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청이 없었다 ‘아!!’ 나도 모르게 탄성... 더 단아하고 더 멋졌다
옛 직장동료 Y와 오랜만에 만나 함께 해남 땅끝마을에 갔다.
“ 2~3시간 카페에서 만나 차 마시는 것보다 짧게 1박 2일 여행 다녀오면 어때?”라는 말에
전날 밤 9시에 출발해서 다음날 점심식사 무렵 돌아왔다.
세컨드 하우스에 다 있으니 “그냥 잠옷 하고 칫솔만 가져가면 된다” 는 말에
집에 있던 와인 1병과 두부과자만 챙겨 출발했다.
도착한 날은 그동안에 못다 한 이야기를 꺼내 놓느라 새벽이 되었다. 바다 가까이에 있는 집 근처 곳곳을 돌아다녀보자고 했다. 그중 하나가 해남군 송지면 서정리 달마산에 있는 미황사였다. 일주문과 사천왕문, 천천히 계단을 올라 자하루를 지나 대웅보전에 이르렀다.
나도 모르게 ‘아~~!!’라는 탄성이 나왔다.
“어떻게 이처럼 색도 문양도 깨끗이 없을 수 있지?” 일반적으로 부처가 모셔진 대웅보전은 가장 화려하고 온갖 문양이 그려진다. 반면에 오랜 시간의 비바람에 색이 씻겨져 단청이 사라진채... 단청이 없는 대웅보전이라니!! 그 어떤 단청보다도 더 단아하고 더 아름다웠다.
단(丹) 청(靑)은 붉은색과 푸른색을 나타내는 한자어다. 오래된 사찰이나 궁궐에 갔을 때 마주하는 목조건축물의 벽과 기둥, 천정 등의 목조건축부재에 화려한 색감의 그림과 무늬를 그리고 색을 입히는 기법을 말한다. 단청의 어원은 붉은색과 푸른색이지만 노란색, 흰색, 검은색을 기본으로 사용해 화려함과 종교적 위엄을 표현한다.
우리나라 단청은 삼국시대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한다. <삼국사기> <옥사조>(屋舍條)에 의하면 귀족의 등급에 따라 단청의 규범을 마련, 제한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왕이 될 수 있는 최상위 신분층인 성골(聖骨)은 건축 규모, 장식에 제한이 없었으나 특히 진골(眞骨)부터는 집을 지을 때 단청에 사용되는 모든 색을 의미하는 오채(五彩)를 건축 채색에 사용하는 것을 금하였다고 한다.
단청에는 선조들이 꿈꾸던 이상 세계가 담겨있다. 화려하고 아름다운 단청은 화엄 연화장의, 화장의 개념을 넘어서 의식을 부여하는 작업 즉, 법전이나 법당에 권위와 위엄을 부여하거나 교리를 이해시키기 위한 벽화로 표현되기도 한다, 또한 실용적으로 비바람에 나무가 썩지 않도록 해주는 역할을 한다. 천연물질 안료를 써서 색 자체가 바래지 않고 오랜 기간 색을 보존할 수 있도록 했다.
그렇지만 이러한 모든 현실적인 의미를 넘어 아주 투명한 지금 있는 그대로의 대웅보전의 모습이 그냥 보존될 수는 없는 걸까?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미황사를 다녀온 뒤 일주일 후에 나 혼자서 미황사를 다시 찾았다. 대웅보전을 찬찬히 오래도록 다시 보고 싶어서였다.
대웅보전 안으로 들어갔다. 외부와 달리 내부에는 단청이 은은하게 살아있다. 연화, 학, 모란 등 일반 단청문양 외에 다른 사찰에서는 그 실례가 드문 천불도(千佛圖)가 있다. 비바람에 씻기지 않아 단청이 사라지지 않았지만 시간이 지나며 더해진 깊이감 느껴졌다. 대부분 단청을 한 사람의 이름이 전해지지 않는 반면에 이곳 미황사는 ‘무등산인단확야(無等山人丹艧也·무등산 사람이 단청을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법당을 청소를 하고 게시는 스님에게 물었다
“대웅보전을 전면 해체 보수한다면서요?”
“예~~”
“복원하면 단청이 다시 입혀지는 거겠죠?”
“그러겠죠 아마”
단청을 입히지 않고 보존할 수 있는 방법이 정말 없는 걸까? 단청을 입혀야만 한다는 것... 이 또한 강박이 아닐까 생각한다.
비, 바람, 오랜 시간이 반복되고 중첩되며 이루어진 자연의 색, 결은 그 어떤 선명한 색상보다도 아름답다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것은 용기가 필요하다
하지만 진정한 삶의 행복은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임’에 있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남을 있는 그대로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변화를 일으킵니다
(...)
완벽하지 못한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완벽해진 것과 같습니다
다른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사랑의 표현이며 변화시키는 힘입니다
(...)
사실은 다 괜찮습니다
용수스님,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중에서
대웅 보존을 단청 없이 보존하는 것은
특별하게 우리 삶과 격리되어 따로 있는 부처를 넘어
아주 보통의 삶 속에 존재하는 부처의 삶... 우리의 삶의 목표가 있는 그대로의 존재를 받아들임, 귀하게 여겨야 되는 것임을 온몸으로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