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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날기록 Dec 31. 2020

게임회사 권고 퇴사 전말서




남편이 판교 게임회사에서

보기 좋게 잘리고

새직장으로 옮긴 지 2달이 되어간다.

판교에 있는 모 게임회사에서

어떻게 잘렸냐 하면

게임 출시를 앞두고 팀장의 무리한

야근과 주말출근 압박에

난 못 하겠다 배 째라

게임회사 놈들아~ 개겼더니


게임 출시 며칠 뒤

팀장이 조용히 부르더니


이번 주 금요일까지만 출근하십시오


1달치 월급 나갈 거고요.

남은 휴가 환불되고요.

실업급여 신청 가능하고요.

복지비 얼른 다 쓰시고요.


-판교 모 게임회사 팀장 놈-


이렇게 심플하게 잘렸다.

구체적인 사유도 없다.


권고 퇴사를 당하면

남은 휴가를 돈으로

돌려받는다는 것도

이번에 알게 되었다.


게임회사는 야근을 한다는 전제하에

업무 스케줄을 잡는데

게임 만드는 일이 유기적으로 얽혀있고

다른 팀에서 일이 와야 작업을 하는데

야근, 주말 출근하면서까지

한없이 대기해야 하는

상황이 너무 싫었단다.


남편은 회사 일 진행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아

게임 출시되면 보란 듯이

사표를 제출하고 나가려고 했다.

아는 형을 통해

다른 회사로 이직할 계획이었는데

코로나 사태로 3월에 잡혀 있던 면접이

계속 미뤄지는 상황이었다.


남편은 자기 발로 뻥 차고 나가야 하는데

회사에서 쫓겨나는 꼴이 되자

분기탱천하며 자존감에 상처를 입었다.


나는 남편 속도 모르고

올해 일이 잘 풀린다더니

이렇게 잘 풀릴지 몰랐다며

남편이 그만둔다 말하기 전에

팀장이 먼저 말해줘서

타이밍이 얼마나 절묘하냐며

이건 조상님이 도왔다며

나만의 방식으로 위로했다.


한편 나는 나대로 바빴다.

남편이 이직할 계획이어서

복지비를 안 쓰고 있었다.

복지비로 뭘 질러야 하나?

이런 비상사태에는현금화할 수 있는


백화점 상품권이 최고 일등 천재지.

현대백화점 상품권을 살까?

신세계백화점 상품권을 살까?

1박 2일 고민했다.


판교 현대백화점을 염두에 두고

현대백화점 상품권이 좋을까?

이마트 등 사용범위가 넓은

신세계 상품권이 좋을까? 


신세계 상품권이 600원 더 비싸길래

중고시장에서 경쟁력 있겠다 싶어 샀는데

당근 마켓에서는

현대 / 신세계 / 롯데 상품권이

같은 가격에 거래되고 있었다.



상품권은 현금과 같기 때문에

거래할 때 고민이 된다.

상품권을 먼저 건넬 것인가?

돈을 먼저 받을 것인가?

하나 둘 셋 세고

동시에 교환하자는 것도 웃기고

나는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서

상품권을 거래할 때

운동화를 신고 나간다.

사람을 못 믿으니

이렇게 피곤하게 산다.



남편은 무너진 멘털 회복을 위해

1달 정도 백수생활을 하다가

역삼동 새직장으로 출근했다.

지하철 타고 버스 타고

꼬박 1시간이 걸리는 힘든 출퇴근길과

아직도 상처 입은 영혼이 회복되지 않아

새직장에 적응을 못 하고 있다.


남편은 요즘 나를 보며 자꾸만


'회사 가기 싫다'

'나도 집에서 놀고 싶다'


집에서 노는 사람 불편하게 하고 있다.


친 언니는

'그럼 OO 쉬라고 하고 네가 나가서 일해.'

자격증이라곤 워드 3급 밖에 없는데

시상에 마상에

워드 3급 자격증 폐지된 거 알아요?


하우스메이트로서 같이 돈 버는 

시늉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아

재택알바를 시작하게 되었다.

근대, 내가 돈을 벌기 시작하자

남편이 더 적극적으로

회사를 그만두려고 했다.

집안일하고 애 밥해주겠다는데

1년만 버텨보라고 다독거려놨다.

1년 퇴직금은 받아야지.


남편은 며칠 전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60살 아니 70살까지

다람쥐 쳇바퀴 속을 달리듯

지겨운 밥벌이를 해야 한다는

압박에 죽고 싶다고 했다.

그 말 듣고 너무 미안해서

생존 이혼을 해줘야 하나 생각했다.

정 힘들면 그만두라고 했다.

굶어 죽기야 하겠나.

또 다른 살 길이 열리겠지.


몇 년 후 거짓말처럼 

길은 새로 열렸고 

 그 길은 더 넓고 보드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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