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 살의 나를 만나다 - '명랑처자 엿보기' 참고
평범함과는 거리가 먼 나를 소개하자면 Q&A가 편하지만 그러질 못하니 그냥 혼자 떠들어야겠다. 아마 '명랑처자 엿보기'를 재미없게 읽어보신 분들이 있으시다면 대략 예상도 되실 것 같다. 우선 지금도 하루가 바쁘지만 스무 살 땐 더더욱 바빴다. 그래서 그때 별명이 '연예인'이었다. 다른 이유가 없다. 그냥 바빠서~연예인 ㅋㅋ
주로 '하루'라는 시간을 쪼개고 쪼개서 친구들과 지인들을 만나고, 친구들 혹은 지인들과의 모임이 생기게 되면 또 만나고, 그러다 보면 내 친구가 또 다른 내 친구와 친구가 되고, 그러다 보면 어느새 난 약속이 너무 많아져서 그 시절에 나는 '다이어리'를 꼭 써야만 했다. 나중엔 약속이 헷갈려서 쓰기도 했다. 그런데다 할 일이 너무 많아지며 '일기'도 쓰고, '다이어리'도 쓰고, '편지'까지 써야 했다. 먼 미래를 위한 내 재산은 아니었지만 그냥 남기고 싶었다. '나중에 '여행기'까지 간략하게라도 써 둔다면 '작가'를 할 수도 있으니 참고할 수 있겠다.'라는 생각까지 허황되게 꿈꾸기도 했다.
'1남 3녀'의 우리 집 둘째 딸은 검소했다.' 이게 맞을 것 같다. 참고로 절대 착하진 않았다. 특히 '착하다' 이 표현은 지금도 싫어한다. 요즘도 우리 집 자매님들은 사용하시던 것들을 새 거처럼 사용하시다 싫증이 나면 주기 때문에 난 받아서 잘 쓴다.^^; 그래서 항상 명품가방은 살 일이 거의 없다. 그동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 물론 나도 20대에는 새 명품가방을 갖고 싶었다. 하지만 참다 보니 가방 대신에 얻은 스무 살의 배낭여행은 비교도 안되게 값진 거였다. 여행 이후에는 매번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졌고, 보통의 추억이 사소한 것부터 달라져 있었다.' 특히 배낭여행은 선진국만 다녀왔기에 배울 점이 더 많았다. 지금 보이는 장, 단점이 그때 보였으니까 말이다. 거의 20년 정도 빨랐다고 보면 된다.
하지만 내가 해외여행을 자주 가다 보니 아주 귀찮은 점이 하나 있었다. 우리 집 자매님들이 새로운 가방을 면세점에서 사 오라고 부탁을 했다. 어떤 여행에서는 부탁받은 두 개의 가방과 세 개의 (손 흔드는 일본 고양이를 말한다) 고양이 인형을 케리어에 담아 왔는데 무섭게 생긴 세관아저씨한테 걸려서 케리어를 열었고, 어쩔 수 없이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보고 있었지만 열었다. 역시 열자마자 주변 사람들 모두들 웃기 바빴다. 물론 세관아저씨는 웃음을 참고 계셨다. 왜냐하면 공항에 오는 데 조금 바빠서 케리어를 쌀 때 그냥 다 때려 넣어둔 상태였으니 상상초월 개판 오 분 전이었다.
정기적으로 배낭여행을 다녔던 건 아니지만 여행을 위해 '펀드'도 가입할 정도로 그때는 일이 아무리 스트레스를 준다고 해도 여행을 가기 위해 열심히 일하고, 1년이든 2년이든 채우면 '만기퇴사'가 되고 '실업급여'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배낭여행을 가는 횟수가 늘었는데 항상 비용을 생각해야 됐다. 그게 습관이 됐는지 내 가방에는 지금도 그렇지만 많은 물건들이 들어가 있어서 친구들이 날 '도라에몽'이라고 불렀다. 그저 난 '집에 있는 물건이 제자리에 없으면 비싼 돈을 들여 밖에서 재소비를 해야 하는 게 싫었다.' 매번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어떤 물건이든 '적재적소'에 쓰이는 걸 좋아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때론 헛 돈 쓰는 걸 무지 싫어하다 보니까 그렇기도 하다.
스무 살을 지나 나에게 남는 건 '친구들' 뿐이었다. 그리고 '추억'이었다. 우리 집은 엄마와 아빠한테 손을 벌리지 않는 게 당연하다 보니 어떻게 해서든 취직을 해야 했고, 나는 우연히 시작 한 '텔레마케터'의 길로 갈 수밖에 없었다. 그땐 면접기준에 있어 어떤 기준도 없었고, 갖춰야 할 것도 없었다. 그래서 무난하게 '합격'을 하고, 오래 다니다 보니 사회생활에서 배울 수 있는 건 생각보다 많이 배울 수 있었다. 역시 돈을 들이지 않고 배우는 길은 '회사'라는 곳에 다니는 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