해해서 쓴 시 '자화상'을 유독 좋아했어요. 수학 시간에 졸리면(대부분은 엎드려 잤지만) '쉽게 쓰여진 시'나 '자화상'을 교과서 한쪽 구석에 끄적였어요. 그러면 애처로운 마음이 올라와 잠을 몰아내곤 했어요. 물론 수학에는 더욱 집중할 수 없게 되었구요.


  김소월에 있어서는 안 슬픈 척 참는 척하는 '진달래꽃'보다, 차라리 절규하듯 울부짖는 '초혼'이 더 끌렸어요. 사랑은 해 본 적 없었지만 그래, 이별은 이렇게 하는 거지, 이렇게 아파하려고 이별하는 거지, 라며 중얼거렸어요,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주제.

  조지훈의 승무는 어떤가요, '세사에 시달려도 번뇌는 별빛이라' 이런 구절 앞에선, 별빛으로 빛나는 번뇌라면 좀 훔쳐와 보고 싶다, 그 번뇌를 안고 스님의 합장한 손을 잡아주고 싶다, 라는 외람된 생각도 해 보았어요.

  성북동 비둘기를 쓴 김광섭 시인의 동네에서 같이 비둘기를 말없이 보고 싶었어요. 그리고 그 옆에서 시인도 보고 싶었구요, '사랑과 평화의 사상까지 낳지 못하는 쫓기는 새'라는 구절을 쓰는 순간의 표정도 보고 싶었어요.

  기형도. 빈 집의 기형도, 와 나의 동생. 하나뿐인 동생의, 청춘의 방황의 증거는 기형도와 김광석과 소주와 기타였어요. 술을 먹고 온 날은, 기타를 잡고 김광석을 부르다 라면을 먹었어요. 누나가 '시끄러워'라고 하면, 기타를 내려놓고 기형도를 읽었어요. 기형도는 시끄럽지 않았으나, 서러웠어요.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하면, 김광석이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다고 옆에서 조곤히 말해줄 것 같았어요. 기형도와 김광석의 콜라보는 꽤 괜찮았어요. '가엾은 내 사랑 빈 집에 갇혔네' 하면서 시를 끝내고는 소주를 마시고 라면 국물을 먹었어요. 누나는 돌아 누웠어요. 지금은 동생은, 기타 대신 아들을 안는 김 과장이 되어 김광석과 기형도를 따돌리고 있어요.



  내 마음 심연에 침몰해 있던 시의 조각들이 하나씩 떠오르더니, 갑자기 행과 열을 맞추어 자리잡기 시작했어요. 하아, 이번에도 역시나 쉽게 시가 쓰였어요. 다시 윤동주예요. 그래서, 마음을 바꿨어요. 쉽게 시가 쓰이는 것에 대해 변명을 하자고. 윤동주에게 여지를 주자고, 그리고 나도 놓친 시들에 미련을 놓자고.

  그러자 우물가의 사나이가 비로소 얼굴을 돌려 정면을 보였어요. 눈물이 흐른 자욱이 있었으나 희미하게 웃고 있었어요. 그래, 그러면 되었다. 100여 년의 시대를 관통한 나의 변명이, 그대를 미소 짓게 할 수 있었다면 그보다 더 좋을 것이 무엇 있더냐. 그대의 시대와 그대의 바람이 차마 담아낼 수 없는 시가 있었다면, 유물처럼 이 시대와 이 바람에 드러나게 해 줄 테니까. 내가 그 시를 비출 거울을 쥐고 있을 테니까, 이제는 너무 원망 말라고 전했어요. 이 마음마저 부끄럽고 수치스럽지만, 시가 원래 그런 것이에요. 부끄러운 마음에서 태어나는 거예요. 그래서 구차하지만, 변명을 해 보았어요.


  이제,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일만 남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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