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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날기록 Dec 31. 2020

몇 평에 살았어?

어린 봄날


    “자기는 어렸을 때 몇 평에 살았어?”

  몇 해 전 작은 평수 아파트로 이사 들어온 날 남편이 나에게 물었다.

 시골에서 나고 자란 나는 그 질문이 신박하게 웃겼다. 시골 생태를 천지도 모르는 도시 사램의 질문이다. 도시에서 태어나 지금껏 아파트 생활만 해 온 남편은 더 넓은 평수의 아파트를 얻지 못한 미안함 때문인지 어렸을 때는 이 집보다 더 작은 아파트에도 살았다며 나를 위로한다며 꺼낸 말이었다. 내가 살았던 시골집을 어림짐작하여 몇 평 정도였다고 말해줄까 하다가,

  “글쎄, 시골집이 다 그렇지. 마당, 우물가, 텃밭이 있었고 집 뒤에는 감나무도 있었어.”

  “닭도 키웠고 나중에는 소도 한 마리 키웠었어.”

  아버지는 소를 사 올 줄만 아셨고 키울 줄은 모르셨다. 결혼 10년 동안 5번의 이사를 다니면서 비슷비슷한 구조의 아파트를 전전했다. 103동 301호가 입에 익을 때쯤 205동 202호로 옮겨야 했다. 2년마다 동호수가 바뀌다 보니 경비실에 택배 가지러 갔다가 엉뚱한 동호수를 말하는 바람에 경비원 아저씨랑 실랑이 한 적도 있었다.

징검다리 건너듯 거쳐 온 아파트 둥지들은 그저 몇 평에 얼마 정도로 추억하게 되었다.

  

  지난겨울 9살 아들이 엄마는 어렸을 때 어떤 집에 살았었냐며 물어왔다. 

나는 색연필로 빨간 슬레이트 지붕과 파란 하늘과 하얀 구름을 담던 우물, 집을 호위하는 장승같은 감나무를 그렸다. 

  여름에는 해바라기가 담장 밖으로 노란 얼굴을 내밀고 새벽에 고기잡이 나가셨던 아버지께서 생선을 잡아 오시면 엄마는 우물가에서 생선을 손질하셨지. 생선의 배 속에서 나온 알록달록한 내장을 쪼그려 앉아 구경하던 나와 고양이. 우리 집 고양이는 한겨울에 어디가 가장 따뜻한지 잘 알고 있었다. 아궁이에 불을 지피면 무언가 빛의 속도로 후다닥 뛰쳐나오는데 그게 우리 집 고양이였다. 잔열이 남아있던 따뜻한 아궁이 속에서 낮잠을 자다 봉변을 당한 고양이는 매운 연기에 놀랐겠지만 불 속에서 뛰쳐나오는 고양이를 본 내 어린 가슴은 더 놀랬다. 우리 집 고양이는 한겨울 내내 재개 비를 뒤집어쓰고 돌아다녔다. 땟국이 줄줄 흐르는 건 시골 아이나 시골 고양이나 매한가지였다. 

  애석하게도 내 친구 고양이가 나와 함께 쭉 자란 건 아니었다. 좀 키웠다 하면 마을 친척 어르신이 무릎이 안 좋다, 관절이 안 좋다 하면서 약으로 쓴다며 잡아가곤 했다. 고양이가 그물망에 담겨 괴로운 소리를 내면서 사라질 때마다 나는 담장 모퉁이 감나무 밑에서 울 수밖에 없었다. 한 녀석도 제 명이 다할 때까지 키우지 못했다. 처참한 일이었지만 어린 나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고양이를 잡아먹던 팔아먹던 다 어른들 소관이었다.  평소 무릎 관절이 약한 욕심 많은 큰어머니는 닭 잡아먹듯 우리 집 고양이를 잡아먹는 걸 예사로 알았다. 그래서 그런지 아흔이 훌쩍 넘은 지금도 건강하게 잘 살아 계신다. 그 시절 시골에선 몸보신용으로 집에서 기른 개, 염소, 토끼, 고양이 등을 잡아먹는 게 일상이었다.  내가 살던 깡촌에도 일주일에 두세 번 ‘개나 염소 삽니다. 고양이도 삽니다’ 확성기를 울리며 트럭이 왔다가곤 했다. 고양이는 자신의 미래를 모른 채 햇살 아래 몸을 식빵처럼 만들고 평온한 낮잠을 즐겼다. 나는 한없이 고양이의 등을 쓰다듬었다. 고양이는 답례로 골골 소리를 내주었다. 

   내가 살았던 시골집을 정성스레 그려서 아이에게 이런저런 얘기를 들려주었는데

아이는 엄마가 어릴 때 이런 불편한 옛날 집에 살았었냐며 불쌍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당혹스러웠다. 영하 17도의 날씨에도 반팔티셔츠를 입을 정도로 따뜻한 아파트에서 자라는 아이에게 무엇을 기대했던 것일까?

  텃밭에서 저녁거리로 싱그럽게 자란 가지와 오이를 톡 따던 엄마, 내 다리 사이에 엉겨 붙던 고양이 가족이 있던 그때 그 집이 그립다, 아주 많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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