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개월의 준비 기간
내 나이 스물하나이던 2010년 겨울, '돌아오는 새해엔 이스라엘에 가리라' 하는 모든 다짐과 계획을 끝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나의 계획이었을 뿐, 부모님의 허락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었기에 엄마 아빠를 설득하는 것이 당시엔 제일 큰 준비 과정 중 하나였다. 아무리 자유로운 환경 속에 키우셨다지만 20대 초반의 딸래미가 그것도 매일 같이 분쟁이 끊이지 않는 머나먼 나라로 가겠다는데... 어떤 부모가 순순히 허락을 할까.
아빠를 설득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어릴 적 부터 공부를 하든 나가 놀든 '인성만 올바르면 됐다.'는 어르신이라 아빠에게는 엄마의 허락 후 최후 통보만 하면 됐었다.
나는 어느 날 엄마에게 조심스럽게 해외 생활에 대한 얘기를 꺼내었다. 엄마는 내게 교환학생이나, 방학을 이용해 3개월 정도 단기 어학연수를 가고싶은거냐 물으셨다.
"아니, 그냥 더 큰 세상을 한번 보고 싶어 엄마..."
사뭇 진지해진 엄마에게 키부츠에 꼭 가야 하는 이유를 일일이 열거하였다. 외국 친구들을 사귈 수 있는 경험, 진짜로 부딪히는 해외 생활, 색다르고 특이한 외국, 발룬티어에게 제공하는 여러 좋은 조건 등 듣기에 좋은 얘기만 늘어놓았다. 엄마는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듣고 놀라시긴 했으나 바로 반대를 하시거나 안 된다고 하시진 않았다. 하지만 익히 악명높은 동네라는 것을 아시기에 덜컥 허락해 주시지도 않았다. 엄마는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하셨다.
그렇게 엄마가 고민하는 동안 나는 앞으로의 1년에 대한 계획을 세워보았다.
1. 자금
이스라엘에 가기 위해선 왕복 비행기 푯값과 혹시 모를 사태(키부츠 배정이 늦어질 수 있음), 키부츠 생활 이후 잠시 여행을 위한 비용이 필요했다. 내가 생각 했던 금액은 아래와 같이 총 510만 원이었다.
- 왕복 비행기 삯 170만 원
- 현지 생활비 130만 원
- 여행비 150 만원
- 의료보험비, KPC 등록비, 비자 변경비 약 60만 원 상당
2. 키부츠 수속 과정
이스라엘로 날아가기 위해선 먼저 키부츠 코리아 지부에 원서 접수를 한 후 영어 인터뷰를 진행해야 했다. 나는 3개월 정도의 시간을 두고 준비하기로 해서 4월까지 인터뷰에 나올만한 질문(지원 동기, 계획, 포부 등)과 답변을 작성해 달달 외우다시피 했다.
꼭 내야 할 필수 서류로는 영문 건강 진단서가 있었는데, 이 또한 병원에 방문해 문제없이 발급받을 수 있었다.
3. 마음의 준비
살면서 처음으로 나가보는 해외 & 장기 체류 & 나홀로 이 쓰리콤보는 설렘 가득한 맘 한 켠으로 조금의 걱정도 보태어 주었다. 이스라엘로 향하는 직항이 없으니 경유를 해야하는데...
다른 곳으로 가는 비행기를 잘못 타면 어쩌지?
내 짐을 못 받으면 어쩌지?
이스라엘 공항에서 입국 거부를 당하면 어쩌지?
현지 키부츠에서 배정이 늦어지면 어쩌지?
실제로 텔아비브 현지 키부츠의 배정이 늦어져 한 달을 기다리다 돌아온 사람들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하지만 어쩌랴... 이 모든 걸 걱정하기에는 정말 아무것도 몰라 닥쳐봐야 비로소 알 수 있다는 걸..
새해가 오기 전 어느 밤, 나는 엄마를 앉혀놓고 준비한 계획과 일정에 대해 열변을 토하며 설명하였다. 엄마 생각에도 내 계획이 그럴듯했는지 잠자코 들으셨지만, 또 그렇다 할 반응도 없으셨다. 그날부터 난 엄마 눈에 닿는 모든 곳에 내 계획안을 붙여 놓았다. 현관문 앞에, 냉장고 문 위에, 싱크대 찬장 위에, 엄마 화장대 거울 앞에 등... 엄마 차 운전석 등... 엄마의 손길이 닿는 모든 곳에.
어느 순간부터 엄마는 이런 내 열정이 우스우셨던 것 같다. 하지만 나라도 나라이거니와 어린 딸을 혼자 외국으로 보내는 것이 편치 않다고 하셨다.
그래서 난 거짓말을 하기로 했다.
얘기인즉슨, 학교에 아는 언니도 나의 계획에 혹해 함께 가기로 했다는 것이었다. 나보단 언니이기에 거짓말이 통할 것도 같았고, 언니는 여러 번 우리 집에 들러 엄마 앞에서 함께 갈 듯한 열연도 펼쳐주었다. 그런데 웬걸 그 계획은 진짜로 통해버렸다. 그 당시, 엄마는 정말로 나에 대한 믿음이 크셨 나보다.
엄마에게 허락받은 그날로 나는 휴학계를 제출했고 6개월간 평일 저녁에는 동네 시내의 보세 옷 가게에서, 주말에는 웨딩홀에서 예식 진행 아르바이트를 하였다. 막상 휴학계를 내고 보니 시간은 참 빠르게도 지나갔다. 2012년 3월쯤 나는 키부츠 코리아에 연락해 지원서를 접수했다. 연습했던 영어 인터뷰는 다행인지 전화 통화로 진행되었고, 예상했던 질문에 예상했던 답변을 했다. 이후 제출하라는 각종 서류를 내고 나는 정말로 이스라엘에 갈 수 있게 되었다.
내가 떠나던 날, 엄마는 이모 삼촌들과 함께 중국에 여행을 가 계셨다. 이 또한 나의 계획 중 하나였는데, 공항에 함께 가는 언니 없이 떠나는 딸을 보면 엄마의 억장(거짓말에 대한 분노...)이 무너질 거 같아서였다. 외가 어른들의 여행은 먼저 예약되어 있었고 나는 일부러 그날과 겹쳐 비행기표를 끊었다. 거짓말은 완벽해야 했다...
공항으로 향하는 동안 수화기 너머로 엄마의 울음을 들었다. 엄마의 목소리에 눈을 질끈 감았지만, 다행히 조인성 마냥 소리없이 통곡할 수 있었다. 역시나 헤어짐은 쉬운 법이 없다...
감사하게도 엄마 친구분께서 내 친구 둘을 대동해 공항까지 데려다주셨다. 막상 큰 짐을 이고 공항에 내리니 친구들과 헤어지는 것은 덤덤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런 척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아직도 난 그날 늦은 저녁 시간의 공항 느낌을 잊을 수가 없다. 고요하면서도 고요하지 않은, 들뜨면서도 가라앉는 그런 공항의 분위기.
출국 심사를 마친 후 게이트 앞에서 끝없이 오가는 비행기들을 감상하였고 게이트가 열린 후 설레는 마음으로 비행기에 탑승을 했다. 당시 내가 이용한 곳은 터키항공사였는데, 다행이도 내 옆자리가 모두 비어 세 개 좌석을 혼자 사용할 수 있었다. 기내식을 먹을 때나 졸지 않을 때는 깜깜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창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그곳에 내가 꿈꿨던 삶이 어렴풋이 보이는 것 같았다.(이때 생긴 버릇인지 나는 비행기를 타면 꼭 창가에 앉는다) 이스탄불에 내려 환승할 때는 당황도 잠시, 비행기표를 보여주며 "where should i go?"하고 물어보니 어렵지 않게 이스라엘행 비행기를 탈 수 있었다. 다시 이스탄불에서 텔아비브까지는 2시간을 더 비행했고, 2011년 7월 12일 낮, 나는 드디어 이스라엘 벤구리온 공항에 발을 디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