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든 일 할 수 있지만 오래 일하기는 어려운 일
난 20대 이전까지는 많이 아파서 누워있는 시간이나 병원에 있는 시간이 나의 하루였다. 그렇다고 누워만 있을 수 있는 가정형편이 아니기에 조금이라도 나아진 몸으로 '00 홈쇼핑 고객센터'에 '상담사'(이때는 '텔레마케터'라는 단어도 없었을 것이다.) 취업을 하게 되었다. 그때 내가 생각하는 미래의 세상은 몸이 아프고 불편해도, 경력단절이라고 해도 전화기 1대면 모두 일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었고, 대부분의 여자들과 몸이 불편한 사람들도 이 일을 할 수 있게 될 거라고 믿었다. 그런데다 60세까지 일할 수 있으니 다른 직업보다 긴 시간 동안 일 할 수 있고, 대부분의 기업들의 신규센터들이 많았기에 근무환경도 좋아서 그 어떤 직업보다 장점이 많은 직업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주 큰 단점으로 '견딜 수 없는 스트레스의 연속'이라는 점이 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지만 말이다.
앞서 말한 단점을 뒤로하고, 난 합격을 위해 면접 보기 전까지 남보다 잘하는 장점을 준비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건 바로 '높은 타자수'였다. 비록 집에 컴퓨터도 없고, 컴퓨터 학원을 다닐 수 없는 형편이었지만 나에겐 '컴퓨터'가 있는 친구가 집 근처에 살았다. 그 친구 덕분에 난 '높은 타자수'가 가능했다. 다시 생각하니 내 예상은 (이때 콜센터가 있는 기업들은 분명히 각자의 전산을 사용했다) 적중했다.
누구나 시작할 수 있기에 난 '텔레마케터'로 합격하게 됐고, 한 달 가까운 교육을 받고 '00 홈쇼핑 고객센터' 업무를 시작하게 되었다. 일을 하면 할수록 단 시간 내 안내내용을 찾고, 대기시간에 따른 양해멘트 후 정확하게 안내하고, 끝인사 전에 이력을 쓸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난 얼마 되지 않아 한번에 세 가지(듣고, 말하고, 쓰기)를 다른 내용으로 동시에 할 수 있었다. 내가 생각해도 뇌가 젊은서 그런 건지 하루 콜 수가 월등히 증가했고, 콜과 콜 사이의 시간도 단축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 시절의 내가 시작한 '상담사'라는 직업은 거의 모든 사람들이 '114'밖에 떠올리지 못했다. 하지만 점점 기업들은 콜 업무의 중요성을 생각하게 됐던 것 같다. 점점 콜센터가 증가하기 시작했고, 내가 입사하게 된 '00 홈쇼핑'은 단연 홈쇼핑 중에서도 1위였으며 고객층이 주로 주부들이어서 그랬던 건지 몸값도 비싼 '배용준'이 표지모델이었다.
일단 나는 1년 동안 본사에서 새벽 1시에 끝이 나는 시간대로 선택을 하고 일하게 되었다. 거의 바로 집으로 안 가고 콜센터 근처 아직도 있는 '정동극장'에서 친한 동료들과 만원에 3편의 영화를 보기도 하고, 24시 하는 곳을 찾아 배고픔을 달래기도 하고, 그날의 '이슈'가 되는 일들을 서로 나눴다. 대중교통의 첫 차 시간까지 새벽이슬을 맞아가며 방황했었다. 그렇게 동료들과 업무가 끝나고 이렇게 보내는 시간들이 너무 소중하고, 즐거웠지만 업무는 나도 모르게 점점 '스트레스 과부하 상태'가 되어 가고 있었다.
처음 시작한 일은 그냥 단순 주문접수와 배송날짜 안내로 간단했다. 하지만 새벽업무이기에 114로 전화해야 되는 요청내용도 안내해야 했으며 욕을 하거나 (요즘은 경고 3회를 멘트로 주고, 지키지 않을 시 상담사가 먼저 끊을 수 있도록 한다.) 취객과 변태에게도 친절한 안내로 콜 자제해 달라고 안내해야 했던 업무가 반복되다 보니 퇴사는 늘 하고 싶었고, 하루가 이틀이 되고, 이틀이 어느새 한 달이 되어가자 더 이상 369로도 버티지 못하게 되고, 4년이라는 경력을 이력서에 남기게 되었다.(여기서 369란? 3개월 버티면 어느새 6개월 일할 수 있고, 어쩌다 보니 모아둔 연차가 아까워 금세 9개월째 일하다 보면 어느새 퇴직금을 받을 수 있는 1년이 된다는 내용이며 상담사들끼리의 퇴사방지하기 위한 나름의 회사 오래 다닐 수 있게 하는 퇴사방지법 )
사실 4년이 넘었는데도 일반상담원에서 관리자가 되지 못했던 건 고졸이라는 나의 최종학력과 늘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일이 생기면 꼭 최종 관리자에게 전달하고, 변화되는 걸 봐야 하는 성격이기에 매번 관리자가 되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회사에 애사심도 있어야 계속 다닐 텐데 그것도 없어지고, 늘 배울 것도 없고 제자리걸음을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서 어느새 사직서를 내게 되었다. 아마 이 시기가 되면 난 늘 '배낭여행'을 다녔다. 비록 대단한 나라는 아니었지만 (나에게 20년 전쯤의 일본은 우리나라와 다른 점도 많았고, '선진국'이기에 배워야 할 점도 많아 자주 가게 되었다) 배낭여행을 갔다 오면 무언가 모르게 내가 생각하는 나의 기준으로 더 많이 배울 수 있는 콜센터에서 새로운 업무를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위와 같이 내가 생각하는 달라진 기준으로 전화받게 되는 고객이 '갑'이 되고, 상담사가 '을'이 되는 잘못된 생각을 하게 됐지만 현실은 그렇지가 않았다. 아마 내가 살아오면서 가장 많고, 다양한 '욕'을 먹었을 때가 이때가 아니었다 싶다. 하지만 5년 이상의 '채권' 업무를 해오며 '욕'은 비일비재(非一非再)해서 나중엔 스트레스를 받거나 마음이 상하진 않았다. 오히려 '새로운 욕'을 기다리게 되었고, 그냥 '이 고객님은 돈이 없구나'라고 속으로 생각하며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입금날짜를 잡고, 입금약속을 지키게 유도했다.
그 후엔 으레 계약 1년 혹은 2년의 계약만료로 퇴사를 하고, 그 후엔 '실업급여'를 받으며 항상 잠시 쉰다. 문제는 그러다 보니 '돈'을 많이 모으는 일이 어렵다는 점이었다. 그렇다고 만만치 않은 세상에서 어려운 일들을 함에 있어서 멘털을 쉬게 하고, 다시 나아갈 수 있게 되는 시간이 주어졌다. 주어진 그 시간에는 항상 국외든 국내든 '배낭여행'을 자주 가게 됐고, 그때마다 제자리로 돌아오다 보면 '정화된 나'를 느끼게 되었다. 암튼 '여행은 돈이든 시간이든 둘 중 하나만 있으면 무조건 떠나는 거다. '라고 한다. 그래서 나와 베프는 여행을 위한 돈을 투자하기 시작했고, 그건 오로지 여행을 위해서 마련을 위한 펀드였다.
이렇게 '텔레마케터'라는 직업을 하고 있는 난 벌써 반백년이 되어 가고 있다 보니 요즘 '제2의 직업'을 찾고 있다. 그 와중에 시행착오도 엄청 겪게 됐지만 (비행기 내부 청소, 그 외는 모두 '생산직') 함께 일한 후 내가 느낀 점은 '와~모두 대단하신 분들이다.' 급여를 아주 많이 줘야 할 정도로 열심히 일하시고, 업무량이 장난이 아니었다. 처음 하는 일이지만 열심히 하느라 나 역시 고개 한번 올리지 않고, 허리 한번 피지도 않았다. 기존들의 경우 한 순간이라도 앉아서 일하지 않는 분들을 보며 교통비 혹은 식대를 추가로 준다고 해도 급여인상은 꼭 있어야 할 것 같다.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최저임금' 너무 할 뿐이다.
나의 일 '텔레마케터'를 오래 해서 그런 건지 그동안 관리를 안 해서 그런 건지 아니면 비타민 한 알도 안 먹고 사니까 그런 건지 잘 모르겠지만 몸으로 하는 일은 모두 할 수 있다고 생각한 두 가지 모두 나한텐 맞지 않았다. 오랜 나의 직업 '텔레마케터'가 훨씬 잘할 수 있고, 스트레스도 적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게 되었다.
하지만 위와 같이 엄마에게 말하게 되면 오랜 시간 동안 생산직에 계셨던 엄마는 '하다 보면 할 수 있어. 3일만 더 해 봐라'라고 하셨지만 화장품 뚜껑만 9시부터 6시까지 닫았더니 나중엔 손목이 시큰거렸다. 다행인 건 '하루알바'라는 거다. 하지만 이후엔 '상자 접기부터 레일작업'을 해야 했는데 멘털이 나갈 것 같았다. 그리고 '내 귀 책임져...'라고 할 뻔했다. '작업반장'이신 분이 일 시키며 잘 못하게 되면 고함을 고래고래. 당최 '난 어디로 가야 하는 건지?!' 솔직히 생산직은 '사람에 대한 스트레스 때문에 피하고자 선택한 곳'이었는데... 이 분 외에도 한 분 더 있으신 데 그냥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일하러 왔다가 오래간만에 멘털까지 나갈 뻔했다. '어깨 뽕'의 폐허인가 이 일터는......?! 사람 귀한 줄 모르는 일터는 있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데 말이다.
제발 최종적이길 바라며 다시 '텔레마케터'가 바탕이 되는 일터이며 출퇴근 거리는 30분 안으로 마을버스로 환승하면 된다. 그리고 업무는 진짜 열심히 할 예정이다. 더 이상 면접 보는 것도 지쳤으니까 말이다. 한마디로 말해 '진퇴양난(進退兩難)'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