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간 지가 오래되었다. 이곳저곳 돌아다니기를 좋아하는 나지만, 아이를 낳고서는 왠지 엄두가 나지 않았다. 아이 준비물, 낮잠 시간, 차량 이동거리 등 아이를 위한 고려사항이 한두 개가 아니었으므로 여행 계획을 세우기도 전에 벌써 지쳤다. 아이가 좀 더 크면 함께 다닐 수 있는 기회가 많이 있겠지 위로하며 여행 못 가 억울한 마음을 애써 달래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게다가 나는 아이 생후 17개월까지 모유 수유를 했기 때문에 혼자 여행을 다녀오는 것도 불가능했다. 혼자 떠난 마지막 여행이 언제였더라... 임신한 걸 알게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묵호에 다녀왔었다.
그래, 묵호. 다녀온 지가 불과 2년 정도 지났을 뿐인데 묵호라는 이름도, 그 여행에서의 기억도 가물가물했다. 임신과 출산이라는 내 생의 격변기(?)를 거치면서 아이에게만 몰두하는 시간을 보내다 보니 나는 출산 전이나 결혼 전의 내 생활을 떠올리면 오래된 옛날 사진을 꺼내는 것처럼 아득하고 생경한 느낌이 들 때가 있다. 나의 뇌는 육아를 위해 리셋이 된 것인가. 그립기도, 돌아갈 수 없기에 때로는 서글프기도 한 과거의 시간들. 묵호에 가고 싶었다. 혼자의 여행을 즐기는 예전의 나를 다시 만나고 싶었다.
떠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기차표를 예약하고 몇 안 되는 준비물을 가방에 챙기고 집을 나서면 그만이었다. 이렇게 쉬운 일이었는데. 임신했을 때 찾아왔던 묵호는 앞으로 오랫동안 여행을 떠나지 못할 나를 위해서, 육아에 파묻혀 살아갈 나를 위해서 미리 선물을 주는 느낌의 여행이었다. 이번에 가는 묵호여행은 아이의 스케줄에 맞추느라 나 자신을 돌보지 못했던 날들에 대한 보상임과 동시에, 단 하루라도 육아는 모두 잊고 나에게만 온전히 집중하는 시간이었다. 기차 안에서 바라보는 창 밖 풍경, 손에 든 책 한 권, 비스켓, 커피우유... 하루종일 기차만 타다 집으로 돌아가도 좋을 만큼 행복했다. 떠나오길 잘했다.
바다는 여전히 예뻤다. 붐비지 않을 만큼 적당한 수의 사람들이 오갔다. 사람들이 왜 바다를 좋아하는지 나는 이제 알 수 있다. 바다가 없는 곳에 살기 때문에 단순히 바다를 동경하는 것도 있지만, 바다를 보고 있으면 그냥 기분이 좋아진다. 다 품어줄 것 같은 거대한 존재,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 한결같은 바다. 한참을 바라보다가 바다를 배경으로 셀카도 한 장 찍어 보았다. 몇 년 전에 친구와 함께 찾았던 안목 해변에서 모래사장에 신문지를 대충 깔고 누워 한참동안 시간을 보낸 적이 있었다.누워서 잠깐 잠들기도 했다가, 하늘을 보다가, 아무 생각 없이 눈 감고 명상을 하기도 했다. 오랜 시간이 지나도 그 때의 풍경과 파도소리와 바다냄새가 선명하게 느껴지는 걸 보면 바다가 주는 행복이란 것이 얼마나 큰가 새삼 깨닫게 된다. 묵호 바다를 바라보며 쉼 없이 달려온 일년 반 동안의 시간을 반추해 보았다. '잘 지나왔구나, 고생했구나' 바다가 나를 위로해 주었다. 누구보다도 따뜻한 위로였다. 묵호 마니아인 지인이 추천해 준 칼국수집에 가서 홍합장칼국수 한 그릇을 맛있게 먹고,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카페에 가서 자리를 잡았다. 카페 앞에 위치한 행복 우체통에 넣을 엽서를 한 장 가져왔다. 일 년 후에 집으로 배송된다는 엽서. '무엇을 하든 너무 애쓰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가 그저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메세지를 적었다. 나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이었다.
묵호에서의 네 시간을 보내고, 세 시간 동안 기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요즘 아이의 취침 시간이 자꾸 늦어져서 아이를 재우고 나면 내 시간이 없는 것에 너무 힘들었는데 이번 여행으로 충분한 보상을 받은 것 같았다. 앞으로도 자주 떠나야겠다. 남편은 애 보느라 고생하겠지만, 내가 여행을 통해 컨디션이 더 좋아져 돌아온다면 그것은 남편에게도 좋은 일일 테니까 흔쾌히 오케이할 거라 믿으며. 다음 여행지는 어디가 될까. 바다에 다녀왔으니 이번엔 공기 좋은 숲으로 한번 가 볼까. 떠나고픈 마음만 준비되면 언제든 어디든 가 보자, 육아는 잠시 고이 접어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