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축구와 상의 탈의
지난해 7월 '메없산왕'(메시가 없으면 산체스가 왕) 이라는 신조어를 비웃기라도 하듯 알렉시스 산체스는 리오넬 메시가 지켜보는 앞에서 보란 듯이 약하지만 가장 담대한 슛으로 칠레의 사상 첫 코파 아메리카 우승을 이끌었고, 기쁨을 표현하기 위해 유니폼 상의를 벗어 던졌다. 설령 칠레 사람이 아니었을지라도 지켜본 사람들로 하여금 온몸에 전율을 느끼게 하는 순간이었다.
99년 미국에서 열린 여자 월드컵 결승전에 오른 미국과 중국은 연장전이 지나도록 0-0으로 승부를 가리지 못했고, 승부차기까지 가는 접전 끝에 미국이 우승을 차지했다. 미국의 마지막 승부차기 키커로 나선 브랜디 체스테인은 우승을 확정짓는 승부차기를 성공시킨 뒤 유니폼 상의를 벗어 던졌다. 당시 중계화면에는 유명 스포츠 브랜드의 스포츠 브라만을 입은 브랜디 체스테인의 모습이 고스란히 전파를 탔다. 남자 축구 선수들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상의 탈의 셀러브레이션을 여자 축구경기, 그것도 전 세계 팬들이 지켜보는 월드컵 결승전에서 선보인 브랜디 체스테인은 "선정적이고 상업적인 노출이었다" 라는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이후 축구의 규정과 경기 방식을 결정하는 협의체인 국제축구평의회(IFAB)는 2004년 2월 상의 탈의를 하는 선수들에게 옐로카드를 부여하는 개정된 경기규칙을 발표했다. 타 스포츠에 비해 축구에서는 보편적인 골 뒤풀이로 여겨졌던 상의 탈의가 이 새로운 규정으로 인해 적어도 축구 경기 '중'에는 경기장 내에서 그 자취를 감추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규정이 적용된 후에도 상의 탈의는 여전히 축구계의 '뜨거운 감자'다. 상의 탈의 규정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골 셀러브레이션은 골을 넣은 선수에게만 주어지는 일종의 보상이기 때문에 순간의 감정을 드러내는 이 행위를 개인이 갖는 표현의 자유로 봐야한다"면서 "99년 여자 월드컵 이후 생긴 '상의 탈의의 상업적 노출로의 변질 방지'라는 그럴싸한 명분 뒤에는 '유니폼 스폰서 지키기'라는 의도가 숨겨져 있다. 결국 '벗지 않음'이 벗음보다 더 상업적일 수 있는 것이다"는 주장을 전개 중이다.
하지만 문제의 소지도 분명 존재한다. 2005년 세리에 A 라치오에서 활약 했던 파울로 디 카니오가 라이벌인 AS로마와의 경기에서 골을 기록한 후 선보였던 상의 탈의와 나치식 경례는 당시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지금은 지도자의 길을 걷고 있는 그가 아직까지도 '파시스트'라는 꼬리표를 떼지 못한 채, 비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을 보면 몸을 매개로 의도된 메시지를 전달 할 수 있는 상의 탈의는 여타의 골 셀러브레이션과는 비교할 수 없는 파급효과와 오용(誤用)의 여지를 품고 있다.
# 벗기 위해 넣은 그들
2010년 남아공 월드컵 스페인과 네덜란드의 결승전에서 안드레스 이니에스타는 연장 후반 극적인 결승골로 사상 첫 스페인의 월드컵 우승을 이끌었다. 무관의 제왕이라는 석연찮은 별명을 갖고 있었던 조국에게 가장 빛나는 왕관을 선물한 이니에스타는 골을 넣은 직후 유니폼 상의를 벗어 던졌다. 그가 입고 있었던 흰색 내의 위엔 하늘색의 짤막한 문구인 'DANI JARQUE SIEMPRE CONNOSOTROS (다니엘 하르케는 항상 우리와 함께)'가 쓰여 있었다.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난 다니엘 하르케를 추모하기 위한 이 짤막한 문구는 이니에스타의 소속팀인 FC바르셀로나와 '카탈루냐 더비'로 얽혀있는 다니엘 하르케의 소속팀 RCD 에스파뇰의 팬들마저 감동시켰다.
2015년 2월 프랑스 리그앙 PSG와 캉과의 경기에서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는 전반 2분 만에 팀의 선제골을 만들어냈다. 골 셀러브레이션으로 자신의 유니폼을 벗은 그의 몸엔 이전엔 없던 크고, 작은 문신들이 가득했다. 치열한 순위 경쟁을 벌이던 긴박한 상황 속에서 다음 경기 출전 정지 징계를 무릅쓰고 그가 상의를 벗었던 이유는 세계식량계획(WFP)이 후원하는 어린이들의 이름을 자신의 몸에 새겨 팬들에게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경기가 끝난 후 그의 행동을 비판 했던 팬들도 사연을 접한 뒤에는 "도움의 손길을 외면했던 우리들이 받아야 할 경고를 즐라탄이 대신 받았다"며 지지를 보냈다.
2010년 인터밀란을 거쳐 맨체스터 시티에 입단한 마리오 발로텔리는 경기 중 행했던 비신사적 행위와 경기장 밖에서의 엉뚱한 행실로 항상 팬들과 언론의 구설에 올랐다. 이후 사람들은 그가 경기장 안에서 선보이는 축구 보다 경기장 밖에서 일으키는 사건 혹은 사생활과 관련된 축구 외적인 부분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평소 팬들의 비판과 비난 섞인 조롱에 개의치 않아 했던 발로텔리는 라이벌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의 경기에서 골을 기록한 뒤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유니폼 상의를 벗어 젖혔다. 그가 입고 있었던 하늘색 내의 위에는 'Why Always Me?(왜 항상 나야?)'라는 중의적 메시지가 쓰여 있었다. 항상 자신을 비판했던 팬들과 언론을 향한 불만 섞인 반문이자 "왜 항상 나만 골을 넣지?"라는 자신감의 표현이었다.
골이 들어가는 찰나의 순간만큼 축구 선수가 경기장에서 주목 받는 때는 골을 넣은 '다음'이다. 2002년 월드컵 미국과의 경기에서 안정환이 기록한 헤딩골과 2010년 일본과의 평가전에서 박지성이 기록한 선제골이 그들이 선보였던 골 셀러브레이션과 함께 회자되는 것은 골을 넣은 뒤 보여줬던 그들의 뒤풀이가 골 자체가 갖는 의미와는 또 다른 차원의 의미를 부여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선수들의 순수한 가슴속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상의 탈의는 축구, 나아가 우리네 삶 속에서 삼켜져 가고 있는 보편적 가치들을 되새김해보게 하는 또 하나의 볼 거리가 아닐까? 오늘날의 네모난 해시태그가 아닌 둥그런 축구공을 매개로 하는 이러한 '벗음'을 축구 판에서 순수한 표현의 자유를 실현하는, 그들만의 독특하고 진중한 화법이라고 정의 내린다면 그것을 듣는 청자(聽者)된 입장에서의 올바른 소통은 카드라는 일괄적 제재가 아니라 박수라는 유연한 지지가 되어야 하진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