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숨 쉴 공간 만들기
며칠 전, 한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아이 키우느라 한동안 서로 안부도 묻고 지낼 여유가 없었는데 오랜만에 연락이 닿은 것이다.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친구의 목소리는 예전과 다름없이 밝았건만 정작 나에게 털어놓은 이야기는 뜬금없게도 육아로 인한 우울증에 관한 것이었다. 너무 낯설었다. 누구보다도 유쾌하고 긍정적이었던 그녀가 우울증이라니. 내가 기억하는 20대 때의 그녀는 하이톤의 목소리, 뽀글거리는 파마머리, 호탕한 웃음소리, 활짝 핀 꽃처럼 언제나 환하게 웃는 얼굴... 그야말로 긍정 에너지의 아이콘이었다. 주위 사람들에게까지 그녀만의 밝은 기운을 전해 나의 부러움의 대상이었던 그녀에게 우울증이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수식어였다. 무기력, 우울, 슬픔과 같은 단어는 오히려 그녀의 반대편에 있다고 해야 맞았다. 당황스럽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이렇게 유쾌한 사람마저도 우울의 늪으로 끌고 갈만큼 육아가 무섭구나 하는 생각에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담담하게 그녀는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남편에게 아이들을 맡기고 처음 요가 수업을 간 날, 요가를 하는데 갑자기 눈물이 났단다. 어떤 느낌이었을지 대충은 짐작이 갔다. 나도 우리 아이가 백일이 갓 지났을 때 모유 수유 사이의 틈을 내어 카페에서 떡볶이를 한 입 베어무는데 이유 모를 눈물이 대책없이 흘러나와 당황스러웠던 기억이 있다. 내가 먹은 그 날의 떡볶이는 그냥 떡볶이가 아니었던 것이다. 육아로 인한 스트레스, 뭔지 모를 억울함, 감당하기 어려운 엄마의 무게를 잠시나마 내려놓는 데서 느낀 해방감이었을 것이다. 통화의 끝에 친구는 말했다. "유미야, 나만의 시간을 찾아야 돼. 하루 1시간이어도 좋고, 단 10분이어도 좋아. 내가 모든 걸 벗어던지고 오롯이 나만을 위해 쓸 수 있는 시간이 있어야 되더라. 그러고 나서 정말 많이 좋아졌어." 친구가 예전의 웃음을 되찾고 있는 것 같아 다행이라는 마음이 들었고, 동시에 내 시간을 갖기 위해 노력하지 않으면 나도 우울증으로 언제든 힘겨워할 수 있다는 일종의 경고의 메시지로 들렸다.
저녁에 퇴근한 남편과 친구와의 이야기를 함께 나눴다. 깊이 공감한 남편은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소확행 리스트를 적어보는 건 어때? 이게 진짜 도움이 된대." 남편은 평소에도 유명 강사들의 강의를 즐겨 듣는 편인데 요즘 강의를 듣고 있는 조성희 님(마인드스쿨 대표)의 사례를 들려주었다. 그녀는 자기만의 소확행 리스트를 만들어 두고 기분이 정말 좋지 않을 때 리스트에 적은 행동 중 하고 싶은 것을 골라서 했다고 한다. 컨디션이 최악인 경우에는 리스트를 모두 실행하기도 했다고 한다. 예를 들면 커피 우유, 조조 영화 보기, 파스타 먹기를 좋아한다면 커피 우유 먹으며 조조 영화를 보고 영화 관람 후에 파스타를 먹으러 가는 식이다. 신선한 제안이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바닥으로 떨어진 자존감을 회복하고 긍정으로 나아갈 힘을 얻겠구나 싶었다. 버킷리스트를 좋아하는 나인데 왜 요즘은 이걸 쓸 생각을 통 하지 못했었나 모르겠다.
말 나온 김에 나는 수첩을 열어 곧바로 적었다. 책 읽기, 빠다코코낫 과자먹기, 전신 마사지 받기, 브런치 글쓰기, 기차 타기, 김창옥 강사 유튜브 영상 보기, 바다 보기, 동네 서점 가기, 코인 노래방 가기, 박보검 드라마 보기, 밤하늘의 달 바라보기 등 대략 10개 정도가 떠올랐다. 쓰고 나니 웃음이 난다. 빠다코코낫이 뭐라고. 근데 빠다코코낫과 바나나 우유를 함께 먹으면 나는 진짜로 행복해진다. 급속 충전된 느낌이 든다. 언젠가 어떤 책에서 읽은 구절이 생각이 난다. '행복이란 것은 지속적인 감정이 아니기 때문에 커다란 행복을 어쩌다 느끼는 것보다는 작은 행복을 자주 느끼는 것이 훨씬 도움이 된다'고 한다. 그래서 소확행(소소하고 확실한 행복)이라는 말이 유행을 하는가 보다.
이번에 적은 소확행 리스트는 지갑에 넣어두고 다니려 한다. 아이가 밥을 안 먹어 속을 썩일 때, 가끔 내가 너무 불쌍하고 초라하다는 생각이 들 때, 남편에게 화가 날 때(가장 가까운 사람이지만 가끔은 도움 안 될 때도 있으니까), 살이 안 빠져서 한숨이 날 때, 육아가 미친듯이 싫어 어디론가 도망치고 싶을 때, 그 외 아무 이유 없이 무기력해 질 때 나는 이 리스트를 꺼낼 것이다. 나만을 위한 안전지대, 나의 행복을 지켜줄 수 있는 열쇠 정도로 해석하면 좋지 않을까 싶다. 그럼 어떤 리스트부터 실행해 볼까. 박보검이 군대를 갔다 하여 슬펐는데 오늘은 드라마로 그 마음을 달래봐야지, 야호! 덕분에 빡빡한 육아에 조금이나마 틈이 생길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