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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샤 Apr 06. 2021

희고 검은 돌멩이 가득한

기원 앞마당



  학교를 들어가기 전이었어요. 나이는 기억이 나지 않아요. 아빠는 늘 내 손을 잡고 가까운 기원(棋院)으로 갔어요. 그곳엔 바둑판과 바둑알과 말 없는 아저씨와 앞마당이 있었어요. 아빠와 말없는 아저씨는 바둑을 뒀어요. 아빠는 늘 검은 돌이었어요. 저는 그 옆에서 돌들을 쌓아보려 노력하다가, 새로운 바둑판을 옆에 두고 모양 만들기 놀이를 하다가, 바둑알 튕겨 더 멀리 나가게 하다가 이내 마당으로 뛰어나왔어요. 무얼 해도 심심했어요.


  마당에는 돌이 있었어요. 돌을 던져보고 모양을 만들고 쌓기를 했어요. 바둑알로 하는 것과는 다른 느낌이었지만, 지겹기는 마찬가지였어요. 혼자 마당을 열 바퀴 돌아보고 민들레 씨앗을 불어보고 개미들의 종착지 구멍찾기 놀이를 했어요. 무얼 해도 심심했어요.

  아빠의 무릎에 파고 들어가 까무룩 잠이 들었어요. 눈을 떠 보면 파란 하늘은 좀 더 파랗게 되어 있었어요. 구름이 흘러가는 모양을 자세히 보았어요. 구름은 단 한순간도 똑같은 모양이 아니었어요. 그건 좀 재미있었어요. 다시 검은 돌 흰돌로 된장찌개를 만들고 모양을 만들었어요. 얼굴 모양을 만들어 아빠를 보여 주면 아빠는 흘끗 보고 '어, 그래' 하고는 다시 검은 돌을 쥐었어요. 아빠의 을 타고 올랐다가 아빠의 흰머리를 잡아당겼다가 아빠 양말을 잡아당겼다가, 끝내 울음을 터뜨렸어요. 아빠아, 집에 가자. 늘 마무리는 어린 딸의 울음이었어요. 아빠는 말없는 아저씨에게 '내일 올게' 하고 일어섰지만, 나는 '내일 싫어' 하며 더 크게 울었어요. 신발을 신을 때는 이미 어둑어둑해진 후여서 어린 나는 더 속이 상했어요. 이렇게 재미없는 하루는 너무 싫어. 집에서 저녁을 먹으며 억울함을 엄마에게 토로해요. 억울함을 키우며 잠이 들고는, 해가 뜨면 여지없이 아빠의 손을 잡고 기원으로 향해요. 또다시 시작되는 쌓기와 만들기와 던지기.

  그 시간들이 30년동안 나의 무의식 속에 묻혀 있었어요. 기원 앞마당에서 시절을 보낸 나의 나이와 내 아이들의 나이가 같아지자, 그 풍경들은 돌멩이 하나 변하지 않고 의식 위로 떠올랐어요. 그리고 그 풍경은, 시가 되었어요.







  아이의 마음으로 과거를 추억하니 동시가 되었어요. 제 시는 모두 어둡고 슬프고 무겁고 씁쓸해서, 저는 동시를 쓸 수 없는 사람이에요. 가슴을 열어 하늘을 보라, 같은 파랗고 예쁜 노랫말의 시는 쓸 수 없는데, 이 시는 동시로 쓰였어요. 동시도 주인의 그늘을 벗어나지는 못해서 안쓰럽고 불쌍하고 애달프네요. 어쩔 수 없어요. 저는 저의 시와 글로 저의 인생을 드러내야 해요. 동시와 시, 수필과 에세이라는 형식만 빌릴 뿐 그 모든 이야기는 저에게서 시작해요. 그러니까, 저도 몰랐다는 말이에요. 그 찬란한 지겨움이 30년의 시간을 숙성해서 시가 될 줄은요.


  '교육'이라는 제도가 아직 저를 더럽히기 전, 순수한 지겨움을 마음껏 누렸던 그 시절의 이야기를 펼쳐보았어요. 그리고 알게 되었어요. 제 생의 알맹이가 들어차는 껍데기의 다양성, 그 가능성의 확장을 말이에요. 이제부터 '동시는 쓸 수 없는 사람'이 아닌, '동시를 써 본 적이 있는 사람'으로 소개할 수 있게 되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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