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콩은 완두콩이나 강낭콩과 달리 땅속에서 자란다. 감자와 고구마가 자라는 모습과 흡사하다. 땅콩은 열매를 맺는 방법이 특이하다. 일반적으로는 꽃의 씨방이 열매가 된다. 그러나 땅콩은 꽃이 시들면 씨방에서 뿌리 같은 게 내려와 땅으로 뻗어 내리기 시작한다. 땅속으로 완전히 들어가 열매를 맺기 시작한다.
난 땅콩을 키워본 적이 있다. 물론 간접적으로. 어린 시절 맞벌이하는 부모님을 대신해 돌봐주던 아주머니가 밭에 땅콩을 키웠다. 나의 주특기는 땅콩 밟아버리기였다. 아주머니는 '그거 땅콩이야. 얼른 발 떼고 물이나 줘라'라고 말하며 잡초와 땅콩을 차이를 가르쳐줬다. 하지만 난 잡초와 땅콩을 끝내 구분하지 못했다.
그 후 난 청춘이 됐다. 21세기의 이팔청춘은 대략 20대를 칭한다. 이땐 부단한 노력을 하지 않아도 청춘이다. 술을 밤새도록 마셔도 '역시 청춘이네'. 주말에 집에서 빈둥거리면 '아까운 청춘 썩히네'. 청춘이라는 이유로 용서되기도 핀잔을 듣기도 한다. 청춘을 지나 보낸 어른들은 청춘을 인생의 꽃이라 했다. 돈이 최고라던 어른들도 세상 물정을 모른다며 화내던 어른들도 돈 없고 아무것도 모르는 청춘을 부러워했다. 아마 뭐든 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한 동경일 테다.
나도 청춘답게 꿈을 좇고 있다. 나름 열정적으로 배우고 도전한다. 그러다 문득 내가 잡초에 물을 주고 땅콩을 밟고 있는 게 아닌가 의심이 든다. 엉뚱한 곳에 시간을 허비하고 있는 건가, 재능이 없는 분야에 열정을 쏟아붓고 있는 건가 하고 말이다. 정답은 아무도 모른다. 그저 불안감, 의무감, 책임감 사이를 오가며 물을 줄 뿐이다. 마냥 설렘과 즐거움의 청춘은 아니다. 아프니깐 청춘이라 하는 걸 보니 슬픔이 9할인가 보다.
하지만 이런 청춘이 영원하길 바라고 또 바란다. 난 어느 순간 청춘을 보내고 있다는 즐거움보다 지나가고 있다는 아쉬움에 집착하게 됐다. 또 하루 더 멀어져 간다. 머물러 있는 청춘인 줄 알았는데 말이다. 반복의 연속인 나날, 단조롭다 못해 지루한 일상, 상상할 미래가 줄어든 어른의 삶 딱히 탐나지 않는다. 청춘이 끝난 내 모습이 상상돼 두려워하는 걸 수도 있다.
땅콩의 다른 이름은 낙화생이다. 떨어질 낙, 꽃 화, 날 생. 꽃이 떨어져야 열매가 생긴다. 낙화생은 꽃다운 청춘의 끝을 걱정하는 나를 안심시키는 이름이다. 꽃이 지고 풀만 무성한 어른의 모습을 봤다. 어쩌면 그들은 땅콩처럼 땅속에 열매를 맺은 게 아닐까. 청춘의 결말은 결실인가 보다. 지금 내가 잡초가 아닌 땅콩에 물을 주고 있는 게 맞다면 막연한 수확을 기다려 본다.
땅콩, 맥주 그리고 청춘
땅콩 180g, 설탕 6T, 인스턴트커피 2T, 물 50mL
1. 팬에 인스턴트커피, 설탕, 물을 넣고 중간 불에 끓여준다.
2. 팬의 가장자리가 바글바글 끓어 오르면 2분 정도 약한 불에 끓인다.
3. 불을 끈 상태에서 땅콩을 넣고 하얀 결정이 생길 때까지 볶아준다.
4. 유선지를 깐 쟁반에 옮겨 식혀주면 완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