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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소다 Sep 04. 2023

죽음의 자세

어떻게 죽을 것인가.

 오랜만에 웹툰 죽음에 관하여를 보았다. 지금은 대부분이 유료로 바뀌어서 볼 수 없지만, 몇편은 무료로 공개되어 있었다. 나는 여전히 몇화 안되는 무료버전을 보고, 펑펑 울음을 터뜨렸다. 주체 못하는 눈물을 흘리고 난뒤,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난 왜 울었을까?, 무엇이 두려운 걸까? 아니면 죽음이 주는 허무가 애달픈 것일까.

나는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라고 말이다.


죽음, 지금 생각해보면 어렸을 적엔 죽음이 두려웠다. 그땐 마냥 단순히 죽는 다는 사실이 무서웠다. 그래서

날 죽이러 오는 것 같이 묘사된 귀신을, 아주 무서워했었다. 시간이 흐르고 인생이란 것을 조금 맛보니, 죽는다는 사실도 귀신도 두렵지 않았다. 내 주변에서 일어난 죽음의 사건들을 경험하기도 했거니와, 이로인해 인간은 모두 죽는다는 것을 인정하게 됐다. 그때부터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았다. 그저 무에서 유가 되어 다시 무가 되어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조금 더 세월이 지나고, 나는 결혼을 하고 한 아이의 부모가 되었다. 이때부터 죽음은 내게 또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인생을 살면서 내가 책임져야 할 사람이 생겼다. 가족과 아이. 내가 죽는다면 부모 외에, 내 죽음을 가장 슬퍼 할 두 사람. 이때부터 죽음은 나에게 절대 빨리 일어나서는 안될 사건이 되었다. 20대때의 겁없던 청년은, 으레 일하면서 가장 혐오했던, 몸을 사리는 아저씨가 되버렸다. 안전한 것을 추구하고, 안정을 생각하며, 죽음을 피해다니려 노력했다. 나는 그렇게 내 죽음을 그리지 못하는 비겁한 사람이 되어있었다. 그러다, 내가 병마와 싸우며 죽음의 문턱에 가까이 다가갔을 때, 죽음이 피해지긴 할까?란 질문에 도달했다. 나의 결론은 "죽음은 개인의 역량으로 피할 수 없는 것이다"로 귀결되었다. 죽음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이 필요했다.


죽음이란 것은 피하지 못 할 숙명 같은 것이다. 내게 일어나면 받아들여야 하는 그런 것. 결국, 피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죽음의 허무 역시 애달프긴 하나, 그것이 인생인 것을 어찌하겠는가. 남겨진 자들은 슬퍼 할 것이요, 떠나간 자는 말이 없는 법이다. 하지만, 개인이 할 수 있는 것이 있었다. 바로, 죽음을 받아들이는 자세를 선택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나의 죽음으로 인해 나라는 존재가 끝이 나지 않길 바랐다.

따라서, 죽음에 있어 한가지만을 바라보고 달려가리라 생각했다. 바로, 후회 없는 죽음이다.


나는 지금 후회 없는 죽음을 위해, 내가 하고 싶은 걸 하고 있다. 글쓰기, 휴직, 창업, 투자, 운동 등. 죽기 전에 "아, 그건 꼭 해봤어야 했는데"이런 말을 하지 않으려 노력 중이다. 하고 싶은 일을 한다면, 마지막 가는 길에는 후회 없이 겸허한 자세로 받아들일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나의 Intergrity가 되어 후회없는 죽음을 맞이 할 인생의 자세이기도 하다. 나로서 존재했던 죽음이라면, 두렵지 않다. 그저, 설레일뿐이다.

내가 바라는 인생을 잘 표현한 Frank sinatra의 - My way로 글을 마친다.

To think i did all that;
And may i say -not in a shy way
Oh no, oh no not me,
I did it my way
For what is a man
What has he got?
If not himself, then he has naught
To say the things he truly feels;
And not the words of one who kneels.
The record shows
I took the blows -
And did it my w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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