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던 스콧
‘고모안녕히주무셨어요’
‘고모잘잤어’
매일 아침, 알람을 맞춘 것처럼 조카에게서 성실한 메시지가 온다.
띄어쓰기가 하나도 되지 않은, 같은 뜻을 가진 두 문장을 굳이 짝을 지어 연달아 보낸다.
다른 답은 내어주어도 돌아오는 답변은 같다.
‘고모밥먹었어’
‘고모8시25분에학교가요’
되풀이되고 되풀이되는 대화.
주고받는 재미는 덜해도 손수 적어 보내는 정성에 늦더라도 답을 챙긴다.
조카는 10살. 초등학교 3학년이다.
몇 년간 꾸준히 언어치료를 받고 있음에도 여전히 언어 수준은 제 나이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 작년 검사 결과로 6세 언어 수준을 진단받았으나, 한 살 더 먹었다고 그 능력치가 함께 성장했다고는 장담할 수 없겠다.
어린 시절부터 조카는 말이 더뎠다. 집안의 첫 손녀. 양가 집안의 관심과 귀여움을 독차지하던 녀석은 꽤 말이 느렸다. 어르신들은 말이 늦게 터지는 아이가 있다며 괜찮다 했지만, 성미 급한 고모는 괜한 걱정이 앞섰다. 주 양육자도 아닌 본인이 나설 문제는 아니니 어느 날 살짝이 언어치료를 받아보는 건 어떠냐 권했지만, 오빠네는 기다림을 택했다.
유감스럽게도 조카의 언어 실력은 오랜 시간 제자리에 머물고 만다. 기본적인 대화도 어려웠고, 말을 건네도 답을 하지 않았다. TV에서 본 만화 주인공의 대사를 시도 때도 없이 읊조렸으며, 아무리 말려도 멈출 줄을 몰랐다. 그제야 심각성을 깨닫고 언어치료를 시작했다. 문장을 만들지 못하는 것도, 발음이 심하게 뭉그러지는 것도 자못 심각한 수준이었다.
3년이 넘도록 계속된 치료로, 이제야 겨우 대화가 통한다. 주제는 제한적이지만 혼잣말도 많이 줄었고 제법 글도 쓸 줄 안다. 이렇게 입이 트이나 보다 싶다가도 마음이 조급해지는 건 여전하다. 말이야 계속 쓰고 듣게 되니 자연히 늘지 않을까 한구석 믿음이 있다. 다만, 학교에서 이 아이가 어떤 생활을 할지 노심초사다. 친구들과 잘 지낼 수 있을지, 요즘 아이들은 모든 게 빠르다고 하던데 이리 느린 아이가 그들에게서 떨어져나와 홀로 지내는 건 아닌지 심히 걱정이 되는 게 사실이다. 코로나로 인해 학교에 자주 가지 않는 것, 등교하더라도 개개인의 영역에서만 생활하게 된 것이 다행이란 생각까지 했으니,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고모도 참 생각이 깊지 못하다. 실제 놀이터에 나가 혼자 놀고 있는 녀석을 몇 번이나 보았다. 등장한 고모에게 안기며 친구들이 같이 놀아주지 않는다 울먹이던 때도 종종 있었다. 아직 어린 둘째 녀석은 언니가 방해된다며 저 혼자 무리와 어울렸고, 때로는 언니 때문에 놀이가 방해된다는 아픈 말도 서슴없이 던졌다. 양육 경험이 없던 고모는 당황스럽기만 했다. 사이좋게 놀아야 한다는 원론적인 이야기가 일분일초가 급한 놀이터의 아이들에게 통할 리가 없었다. 그럴 때마다 속이 상했고, 늦게 터지는 조카의 혓바닥보다 다른 이로부터 격리되는 아이의 상황이 더 걱정되곤 했다. 왕따나 학교폭력의 대상이 되지는 않을지. 그것이 가장 두려웠다. 아침에 메시지를 받아들 때마다 혹시 친구가 없어 이리 멀리 사는 고모에게 말을 거나 마음이 졸였다.
「나는 강물처럼 말해요」. 쏟아지는 호평 속에서, 내용에 대해선 아무런 정보 없이 구매한 책이다. 단지 그림이 마음에 들어서, 뭐든 모으기를 좋아하는 이라 책을 사면 삽화 포스터를 준다는 말에 넘어갔다는 게 솔직한 고백이다.
그림에 감탄하며 한 장 한 장 바삐 넘기던 책장을 조용히 붙들고 있다. 몇 장 되지 않는 글과 그림을 읽어 내려가다 정확히 꼬집기 힘든 가슴 속 어딘가를 통째 붙잡혀 흔들린 기분이다. 그림책의 주인공은 말을 더듬는 한 소년이다. 첫째 조카 녀석이 자꾸만 떠오름이 어쩔 수 없다. 주인공은 말을 더듬는 행동으로 친구와 선생님에게서 동떨어져 있음을 느끼며, 그 마음을 가족으로부터 위로받는다. 또래 아이와는 조금 다른 주인공이 어떤 마음으로 눈을 뜨고 학교로 향하며, 책상에 앉아 얼마나 간절하게 수업이 끝나길 바라는지 작가는 미처 헤아려보지 못한 섬세한 눈으로 이야기한다. 자꾸만 조카 녀석도 이런 생각을 하며 하루를 보내나 싶어 마음이 아린다. 죄 조바심만 내는 어른들 사이에서, 자신을 두고 너무 앞서가는 친구들 사이에서 아이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이 책은 작가 조던 스콧 본인의 이야기로, 직접 겪어 그럴 것이라 듣고 추측한 이야기가 아니니 더욱 공감을 일으킨다. 아버지의 진심이 담긴 한 마디, 아이를 사랑으로 이해하고 다치지 않게 보듬기 위한 그 따스한 말 한마디가 작가의 인생을 변화시켰을 거라 믿는다. 문득 제대로, 잘 말하는 것에 대해 생각한다. 빠르고 유려하게 내뱉는 것이 정답일까. 이처럼 누군가의 마음을 다독이고, 불편하지 않으며, 생각의 방향을 다양한 곳으로 이끌어주는 것이 진짜가 아닐까 나름의 정의를 던진다. 조던 스콧의 가슴 적시는 촉촉한 말과 시드니 스미스의 차분하면서도 따뜻한, 찬란히도 눈부신 그림이 한데 어우러져 눈을 뗄 수 없는 깊은 울림을 준다. (시드니 스미스의 그림은 정말 멋지다!) 온몸으로 쏟아지는 감동은 두꺼운 소설책 한 권을 덮었을 때와 비교해도 절대 뒤지지 않는다.
늘 아이 걱정을 끊을 줄 모르는 오빠에게 이 책을 보냈다. 말은 않았지만 같은 감정을 느꼈으리라. 콩나물에 물을 주듯 아이를 키우고 있다는 답이 온다. 천천히 기다려주고, 마음을 다해 들여다보면 어느새 조금씩 자라 있다는 녀석. 나름의 속도로 쉬지 않고 걷고 있는 아이에게 너무 많은 걸 바라지 않았나 반성해 본다. 오늘 아침에도 빠지지 않고 안부 메시지가 왔다. 여전히 같은 문장이지만 띄어쓰기나 맞춤법에 눈을 대기보다, 고모를 잊지 않는 따뜻한 마음씨를 먼저 생각해본다. 아이는 내게 아주 잘 말하고 있다. 차분히 녀석의 말에 귀 기울이며 그 발걸음에 맞춰 천천히 함께 걸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