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보약

by Sunny

우여곡절 끝에 8년 만에 지어진 아파트에 입주해보니, 앞집은 벌써 이사를 와 있었다.

정이는 나와 엘리베이터를 옆에 두고 마주 보는 앞집에 살았다. 우리는 동갑 나이에 남편들도 동갑. 그녀에겐 아들 둘, 난 아들과 딸. 내 아들과 정이의 작은 아들은 동갑에 동창. 종교도 같은 가톨릭. 우리는 이렇게 이웃이 되어있었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남편들 출근과 동시에 우리는 대문을 열어젖혔다. 약간의 과장을 더하면, 우리 집 거실과 정이네 거실은 공유 지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정이는 예쁜 얼굴에 키도 크다. 김밥과 햄버거를 아주 잘 만들었다.


경상도 진해가 고향인 희야에게는 신부인 외삼촌이 계셨다. 그래서인지 그녀는 신앙적으로 얼마나 우리를 성스럽게 만들었는지, 우리는 그녀의 집에 모여 기도 생활을 정말 열심히도 했다. 물론, 난 모태신앙이긴 하지만 그렇게 열심히 기도해 본 적이 없었다. 우리는 가끔 밤에 기도 모임을 하고 나면, 동네 근처에 있는 낡은 버스로 꾸민 국숫집에서 따끈하고 국물 맛 시원한 가락국수를 먹으며 깔깔 호호 즐거웠다. 희야는 발도 넓어 아는 사람이 많았고, 말솜씨도 좋아 경상도 사투리로 쏼라거릴때면, 우리의 배꼽은 제자리 찾기가 힘이 들 정도였다. 남의 고통이 자기의 것 인양, 친구들의 어려움은 자기가 해결해야만 한다는 듯 발 벗고 나섰다.


애자 언니의 맵시와 솜씨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병뚜껑으로도 예쁜 액세서리를 만들 정도로 솜씨가 좋았고, 반짝이 실로 수세미 공주를 만들어 나누어 주는 일은 다반사였다. 소녀의 감성을 가졌던 언니였기에 네다섯 살이나 적은 우리들과 너무도 잘 어울렸고, 언니의 재치와 지혜로움은 우리가 감탄할 정도였기에 우리가 믿고 따를 수가 있었다.

언니의 쉰 살 생일 땐, 언니가 너무 슬퍼해서 우리가 환갑잔치 아닌 쉰 갑 잔치를 열어야겠다며, 언니를 웃겨드리기도 했다. 그랬던 세월이 벌써 우리들 나이도 환갑을 한참 넘겼으니, 세월은 정말 유수와 같이 흘러버렸다. 참 그리운 시절이다.


자야는 큰딸 아래 늦둥이 아들이 있어서, 우리 모임에 그 아들이 어린이집을 갈 때까지 늘 데리고 왔기에 우린 그 아들을 자야의 백(가방)이라고 불렀다. 자야는 아침이면 늘 시어머니의 안부 전화를 받아야 했다. 겉으론, 다이아몬드 스텝을 잘 추던 멋쟁이라 외형적으로 보였지만, 속은 소심한 구석이 많았던 친구라, 시어머님의 길고 긴 말씀을 다 들어야만 외출이 가능할 정도였다. 훗날, 자야가 오십에 치매에 걸리자 우리는 시어머님의 굿모닝 전화를 거의 매일 얌전하게 받아낸 결과가 자야의 치매를 촉진한 게 아닌지 의심하기도 했다. 그 자야는 코로나가 극성을 부리던 두 해 전에 결국 우리 곁을 먼저 떠나갔다.


우리는 지금은 작고한 요리 연구가 '임지호 선생'을 모셔서 요리도 배웠다. 그분한테 우리는 속칭 1호 제자였다. 당시엔 약간 소문이 나기 시작한 요리사였는데, 불과 몇 년 안 지나선 만나기 쉽지 않은 분이 되어버렸다. 그분이 양수리에 처음 개업한 식당 '산당'에 초대받는 영광을 누리긴 했지만, 그 후엔 요원한 분이 되었다. 작년, TV에서라도 가끔 만나던 임 선생의 별세 소식은, 잠시나마 함께 요리하며 즐거웠던 그 옛 시절 생각에 잠기게 했다


우리가 함께 이웃에 살고 있었다면, 함께 문상이라도 가지 않았을까?

하루는, 신학기를 맞아 아이들 옷을 싸게 사자고 동대문 밤 도매 시장에 가기로 약속을 했다.


“동대문 시장에 그냥 가면 일반 소매가로 판다더라.”

“장사꾼처럼 보여야 한다는데.”

“소매상처럼 커다란 가방을 가지고 가자.”


누군가의 제안으로 우린 최대한 옷가게 하는 사람처럼 꾸며서 만나기로 했다.

밤 10시에 만난 우리는 모두 커다란 가방을 하나씩 메고 나타났다.

출발!

동대문 시장에 도착한 우리는 많은 인파로 자칫하다간 서로 헤어질까. 열심히 붙어 다녔다.

가방만 커다란 걸 메었지 영락없는 애송이 소비자 모색이었다. 우리 일행에 함께 동행했던 ‘요세피나'는 실을 길게 말아 가지고 왔다.


“자기 그 실은 뭐야?”

“아이들 몸 사이즈 재서 왔지.”

고향이 지방인 요세피나의 모습에서 옛날 어른들께서 사이즈 잴 자가 없을 때 실로 재던 모습이 떠올라 우리는 모두 한바탕 웃음을 웃었다.

그때 요세피나의 '실' 사건은 그 후에도 한참 우리들 웃음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이렇게 우리 다섯은 아이들 키우며 힘들 수 있었던 시절을 인생의 황금기였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너무도 즐겁게 지낼 수 있었다. 그 친구들이 있었기에 내 인생의 행복했던 한 페이지로 기억할 수 있다.


남편의 사업 부도로 내가 젤 먼저 그 아파트에서 이사를 나왔고, 그 후 애자 언니가 용인 동백지구 아파트에 당첨이 돼서 이사를 했다. 거주지가 멀어져도 우리는 서로 날짜를 정해서 자주 만났다. 그 후, 자야는 여동생네와 함께 캐나다로 이민을 떠났지만, 한국에 남은 우리끼리는 집안의 대소사가 아니더라도 서로 연락은 하고 지냈지만, 정작 만남은 정이가 한국에 오는 때가 우리 만남의 날이 되었다.

그러나, 내가 삼하리에 집을 짓고 이사할 무렵, 희야는 제주도에 집을 지어 이사를 했다. 그러자 우리는 1년에 한 번도 만나기 어려운 상황이 되어버렸다.


얼마 전 정이가 한국에 왔다. 우리는 함께 제주도 희야를 만나러 가기로 했다. 7년 만에 만나는 것 같다. 지금부터 설렌다. 너무도 보고 싶은 친구들이다. 우리가 친구로 지낸 세월이 벌써 30년 가까이 돼간다. 벌써 비행기표와 숙소에 랜트카까지 예약을 해 두었다. 하루하루 친구들 만날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내 스케줄 몇 개를 이미 취소하거나 미루어 두었다. 나이가 들어가고 코로나로 앓고 나니 그 친구들과 모두 함께 만날 수 있는 날이 앞으로 얼마나 더 있을까? 하는 목메임이 느껴진다.

친구라는 이름으로 함께한 그녀들은 내 삶의 동반자이자 보약이다. 감사한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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