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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샤 Apr 06. 2021

태양은 숙명처럼 달을 길어 올릴 것이고

검은 시의 탄생


  불면과 함께한지는 오래되었어요. 대만행 비행기에서 내린 그날 밤부터, 불면은 나의 타이틀이 되었어요. 타이베이의 습기와 여름의 온도는 적응할만한 것이 못 되었어요. 한 달을 꼬박 밤잠을 자지 못하고 응급실을 다녀온 이후로는, 불면이 내 밤의 주인이 된 것을 인정하기로 했어요. 물론 실연의 아픔이 첫 번째 이유였지만, 그것만큼은 꺼내고 싶지 않은 과거라서 무조건 대만의 여름 때문이라고 우길 작정이에요. 



  양을 387마리까지 세어보고 단전호흡을 100회 해 봐도 불면은 더욱 선명해져요. 불면을 마주 하고 난감해 하고 있는데, 갑자기 어둠 속에서 어휘들이 둥둥 떠올라요. 시어(詩語)예요. 아무리 거부해도, 결국엔 시를 위한 시가 만들어져요. 제가 가장 증오하는 문구들이에요. 시를 위한 시, 시에 대한 시, 글을 위한 글, 글에 대한 글, 책을 위한 책, 책에 대한 책. 아무 의미 없는 단어들의 나열이에요. 시와 글과 책은 자신만의 의미를 지녀야 해요. 그래야 시로서 글로서 책으로서 독자에게 유익해요. 

  맞아요, 저는 유익함을 쫓는 사람이에요. 텍스트와 활자의 행간에서 무언가를 얻어내야 하고 배워야 하고 뽑아내야 하고 찾아내야 해요. 그런 제가, 어리석게도 시에 대한 시를 쓰고야 말았어요. 이불 위에 소복이 쌓인 시어들을 조각 퍼즐 맞추듯 끼워 맞추다가 또 밤이 새고야 말았어요. 나의 밤은 어둠과 시에 점령당했어요. 불면의 이유가 자꾸만 늘어나요. 눈이 왜 이리 빨개, 어제 왜 못 잤니. 아, 원래 불면이 있어. 대만 교환학생 갔는데 너무 더워서. 그때 만나던 사람한테 거지처럼 차였어. 시가 자꾸만 떠올랐어. 이 무슨 소설 같은 전개인가요. 팔리지 않는 무명작가의 소설. 

  그러나 저는 결국 인정하기로 했어요. 인정할 수밖에 없었어요, 시에 대한 시를 쓰고야 말았음을요. 사실 많은 이들이 글에 대한 글을 좋아하고, 책에 대한 책을 즐겨 읽는다는 사실을요. 저 혼자 외면해온 모든 사실이 '대중'에게는 늘 환영받았다는 진리를요. 그래서 부끄러운 시를 꺼내고야 말았어요, 불면을 핑계로 써내려간 시가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지 궁금해졌기 때문이에요. 



 




  밤은 늘 제 시의 강력한 모티브예요. 밤에 들리는 모든 소리, 농도가 짙어졌다가 옅어지는 어둠의 파노라마, 온갖 망상이 믹스되다가 강력한 하나의 추억 때문에 와스스 분해되어버리는 순간. 그 모든 것이 시의 거름이 돼요. 시는 훌륭한 거름 덕분에 형태를 갖추어요. 

  형태는 갖추었으나 무의미한 시, 이를 어쩌지 하다가 이내 괜찮아졌어요. 밤은 끊임없이 시를 토해낼 것이고 저는 밤과 불면 사이에서 방황하다 결국 그 시를 건져낼 거니까요. 시에 대한 시 역시,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사랑해 줄 것이라 어리석게 기대하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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