➁ 나는 지금 어디에 있지? 모든 것이 끝났다. 잠시 안녕
그동안 나는 한 권의 책을 완독 하기보다는 서너 권의 다른 책들을 병행해서 읽곤 했다 주로 일 관련 책들은 객관적인 어조, 논리적이고 간결한 표현들이 많다. 집중해서 읽어야 하는 책들이다. 그러다 보니 책 읽는 사이사이에 가볍게 숨 고르기 하듯 읽을 책들을 배치해 둔다. 그 습성이 남아 지금도 책을 볼 때면 책을 보다 덮고 또 다른 책을 보곤 한다.
어제는 박빙이던 20대 대선이 끝났다. 3월 9일 오후부터 3월 10일 새벽 3시를 넘어 초초박빙이 계속될 때... 초초함, 안절부절, 서성이며 TV 개표 방송을 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를 다시 꺼내 이어서 읽으며 마음을 달랬다.
소설 속 미도리는 차가운 맥주를 홀짝이며 한 번에 네 가지쯤 되는 요리를 만들고 있다. 냄비에서는 뭔가가 끓어오르는 소리가 들리고 생선 굽는 냄새도 난다.
와타나베는 미도리가 요리하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인도의 타악기 연주자들이 악기를 연주하는 모습을 떠올린다.
‘이쪽에서 조림 간을 보는가 싶더니 도마 위에서 뭔가를 탁탁 다지고, 냉장고에서 뭔가를 꺼내 접시에 담고 다 쓴 냄비를 슥삭 씻는다(...) 인도의 타악기 주자들이 ’ 저쪽 종을 치는가 싶다가 어느새 이쪽의 돌판을 두드리고, 다시 물소의 뼈를 치는 식이다.
와타나베는 감탄하면서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미도리에게 묻는다.
“내가 도울 건 없을까?”
그러다가 와타나베는 미도리에게 주기 위해 선물로 가져온 수선화를 집 아래층에 두고 온 것을 깨달았다. 신발을 벗을 때 무심코 내려놓고는 잊어버린 것이다
아래층으로 내려가 수선화를 들고 돌아왔다
미도리는 찬장에서 가늘고 긴 유리잔을 꺼내 거기에 수선화를 꽂았다
“나 수선화 정말 좋아해. 옛날 고등학교 축제 때
<일곱 송이 수선화(Seven Daffodills)>를 부른 적 있어”라고 미도리가 말한다.
그녀는 <일곱 송이 수선화>를 부르면서 음식을 접시에 담았다.
미도리의 음식 솜씨는 내가(와타나베)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대단했다. 전갱이 식초절임, 두툼한 계란말이, 양념 삼치구이, 가지나물, 순 채 장국, 버섯밥 간을 엷게 하여 심심한, 완벽한 관서 식이 었다.
미도리 엄마는 서점을 운영하느라 음식 같은 걸 거의 만들어 본 적이 없다. 그런 게 싫어서 미도리는 요리책으로 또는 이것저것 먹으러 다니며 요리를 배웠다고 말한다. 요리책을 통해 도마 고르는 법, 생선 손질하는 법, 가쓰오부시 깎는 법도 배웠다고 한다.
소설로 읽는 요리가 새삼 재밌었다. 일상적이고 다양한, 어쩌면 지루할 수 있는 요리를 하는, 그리고 먹는 행위들이 구체적이고 생생하게 살아난 문장을 읽으면서 나에게 정작 중요한 것은 추상적인 그 무엇이 아니라 일상 속 요리를 하는 것, 먹는 것이라는 인식을 일깨웠다.
새벽 4시쯤 20대 선거 개표가 마무리되었다.
역대 대선 최소 득표차와 득표율 차로 당선됐다. 이재명, 윤석열 후보 간 차이는 247,077표로 역대 초박빙적인 결과였다.
KBS에서 윤석열 국민의 힘 대선 후보를 유력에서 당선 확실로 분석할 즈음
<상실의 시대> 마지막 페이지를 읽었다.
p 567
나(와타나베)는 미도리에게 전화를 걸어, 너와 꼭 이야기하고 싶어, 할 이야기가 너무 많아. 꼭 해야 할 말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 이 세상에서 너 말고 내가 바라는 건 아무것도 없어. 너를 만나 이야기하고 싶어. 모든 것을 너와 둘이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어, 하고 말했다.
미도리는 오래도록 수화기 저편에서 침묵을 지켰다. 마치 온 세상의 가느다란 빗줄기가 온 세상의 잔디밭 위에 내리는 듯한 그런 침묵이 이어졌다. 나는 그동안 창에 이마를 대고 눈을 감았다. 이윽고 미도리가 입을 열었다. “너, 지금 어디야?”그녀는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지?
나는 수화기를 든 채 고개를 들고 공중전화 부스 주변을 휙 둘러보았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지? 그러나 거기가 어디인지 알 수 없었다.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도대체 여기는 어디지? 내 눈에 비치는 것은 어디인지 모를 곳을 향해 그저 걸어가는 무수한 사람들의 모습뿐이었다. 나는 어느 곳도 아닌 장소의 한가운데에서 애타게 미도리를 불렀다.
개표방송 막바지에 TV에서 유시민 전 노무현재단 이사장이 개표현황과 관련해 “이 후보에 위로의 말씀드리고 잘하셨다는 칭찬의 말씀을 드리고 싶다. 사랑한다는 말 드리고 싶다”라고 말했다. 윤 당선인에 대한 축하 인사도 했다. “지지하셨던 모든 분들에게도 축하의 말씀을 드린다”라고 말했다.
‘모든 것’이 끝났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일상을 다시 되찾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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