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실에서 TV만 사라졌을 뿐인데
TV 없는 거실이 가져온 변화들
난 TV를 꽤 좋아하는 편이다. 온종일 TV를 틀어놓고 사는 정도는 아니지만, 좋아하는 예능 프로그램 들을 보며 웃고 스트레스 푸는 게 나의 오랜 즐거움이었다. 결혼하고 나서는 남편과 같이 TV 앞에 나란히 앉아 야식을 먹으며 저녁 시간을 보내는 것이 일상이었다. 서로 보고 싶은 채널이 달라 가끔 티격태격한 적은 있어도 대체로 평화로운 나날이었다. TV를 보다 피곤해지면 씻고 잠드는 평범한 하루들, 그렇게 몇 개월의 시간을 보냈다.
결혼하고 3개월 후에 임신을 했다. 생각보다 일찍 찾아온 아이 소식에 물론 기쁘기도 했지만 얼떨떨한 느낌과 막막함이 더 컸다. 모르는 길을 가는 데는 언제나 불안이 함께하는 법. 첫 아이 만날 준비를 하는 모든 부모들이 그렇듯이 우리 부부도 둘에서 셋으로의 변화를 위해 본격적인 준비 태세에 들어갔다. 도서관에서 각종 육아서를 빌려오고, 출산 및 육아에 필요한 물품들을 검색하기에 하루가 모자랄 지경이었다. 그리고 육아에 관한 대화가 자주 이루어졌다. 그중에 하나가 아이의 TV 시청 문제였다. 그 무렵 책 《디지털 세상이 아이를 아프게 한다》을 읽고 있는 중이었는데 미디어의 노출을 최대한 늦추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어느 날 남편에게 불쑥 제안해 보았다. '우리 TV를 없애는 건 어떨까?' 남편이 바로 오케이를 하는 바람에 살짝 당황스럽기도 했다. 이야기는 꺼냈지만 실천하는 데는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TV를 끼고 살던 우리가 과연 TV 없이 생활할 수 있을까? 당장 없애는 건 아쉬우니 그대로 거실에 두고 아이 있는 데서만 안 켜면 되지 않을까? 가끔 TV가 생각날 수도 있으니 아예 집에서 없애기보다는 작은방으로 옮겨놓으면 어떨까? 지금 갖고 있는 TV는 팔고 나중에 필요하면 작은 걸 다시 살까? 줄줄이 소시지처럼 질문들이 따라 나왔다. 그리고 머리가 아파왔다. 우리가 그리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한 건 그동안 TV가 우리에게 차지하는 비중이 그만큼 컸기 때문이리라.
며칠에 걸친 열띤 논의 끝에 TV를 작은방으로 옮기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혼수로 해 온 물건인데 벌써 처분하는 게 아쉽기도 했고, 세상 돌아가는 걸 알려면 가끔 뉴스도 봐야 하고 육퇴(육아 퇴근) 후에 재밌는 드라마나 예능을 가끔이라도 챙겨보는 재미도 잃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TV가 거실에서 없어지고 나니 그야말로 휑한 느낌이었다. TV 없이 일주일은 버틸 수 있을까, 다시 거실로 옮겨오는 불상사가 생기는 것은 아닐까.
TV가 없어지고 나서 느낀 가장 큰 변화는 저녁 시간이 참 길다는 것을 체감하는 것이었다. 채널 이리저리 돌려가며 TV를 보다 보면 두세 시간이 훌쩍 지나가 있는 것은 자주 겪어본 일이었으니, 이제 그 비어있는 시간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가 관건이었다. 처음에 나는 TV가 없어지고 나면 너무 심심할 거라 생각했다. 남편과 마주 보고 앉아 두세 시간 동안 대화하기에도 긴 시간이고, 운동을 다녀온다고 해도 잠들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남아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느 날부터 자연스럽게 책을 집어 들기 시작했다. 사실 TV가 있을 때는 독서는 후순위로 밀려나는 것이 일상이었다. TV를 보다가 재미있는 프로가 없거나 따분해지면 그제야 책을 조금 들춰보는 식이었다. 그래서 다 읽지도 못하고 반납하는 책들이 많았고, 사놓고도 안 읽고 서재방에 쌓아두는 책들도 가득했다. 그런데 이제 독서를 방해했던 TV가 사라지니 나는 자연히 다시 독서모드로 전환하게 되었다. 예전처럼 찔끔찔끔 읽는 것이 아니라 긴 호흡으로 읽게 되니 이해도 깊이 있게 하게 되고 독서량도 급증하게 되었다. 내가 읽은 책을 남편에게 추천하기도 하고 책 속의 질문을 두고 서로 의견을 이야기하기도 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은 늦은 저녁나절, 남편과 식탁에 마주 앉아 책을 읽을 때이다. TV가 없어 심심할 거라던 나의 생각은 기우였음을 나는 곧 알게 되었다.
아이가 태어나고 나서 TV가 없는 거실 공간은 책으로 채워졌다. 6개월 즈음부터 책을 읽어주기 시작했는데 도서관에서 대여한 책, 선물 받은 책, 내가 구입한 책 들로 서가가 풍성해졌다. 아이가 어렸을 때는 내가 일방적으로 책을 선정해서 읽어주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아기가 원하는 책을 서가에서 골라와 함께 읽게 되었다. 책 읽어주는 것이 가끔은 목이 아프기도, 귀찮기도 하지만 그림책 읽는 시간이 아이와 내가 교감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하고 소중한 기회라고 확신한다. TV를 치움으로써 얻은 행복이다.
우리 집 거실에서 TV가 사라진 지 2년이 지났다. TV가 사라진 곳에는 대화와 독서가 자리를 채워주었고 우리는 전보다 훨씬 즐거워졌다. 책을 읽으니 대화할 주제가 다양해졌고, 꾸준한 독서는 마음도 안정되게 해 주었다. 지금은 아이가 어려서 엄마가 일방적으로 읽어주는 편이지만, 아이가 점점 커 갈수록 책으로 셋이 함께 소통하고 공유할 수 있는 부분이 많아질 거라는 생각에 기쁘다. '코이'라는 물고기는 작은 대야에 넣으면 작게, 큰 대야에 넣어놓으면 그 대야의 크기만큼 크게 자란다고 한다. 그만큼 환경이 중요하다는 얘기다. TV를 치우고 책으로 가득 채운 거실 속에서 아이도 남편도 나도 크게 성장할 수 있으면 좋겠다. 시끄러운 TV의 소음 대신 가족들의 웃음소리가 들리고, 리모컨 대신 책을 손에 들고 저녁 시간을 보내는 모습이 앞으로도 오래 지속되면 좋겠다. 그래도 TV를 완전히 끊을 순 없으니, 육아 마친 후에 가끔 작은방에 들어와 맥주와 함께 드라마도 볼 거다. 이것 역시 지친 육아에서 내가 놓칠 수 없는 소소한 행복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