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집에 끼니 구실을 할 만한 것이 라면 밖에 없었다. 그렇게 죽고 못 사는 라면도 연거푸 먹으니 물렸다. 다행스럽게도, 라면의 종류는 2가지였다. 일요일에 아버지마저 요리사로 만든다는 짜장라면 하나, ‘오동통통’하고 쫄깃쫄깃한 면발을 자랑한다는 라면 하나. 몇 년 전이었다면 냄비 2개에 따로따로 끓여 먹었겠지만, 시대적 흐름에 따라 식탁 위의 냄비는 오직 하나. 뚜껑을 여니 ‘짜파구리’라는 훌륭한 요리가 똬리를 틀고 있었다.
사실 짜파구리는 ‘크로스오버(cross-over)’가 밑간이다. 크로스오버란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듦’을 일컫는다. 서로 다른 것들이 한데 섞여 새로운 결과물이 나오는 과정이다. 우리에게 좀 더 익숙한 퓨전(fusion)과 맥을 함께한다고 보면 이해가 쉽다. 음악 등 주로 대중문화 영역에서 통용되던 개념이 이제는 분야를 막론하고 사용된다.
최근에는 ‘축구’도 크로스오버로 버무려지고 있다. 풋풀을 비롯해 헤디스, 풋골프, 풋발리, 버블사커 등 다양한 신 메뉴가 즐비하다. 아무리 질려도 축구는 못 끊겠고, 색다른 맛을 갈망하는 이들에게 안성맞춤이다. 축구 하나만으로 왠지 모를 허기에 시달리고 있다면, 아래의 레시피들을 참고해보시라.
# 축구 + 당구 ▶ 풋풀(Foot Pool) or 풋빌리아드(Foot Billiard)
풋풀(Foot Pool)은 말 그대로 발로하는 포켓볼(pool)이다. 큐 대신 발로 포켓에 공을 넣는 방식이다. 공도 당연히 당구공이 아니라 축구공이다. 포켓볼 룰을 그대로 가져와서 어렵지도 않다. 가로 약 244cm, 세로 약 366cm 규격의 경기장에 6개의 포켓이 뚫려있고, 포켓볼처럼 수구(흰 공)를 발로 차 적구(색깔 공)를 포켓에 넣으면 된다. 공 10개로 하면 마지막에 숫자 9번이 적힌 공을 포켓에 넣는 팀이 승리한다. 최근에는 취향 따라 다양한 룰을 적용해 풋풀을 즐긴다.
풋풀은 영국에서 가장 먼저 즐긴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에는 유럽을 비롯해 미국, 아시아 등에서도 인기다. 2015년 영국에서는 풋풀 챔피언십이 개최되기도 했다.
# 축구 + 탁구 ▶ 헤디스(Headis)
헤디스(Headis)는 축구와 탁구의 크로스오버다. 경기가 펼쳐지는 곳은 탁구대 앞. 탁구공 대신 축구공을 주고받는다. 룰 역시 탁구와 매우 흡사하다. 탁구채 대신 머리를 써서 공을 상대편 네트로 보내면 된다.
헤디스는 스포츠과학을 전공한 르네 웨그너라는 독일 대학생이 2006년에 개발한 것으로 알려졌다. 친구와 탁구대에서 축구공을 주고받다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고 한다. 독일에서는 해마다 열 차례씩이나 토너먼트 대회가 개최될 정도로 인기다. 축구에 일가견이 있는 영국, 스페인 등에서도 헤디스를 즐기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 축구 + 골프 ▶ 풋골프(Footgolf)
축구와 골프가 만나면 풋골프(Footgolf)가 된다. 골프공 대신 축구공, 골프채 대신 발을 이용한다. 비싼 골프채 필요 없이 남녀노소 즐길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짧은 홀은 파2, 긴 홀은 파7까지 있는데, 축구공 크기에 맞춰 커진 지름 51cm의 홀에 축구공을 발로 차 넣으면 된다. 골프처럼 홀에서 먼 플레이어부터 두 번째 샷을 이어가고, 축구공이 경기장을 벗어나면 벌타도 주어진다. 바닥에 돌기가 있는 진짜 축구화는 잔디 보호를 위해 착용이 금지된다.
최초의 풋골프협회는 2008년 스페인에서 탄생했다. 2011년 골프 종주국인 미국에서도 풋골프연맹이 만들어질 정도로, 풋골프는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 국내에도 2015년에 대한풋골프협회가 창설됐다. 국제풋골프협회(FIFG)는 4년에 1번씩 국제대회인 ‘풋골프 월드컵’을 개최하고 있다.
# 축구 + 배구 ▶ 풋발리(Footvolly)
‘발로하는 배구’ 풋발리(Footvolly)는 배구와 다르게 손을 써서는 안 된다. 손과 어깨를 제외한 신체 모든 부위를 활용해 공을 네트 위로 넘겨야 한다. 배구처럼 땅에 공을 떨어뜨리면 안 되기 때문에 고도의 순발력을 요하는 종목이다.
풋발리는 지난해 올림픽이 열렸던 브라질의 리우 데 자네이루 코파카바나 해변서 태동했다. 1965년 옥타비아 데 모라에스가 고안했다는 풋발리는 2000년대 들어 브라질 밖으로도 퍼지기 시작했다. 2011년에는 풋발리 월드컵이라 할 수 있는 풋발리 월드챔피언십이 브라질서 개최됐다. 당시 개최국 브라질은 준우승에 머물렀고, 우승은 파라과이가 차지했다.
# 축구 + 미식축구 ▶ 버블사커(Bubble Soccer)
미식축구의 격렬함을 느끼고 싶다면, 투명 풍선을 타고 축구장으로 떠나라. 버블사커(Bubble Soccer)는 몸에 커다란 투명 풍선을 착용하고 즐기는 축구다. 골키퍼 포함 4명의 선수들이 전·후반 7분, 총 14분을 소화한다. 거대한 풍선이 충격을 완화하기 때문에 아무리 거칠게 몸싸움을 해도 다칠 염려가 없다. 운동효과도 커서 여성들의 참여율이 높다.
2011년 노르웨이서 처음 소개된 버블사커는 유럽을 넘어 한국서도 선풍적인 인기다. 국내에서는 지난 2014년 브라질 월드컵을 앞두고 한 맥주회사가 버블사커 대회를 개최했는데, 당시 전국 예선을 통과한 대학교 8개 팀이 참가해 장학금을 놓고 열띤 경쟁을 벌이기도 했다.
2017년 3월 21일자로 베프리포트에 기고한 칼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