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공간, 장소’를 찾아서

뿌리 뽑혀... 정읍으로 간 광주‘권번’

by 일상여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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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특정한 장소를 통해서 세계를 경험한다.


지리학자 에드워드 렐프(Edward Relph)는 그의 책 <장소와 장소 상실>(Place and Placelessness)에서

말했다.

“내 시간과 장소의 정직한 목격자가 되기 위하여 이 책을 썼다” ”

그는 또 “나는 장소의 혼과 장소 감, 양자를 모두 훼손하는 사회적, 정신적 과정들이 존재하며, 이것들이 지배하는 세계는 어떤 방식으로든 빈곤해진다고 변함없이 믿고 있다”라고 말했다.


지금 진행 중인 광주 구시청사거리 기록화 사업. 장소가 단지 사물이 위치한 ‘어디’가 아니라 위치 이상의 것임을 전제한다. 이곳에서의 기억, 경험과 함께 현재의 꿈과 상실의 뒤섞임을 바탕으로 한다. 장소들에 대한 기억의 고착화를 경계한다.


근현대 관련 자료들을 보다가 광주 권번에 대한 내용들을 다시 살폈다. 지리적 범위로 보면 기록화 사업 범위가 아니어서 접어 둘까 싶다가도 개인적으로 관심이 사그라들지 않았다. 권번에 대한 기록의 왜곡, 인식차가 크다는 생각 때문이다,


예술가인 친구 k에게서 해체된 광주 권번 상량문 등이 전북 정읍에서 이축(다시 지어짐)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아침 일찍 친구 K 와 정읍으로 향했다. 친구가 G 예술고 교사로 근무할 당시에 권번에서 지내신 분에 대한 추억을 말했다.


“머리카락 하나도 흐트러짐이 없었어”라고 회상했다.



1994년에 첫 발간, 2014년에 증보판으로 발간된 박선홍 선생의 <광주 1백 년 2> 에는 광주 권번이 등장한 시기, 생활상 등이 수록되어있다.


2016년 전남대 정경운 교수가 집필한 국학 연구론 총 제18집에는 ‘근대기 광주 권번 운영의 변화과정 연구’가 실렸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통감정치 하에 있었던 1908년 9월, 관기의 소할 관청이 궁중악을 담당했던 장악과에서 경시청으로 옮겨지게 되는데, 이는 기생들에게 대대적인 변화를 예고한 것이었다. 기생은 더 이상 가무 음곡을 보유한 예인이 아닌, 단속과 관리의 대상자로 전락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소할 관청의 변경 직후인 9월 15일에 일제는 <기생 및 창기 단속 시행령 제정건>을, 25일에는 경시 청령 제5호 <기생 단속령>과 제6호 <창기 단속령>을 발표한다.


이어서 그동안 관기, 여령(女), 기생, 삼패(三牌), 창기, 색주, 무명 색, 상화실(賞花室)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던 이들은 기생과 창기라는 두 명칭으로 단일화된다고 말한다.


2010년 황미연의 박사학위 논문 <전라북도 권번의 운영과 기생의 활동을 통한 식민지 근대성 연구>에는 권번과 기생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일제강점기에 설립된 각종 공교육 기관은 서양과 일본 중심의 예술교육에 치중하는 한편, 재래의 전통예술 전승과 교육에는 무관심하였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권번은 수많은 명인 · 명창 · 명무들의 활동공간으로 자리 잡아왔고, 권번 기생들은 권번에서 예술적 기량을 연마하고 전개하였으며, 학습과 생계를 실질적으로 보장받으면서 대중적 명성과 수익을 확보하였다. 기생 조합과 권번은 기생들의 종합예술교육공간으로 다채로운 활동의 중심부에 있었으며, 기생들의 대사회적 위치를 제고시킨 기관이었다.’


전통문화가 사멸의 위기에 처했을 때, 기생은 전통예술의 명맥을 유지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고 말한다.


문학평론가이자 역사학자 임종국은 그의 책 <밤의 일제 침략사>에서 권번은 근방의 한국식 표기라고 말한다. 일본에서 기생, 창녀를 유숙시키면서 주문에 응해 출장, 매음을 하게 하는 오 끼야와 비숫한 기능을 하였으며, 화대 계산까지 맞게 된 관청을 겐방이라고 했다 한다.


권번에 대한 정의, 학문적 연구와 경험들 사이에서 생각한다. 권번에 대한 논의는 아직까지 진행 중. 가능한 한 우리가 경험하고 인식하는 범위에 한정하지 말고 그 의미와 정체성의 범위를 넓혀야 함이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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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정읍 산외면에 있는 고택문화체험관(옛 권번 문화예술원) 고혜선 원장과

다탁을 마주하고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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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은 해어화(解語花) 즉 ‘말을 알아듣는 꽃’으로도 불리잖아요.

그런데

“해어화란 이름 속에는 애잔함이 있다”라고 내가 말문을 열었다.


고혜선 원장의 이 목소리가 약간 격양되었다.


“꽃이 아름다운데... 말까지 알아듣는다는 건 ‘결정체’ 아닌가요? 애잔하다뇨!!”


“권번은 월사금 내고 다니는 기숙학교였어요


예술인을 길러내는 학교였어요”


그렇다.


무의식적으로 나도 ‘애처롭다’고 대상화하고 이해하고 있었던 건 아닌가 생각해본다.


광주권 번은 고혜선 원장 집안의 소유였다고 했다. 지난 2007년 광주에 국립 아시아 문화전당이 들어서면서 광주 권번 한옥이 헐리게 되자 건물을 정읍에 이축한 후 권번 문화예술원이라는 이름을 쓰려고 했는데 정읍시와 논의 끝에 고택문화체험관이라는 현재의 이름을 사용하게 되었다고 한다.


지금도 크게 달라지진 않았지만 당시에도 권번 그리고 기생에 대한 인식차 때문이다

.

권번 기생들은 노래, 춤, 악기, 시(詩), 화(畵) 등 예능과 교양을 갖춘 예인(藝人)으로 권번이 오늘날의 예술교육기관이었다는 역사적 가치와 기억에 대한 왜곡 때문이다.


고혜선 원장이 전북 정읍시 태인 출신이자 대표적인 예인(藝人)으로 일려 진 ‘소란 김옥진의 춤’을 복원한 이야기 또한 들려줬다.


”소란 김옥진의 안무가 자세히 그려진 무보(舞譜)를 구입하게 되었고 춤사위와 복식을 고스란히 재현했다”라고 말했다.


우리는 이론적으로 직관적으로 의미 있는 일이다, 그렇게 해야 한다. 하면 좋겠다고 말하지만 말과 생각이 실행으로 옮겨지기란 쉽지 않다. 여러 이유가 있게 마련이다. 그렇지만 고혜선 원장은 주춧돌로 쓰인 청석 8개까지 모두 그곳에 가져와 단순히 복원하는 차원이 아닌 실제적 삶이 이뤄지는 친밀한 공간으로 배치했다


한옥 건물이 원형 그대로 복원되진 않았지만 안채와 사랑채, 행랑채, 별채 등의 곳곳에 해체된 재료들 모두가 남김없이 쓰였다. 그동안 경험되고 지각된 공간과는 조금씩 다르게 변화되었지만 의미 있는 공간으로 새롭게 창조되었다.
무엇보다 관조적이기보다는 일상적인 공간으로 재창조되었다는 점에 내 마음
사로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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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문화체험관 곳곳에 양귀비꽃 그림, 양귀비꽃 자수 등이 눈에 띄었다. 색감이 선명하면서도 부드러운 느낌이다. 양귀비는 고혜선 원장이 좋아하는 꽃이라고 했다


기록은 어떠한 사실에 대해 그것이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더라도 진실이라고 믿게 하는 힘을 지닌다. 기록은 상황에 따라 때론 권력에 의해 과장되거나 왜곡, 축소될 수 있다.


타자에 의한 기록은 재해석되고 재구성된다.


그러하니

나의 일상, 실제적 나의 삶을

스스로 기록하고 남기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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