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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병 팔기

빈병을 팔아 용돈으로 사용했었던 언니와 동생들과의 추억

by 명랑처자





공병 팔


우리 집은 용돈이라는 게 없었다. 돈이라고 하면 가끔 이모, 이모부들이 우리 집에 모여 고스톱을 하셨을 경우 따신 분들만 만원 혹은 이만 원의 돈을 주시면서 나눠 갖게 되는 경우와 '공병 팔기'가 있었다.



어느 날 제일 어린 남동생이 모아놓은 공병을 팔기 위해 슈퍼에 간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돕기 위해 같이 집을 나섰다. 그런데 한참을 가다 동생이 돌부리에 걸려서 넘어졌다. 나는 너무 놀란 나머지 바로 남동생 얼굴을 자세히 보게 됐다. "으아악~~~" 오른쪽 눈 쪽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난 서둘러 다친 곳이 더 없는지 확인하고, 집에 들어가자마자 엄마를 찾았다. 엄마는 놀라시며 인상을 구기시더니 동생의 눈 주변 피를 닦아내셨다. 이후 자초지종을 들으시더니 (등짝 스매싱 후에) 병원에 동생과 함께 나가셨다, 나에게 한마디 하시면서 말이다.


"갔다 와서 보자"


난 엄마가 오실 때까지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내 잘못은 하나도 없는데 왜 이렇게 떨리던지...ㅜ.ㅜ이러다 왠지 죽기 직전까지 맞을 것 같았다. 진짜 피해자는 나인데 말이다. 과연 남동생도 내 편을 되어 줄지 모르는 상황이지만 바라지도 않았다. 바라기에는 너무 어렸다. 분명히 온통 본인 아픈 거에 대해서 생각할 테니까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아직 '유치원생인 남동생'이 공병을 팔러 나간다고 했으면 막아야지 그걸 돕냐고 하시며 혼나게 될게 안 들어도 오디오였다. 그리고 몇 바늘 꿰매는 바람에 정신도 없어서....ㅠ.ㅠ 기다리는 내내 한숨만 나왔다.



역시 엄마는 나를 불러다 본인 앞에 세워놓고, 자초지종을 물으시고, 난 대답했다. 예상한 것보다는 혼난 강도가 세지는 않았다. 귀하디 귀한 하나뿐인 아들의 얼굴에 꿰맨 자국이 남을 거라는 생각을 하시는지 갑자기 나를 또 째려보셨다. 이 날 이후로는 '공병 팔기'를 할 때는 남동생은 절대 껴주지 않았다. "빨리 커라~똥개야~"라고 말해주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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