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추적 사고, 짐작하기의 과정
귀추는 어떤 현상을 보고 현상의 원인을 추측해보는 추론이다. Peirce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고안해내는 유일한 논리적 과정이 바로 귀추적 사고라고 주장하며 현상의 원인에 대한 ‘짐작하기’의 과정이라고 설명하였다. 우리는 언제 어떤 상황에서 주어진 현상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이 현상은 ‘이 때문에 혹은 무엇 때문에 이렇게 되었을 거다’ 라고 짐작하게 될까? 도대체 무엇이 우리를 현상 너머의 진짜 원인과 배경을 추론하게 만드는가? 귀추를 불러일으키는 환경과 조건을 따져보기 위해 귀추적 사고를 ‘짐작하기’의 과정이라고 설명한 Peirce의 말을 빌려 ‘짐작’이라는 키워드에서부터 생각해보고자 한다.
짐작을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사정이나 형편 따위를 어림잡아 헤아림’으로 정의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어림잡아 헤아리기 위해서는 먼저 ‘기준’이 있어야 한다. 과거에서부터 지금까지 무수하게 많은 발견이나 경험이 누적되어 그 안에서 일정한 문법이나 패턴이 만들어지면 우리는 그 안에서 특정한 표준을 발견하게 된다. 다수에게 수용된 표준은 ‘보편타당한 상식’으로 인식되며 이러한 표준은 어림잡아 헤아리는 과정에서 판단 혹은 해석의 기준이 되는 것이다. 갑작스럽게 새벽에 깨서 큰 소리로 우는 아기는 무서운 꿈을 꾸었기 때문이라거나, 부부싸움이 잦아 급기야 이혼을 염두에 두고 있는 커플의 문제를 성격 차이로 해석한다거나, 실력이 훌륭한 축구 선수임에도 불구하고 경기에 출장하지 못하는 선수의 원인을 감독과의 불화로 설명하는 것은 기존의 익숙함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해석이다. 현상의 원인이 우리가 흔히 생각할 수 있는 익숙한 해석과 실제로도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기존의 익숙한 문법을 벗어나지 못하는 사고로는 현상을 더욱 새롭고 입체적으로 구성해나가기 어렵다. 이미 수많은 사례를 통해 검증된 원인만을 붙잡고 있는 것은 적극적인 사고 활동이 아닐 뿐만 아니라 현상의 가능성과 다양성을 놓치기 쉽다. 그리고 진짜 이유와 원인을 파악하고 나아가 더 발전적인 관점과 태도를 논의하는 데에도 제약이 된다. 따라서 발전적인 귀추적 사고를 위해 우리는 ‘어림잡음’ 보다 ‘헤아림’에 방점을 찍어야 한다.
‘어림잡는’ 시선은 과거를 향한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과거의 기준을 잣대로 지금 앞에 놓인 현상의 수준을 판단한다. 그리고 그 판단은 주로 눈으로 확인되는, 가시적인 표면에 머문다. ‘많다-적다’, ‘높다-낮다’, ‘빠르다-느리다’, ‘넓다—좁다’와 같은 판단은 특정한 기준이 개입된다. 팩트체크와 같이 특정한 상식을 토대로 ‘-에 비해 어떻다’는 것을 빠르게 확인할 수 있고 판단의 결론은 사실상 정답이므로 특별히 반론을 제기할 여지가 없다. 반면 ‘헤아림’은 ‘상상’과 관련이 깊다. 다음의 문장들을 살펴보자.
이 일의 고충을 헤아려 주십시오.
헤아릴 길 없는 슬픔이 그의 눈에 서려 있었다.
첫 번째 문장에서 일의 힘들고 괴로운 사정은 사람마다 각기 다르게 해석될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일이 가지고 있는 특성을 생각할 수 있고, 또 어떤 사람은 주변 상황을 돌아볼 수 있다. 또한 그 일과 관련 있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떠올려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한 가지 사건을 둘러싼 다양한 주변 맥락을 고려하고 특별히 정답이 존재하지 않으며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두 번째 문장에서도 마찬가지다. 그의 눈에 서려 있는 슬픔을 헤아려본다면 그와 연관된 다양한 이야기가 머릿속에 떠오를 수 있다. 그의 삶 혹은 현재 상황을 둘러싼 맥락을 고려하여 그의 슬픔에 영향을 준 여러 사건들을 짚어보게 될 것이다.
만일 두 번째 문장을 책에서 만난다면 어떨까? 책의 중간이나 끝에서 이 문장을 만난다면 독자들은 작가가 이미 서술해놓은 맥락적 스토리로 인해 그의 슬픔을 이해하고 헤아리게 될 것이다. 책의 서두에서 이 문장을 만난다면 어떨까? 독자들은 이 한 문장을 읽자마자 곧바로 ‘왜?’라는 물음을 가지게 되며 주인공이 슬픔을 가지게 된 원인을 알아보고자 더욱 스토리에 몰입할 것이고 이후 그에 대한 답을 스스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귀추적 사고는 이러한 ‘헤아림’의 관점과 관련이 깊다. 즉, 단순한 추리가 아닌 상상과 스토리의 과정이다.
귀추가 상상과 스토리의 과정이라면, 우리가 어떤 상황에서 더 풍성한 스토리를 상상하게 되는지를 생각해 보면 ‘무엇이 사람을 귀추하게 하는가’에 대한 답의 힌트가 나오지 않을까 싶다. 예전이지만 나태주 시인의 시가 한참 동안 광화문 광장에 걸려있었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이 글을 보자마자 이런 생각이 들었다. ‘왜 자세히 보아야 예쁘지?, ‘왜 오래 봐야 사랑스럽지?’. 예쁘고 사랑스러운 건 3초 컷으로 보자마자 느낄 수 있는 것 같은데, 자세히 보고 오래 봐야 예쁘고 사랑스럽다는 말이 꽤 낯설게 느껴졌다. 서로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말들이 함께 어우러져 있기도 했거니와, 예쁘고 사랑스러움을 바라보는 시선이 기존의 상식을 벗어나 있었고, 이전까지 들어보지 못한 표현이었기에 낯설면서도 굉장히 신선하게 느껴졌다. 이 때문에 왜(why)라는 질문을 가지고 시인은 저렇게 표현한 이유와 배경을 한동안 계속 고민하고 곱씹게 되었다. 이러한 경험을 생각해보면 귀추적 사고를 자극하기 위해서는 ‘낯섦과 익숙함의 공존’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익숙한 개념을 지금까지의 상식을 벗어난 조금 낯선 방식으로 설명하는 방식은 먼저 사람들로 하여금 의문을 품게 한다.
귀추적 사고는 하나의 현상이 나타난 원인 혹은 배경에 대해 그럴 수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제안’ 일 수 있다. 그래서 때로는 정확한 근거 제시를 요구하는 누군가로부터 공격을 받을 수 있는 사고방식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낯선 익숙함(혹은 익숙한 낯섦)을 기반으로 한 상상과 스토리의 과정은 오늘날 우리의 삶을 더 풍성하게 만들어주고 있다. 라이언킹은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동물 버전으로 바꾼 것이고, 말레피센트는 잠자는 숲 속의 공주 이야기 속 마녀가 사실은 악당이 아니라는 상상에서 시작되어 만들어진 작품이다. 전제로부터 결론의 참을 증명하고 객관적 관찰을 통해 규칙을 찾는 연역법과 귀납법의 탐구 방식은 변동성과 불확실성이 높은 시대에서 많은 한계를 드러냈다. 이제 사회는 다양성을 기반으로 창의적인 사고를 요구한다. 지금까지 관행처럼 여겨지던 익숙한 사고방식을 벗어나 현상을 의심하며 자신만의 사고 체계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 귀추적 사고의 실천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