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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시유랑자 Dec 20. 2021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

귀국 후, 그리고 엄마에 관한 이야기

약 5년 만에 한국에 돌아왔다. 돌아오기 전에 대충 엄마의 건강이 좋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정확한 병명은 나오지 않았고 아직은 모른다고 했다. 급격한 체중 감소가 있단 이야길 들었고 혹시나 했는데 불안은 현실이 되었다. 급히 귀국길에 올랐었다. 하필이면 코로나가 창궐하던 2020년 4월이었다. 백방으로 비행기를 알아보는데 스웨덴 역시 코로나가 심각한 상황이었고 유럽은 전례 없는 사태로 국경을 닫고 있었다 기차 타고 강남에서 강북 넘어갈 정도로 가까웠단 스웨덴 덴마크도 봉쇄할 정도이니 말이다. 예약하는 비행기가 족족 취소되었다. 마음이 초초했고 가까스로 비행기를 잡았지만 한 5번 정도 이상 취소가 된 것 같다. 가까스로 비행기를 예약한 날짜는 7월 1일이었다. 그나마 그 시간이라도 취소되지 않길 바랬다.


21세기에 한국에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날이 올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10 시간 넘게 비행기를 타고 가야 하는 걸 제외하면 한국은 그래도 언제든 돌아갈 수 있는 곳이었다. 아주 가끔 내가 스웨덴에 있는 동안 혹시라도 엄마가 불의의 사고를 당하면 어쩌지 내가 한국에 갔을 땐 너무 늦으면 어쩌지 걱정을 했던 적이 있는데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 사실 대충 엄마 건강이 안 좋은 것을 안건 더 이전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오빠나 엄마 둘 다 큰 병은 아니겠지 하고 나에게 사실을 숨겼다고 했다. 괜한 걱정이나 할까 봐. 상대방을 위해서 진실을 숨기는 건 어떤 형식이든 좋지 않다.


간신히 잡아 탄 카타르 항공을 타고 한국에 도착했다. 여러 단계의 방역 체크를 거치고 나는 방역 택시를 타고 집에 도착했다. 별다른 증상이 없어서 집에서 자가 격리자로 분류되었다. 거의 1 만의 재회고 엄마를 안아보고 싶었는데 자가격리 상태라 우리 모녀는  집안에서도 먼발치에서만 얼굴을   있었다. 오랜만에  엄마는 너무 마르고 또한 늙어있었다. 너무 슬펐다. 해외에서 사는  뭐라고 나는  이렇게 일찍 오지 못했나 후회하고  후회했다. 스웨덴에서 사업자를  회사에 일이 들어와서 기뻐한  이케아 본사와 면접을 보고 일을 하기로 한다고 이런 사실조차 모르고 기다리다 좋아한    후회가 되었다.. 엄마는 자가격리를 하는  위해서 식판도 사고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와중에도 잔뜩 해놨었다. 엄마는 내가 자가격리가 끝나는 마지막 3일에 입원을 하고 조직검사를 한다고 했다. 14일의 자가격리가 아주 길게 느껴졌다. 11일째가 되었을  엄마는 조직검사를 한다고 입원을 하고 집에 홀로 있게 되었다.


나는 집을 혼자 쓰면서 집안을 둘러보는데 우리 집이 참 많이 낡았고 짐 정리가 하나도 안되어 있었다. 젊었을 때 엄마는 버리는 것을 참 좋아해서 아빠랑 그걸로 의견이 많이 안 맞았었고 아빠는 쌓아두길 엄마는 버리는 것을 좋아했는데 엄마도 어느샌가 하나하나 쌓아두고 정리 안 하고 낡은 집이 내가 그동안 보지 못한 엄마가 같아서 슬프고 서러웠다. 오빠가 전화로 조직검사 결과가 나오고 결과는 췌장암이란다. 하필이면 암중에서도 그 독하다는 췌장암…. 결과가 나온 날은 13일 자정이었고 14일 아침부터는 엄마가 항암에 들어간다고 해서 보호자가 필요하다고 했다. 나는 자가격리 담당자에게 사정을 이야기하고 5시간만 자가격리 시간을 당길 수 있냐니 안된다고 한다. 결국 낮 12시가 되어 자가격리가 끝났고 나는 영원히 다시는 건강하고 제대로 말할 수 있는 엄마를 만날 수 없었다, 1차 항암 이후 엄마는 자리에서 제대로 일어날 수 없었다 고령에 말기였기 때문이다.


코로나 시국에 병간호는  힘들었다. 간병인과 가족   병원엔 있을  없었고 코로나에 의사들 파업까지 맞물려서 의사조차 만나기 힘들었다. 한참 의사 파업을 하는 동안엔 대학병원 간호사선생님들도 스트레스 최고치여서인지 의사를 찾으면 짜증을 내며 우리도 의사 없어서 힘들어요 라고 했다. 모든 고통환자들의 몫이었다.   항암 날짜를 잡기도 힘들고 병상은 부족하고 몇몇 환자 들은 급한 수술마저 밀렸다. 의사는 엄마에게 남은 삶은 2 달이라고 했는데 엄마는 조금  살고 싶어 했다. 항암을 3차까지 진행했는데 이제 와서 가장 후회하는 부분이다 고령이고(70 이상) 항암  쇠약  진다면 다시  시간으로 돌아간다면 아마도 항암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엄마는 3차까지 마쳤을 때는 대소변도 스스로 처리할  없고 휠체어 없이는 거동이 힘들 정도로 건강이 나빠졌다.


가족끼리 상의한 결과 치료를 중단하고 우리는 호스피스를 알아보다가 가정호스피스라는 제도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았다. 더 이상 병원에 입원하지 않고 우리는 가정 호스피스와 요양사를 고용하여 생활하였다 투병 중 가장 잘 한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엄마는 더 이상 답답하고 힘든 병원 생활을 하고 싶어 하지 않아 했다. 사실 병원도 그건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호스피스 선생님과 간호사 선생님은 참 친절했다. 첫 상담을 갔을 때에도 마치 위로받는 것처럼 성의 있게 보호자에게 자세하게 환자의 상태와 나의 마음 상태도 물어보셨다. 가정 호스피스를 선택하면 주 1회 의사 선생님이 주 2회는 간호사 선생님이 오시는데 그마저도 코로나로 인하여 정부에 착출 되어 의사 선생님은 잘 못 오셨다. 코로나 시국에 아픈 것은 정말 힘든 일이라고 생각이 되었다 그래도 간호사 선생님이 오셔서 건강체크와 상태 체크를 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엄마가 입원하지 않고 집에 있는 그 시간이 그래도 가장 좋았다. 직접적인 낮시간의 간호는 요양사님이 해주셨다. 나는 처음에 오자마자 한국에 있는 회사를 다니게 되었는데 엄마가 아프다는 것을 알기 이젠어 한국의 내 이전 상사와 이미 회사에 출근하기로 했었다 초반에 간호와 회사를 병행하면서 참 많이 민폐였지만 그 시간 도동 안 나의 상사와 회사는 나를 많이 배려해 주었고 지금 생각해도 감사하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근무를 이어갈 수 없었고 퇴사를 하고 엄마를 돌보았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이기에 엄마는 그래도 하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 다 하려고 했지만 너무 쇠약해서 하기 힘들었다. 나는 왜 이렇게 늦게 한국에 왔을까 나 자신을 탓하고 또 탓했다.


점점 쇠약해지는 엄마는 더 이상 집에서 감당할 수 없었다. 나날이 배에 복수가 차 집에 있을 수 없었고 몇 번이나 구급차를 타고 새벽에 가서 복수를 빼고 오기도 했다. 담당 선생님이 입원을 권하셨다. 코로나 시국이라 집에서 돌아가시면 장례절차도 더 복잡해질 거라고 솔직히 말씀해 주셨다. 호스피스 병동으로 입원하고 그곳은 대학병원보다 훨씬 좋았다 병원이 이렇게만 돌아간다면 환자들의 진료나 삶의 질도 올라가겠다 생각했다. 전담 요양사가 상주해 있고 가족들은 환자의 정신적 버팀목만 하면 되었다 그런데 그 시간도 잠시 코로나는 나날이 심해지고 방역 3단계가 되면서 보호자도 더 이상 호스피스 병동에 있을 수 없게 되었다. 오늘내일하는 환자 가족 입장에서 2주는 너무 길었다. 환자 보호자들은 거의 쫓겨났었다. 공익을 위한 일이지만 당사자가 되면 참 힘들다. 나는 매일 병원에 전화하고 요양사 선생님들이 엄마 핸드폰으로 영상 통화도 해 주셨다, 나는 병원에 사정해서 내가 PCR 검사를 받고 음성이 나오면 간호하는 걸 허락해달라고 했고 승인이 난 그날 아침에 병원으로부터 엄마가 위독하니 빨리 병원에 오라는 전화를 받았다. 아침에 피를 토하셨다고 했다. 정신히 혼미해 보이는 엄마에게 엄마 나 누구야? 했더니 엄마는 힘겹게 “딸…”이라고 했다, 그 목소리는 내가 마지막으로 들은 엄마의 목소리였다 크리스마스 다음날은 26일에 전화를 받고 병원에 갔고 병원으로부터 모든 가족에게 연락하라는 이야길 받고 가족들이 왔다. 임종 직전에도 방역으로 인하여 모든 가족은 들어갈 수 없었고 2인씩 교대로 들어갔다 그렇게 27일 새벽에 엄마는 갔다.


간호를 하면서 느낀 건 아프니 엄마는 점점 아기가 되어갔다. 떼쓰고 힘없고 혼자서 뭘 할 수 없고 마르고 작고….. 사람은 죽음이 가까워지면 다시 어린 시절로 회귀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다. 엄마라기보다는 아기 같았다. 엄마는 평생 꼿꼿한 어른으로 일흔이 넘어도 남에게 기대지 않고 자식들에게 짐이 되기 싫다며 투병 직전까지 돈도 벌고 일도 하셨는데 하루하루 아기가 되어갔다. 마치 평생 해보지 못한 어린애스러움을 지금이라도 하는 것처럼…


엄마가 돌아가신 지 일 년이 다 되어가지만 아직도 코로나는 가지 않았다. 전염병이 창궐하면 병이 문제가 아니라 다른 병을 가진 환자들과 가족들도 너무 힘들고 고통스러워진다. 특히 해외살이를 하다가 부모님이 아프게 되면 그리고 그 자가격리기간 동안 무슨 일이 생겨도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다. 길고 긴 겨울 같은 이 시국이 빨리 끝나길 그리고 지금도 어딘가에서 투병죽인 환자와 가족들에게 조금은 더 편한 세상이 다시 빨리 왔으면 빈다. 또한 해외에서 부모님을 걱정하는 분들이 한 번쯤은 생각해 볼 수 있는 글이라 자세히 써 보았다. 지나간 시간과 돌아가신 부모님은 돌아오지 않는다고 한다. 나도 영원히 대신할 수 없는 것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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