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고르고, 다시 육아!
아이의 삶은 내 것이 아니다
며칠간 글을 쓰지 못했다. 브런치를 하게 되면서 글 쓸 생각에 설레는 날이 많았는데 지치고 고된 육아는 모든 의욕에서부터 나를 벗어나게 만들었다. 더 이상 글을 쓰고 싶지도, 읽고 싶지도 않았다. 며칠간 바닥에 축 가라앉아 있었다. 내가 너무 힘들어 보이니 친정 엄마가 당분간 집에 와 있으라 하셨다. 아무리 사랑스러운 손주라도 밥 해먹이랴 놀아주랴 여간 힘든 일이 아닐 텐데도 엄마는 안쓰러운 딸을 위해 손을 내밀어 주셨다.
육아휴직을 얼마나 쓸 것인가를 가지고 오랜 시간 고민했다. 세 돌까지는 엄마와 아이의 애착형성에 가장 중요한 시기라 하니 어떻게든 내가 아이 옆에 붙어서 육아해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그게 가장 이상적이라 여겼고, 나는 엄마로서 그 정도의 희생은 감내할 수 있다고 자부했다. 그런데 요즘 그 결심이 자꾸만 흔들리고 있었다. 참다 참다 아이에게 폭발하는 내 습관이 여전히 고쳐지지 않았고, 36개월은 생각보다 너무 긴 시간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휴직 3년은 역시 무모한 도전인가. 아이를 위한 과감한 결단이었는데 돈은 돈대로 못 벌고 육아로 인한 스트레스는 최고조에 달하고 아이는 그런 엄마 옆에서 상처 받는 결과를 가져오는 건 아닐까. 누구를 위한 육아휴직인가.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로운 지금의 내 상태로 안정적인 육아가 가능하기나 할까.
친정집에서 엄마께 아이 돌봄을 맡기고 나서, 한동안 놓고 있었던 육아책을 다시 집어 들었다. 소아과 의사들의 딱딱한 이론서가 아니라 육아의 고충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평범한 엄마로부터 따뜻한 위로 한마디를 듣고 싶었다. 나를 다시 일으켜 줄 무언가가 필요했다. 양귀자의 소설 《모순》에서는 삶의 힘든 순간을 맞닥뜨릴 때마다 책에서 해결책을 찾는 어머니가 나온다. 나 역시 크고 작은 곡절을 겪을 때마다 결국 나를 다잡아준 건 책이었다. 마음이 삐뚤어지고 뾰족해질 때 좋은 책들을 읽고 나면 다시 초심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번에 읽은 책은 정경미 님의 《엄마도 퇴근 좀 하겠습니다》.
아이의 삶은 내 것이 아님을 인정하고 내려놓아야 한다. 아이의 삶을 내 손으로 써야 한다는 오만과 편견을 내려놓아야 한다. 무언가를 해줄 때보다 내려놓는 것이 훨씬 더 고통스러웠다. '내려놓는 것'은 '포기'가 아니다. 주도권을 아이에게 넘겨주는 것이다. 나는 그저 아이의 뒤에서 아이의 모습을 지켜보기로 했다. 무관심이 아닌 한 발짝 뒤에 서서 바라봐주는 것. 그게 엄마인 내가 할 일이었다. (위의 책, 76쪽)
아이의 삶의 지도를 엄마가 그려주었기 때문에, 내가 정해놓은 길대로 아이가 가 주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오랫동안 그토록 화가 나 있었다. 내 뱃속에서 태어난 즉시 독립적인 개체로서 아이를 대했어야 하는데, 나는 아이를 나의 소유물 또는 분신으로 취급하였던 것이 아닐까. 그러니 내가 정해놓은 양만큼 밥을 먹지 않으면 신경질이 나고, 원하는 시각에 잠들지 않으면 미칠 듯이 열이 받았던 것 아닐까. 속은 터질지언정 아이에게 그 짜증과 화를 날것 그대로 표출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는데. 아이를 아이 자체로 존중한다면, 억지로 해서 안 되는 것이 있다는 것을 내가 이해했다면 그렇게까지 감정이 동요할 일은 없었을 것이다.
나는 '아이에게 주도권을 넘겨준다'는 문장을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다. 하나부터 열까지 엄마가 계획하고 개입하던 나의 모습에서 벗어나, 아이의 생각을 인정해주고 스스로 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엄마로의 변화를 내일부터 시작해 보려고 한다. 언제까지 휴직을 할지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육아를 더 견디지 못해서 도망치듯 학교로 급히 돌아가게 될지, 아니면 나를 다스릴 수 있는 마음의 근육이 길러져 3년의 휴직을 감행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어찌 되었든, 아이와 나를 이해하기 위한 공부는 꾸준히 해야 할 것 같다. 좋은 책에서 위안을 얻고 배운 대로 실천해 보고, 내가 원하는 육아의 방향을 끊임없이 고민하고 수정하다 보면 애 하나쯤 키울 수 있지 않을까. 어차피 완벽한 육아란 것은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