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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박 Mar 18. 2022

비닐봉지는 유상판매입니다

무인 편의점의 양심 저금통


 열 달 만에 저금통을 땄다. 이름하여 양심 저금통!

 슈퍼마켓이나 유인 편의점에서는 손님이 물건을 사고 비닐봉지를 요구하면 봉지 가격을 따로 받게 되어 있다. 2019년 4월 자원 활용법(1회용 봉투 무상제공 전면 금지법) 시행 이후, 비닐봉지는 무조건 유상이다. 하지만 무인 편의점에서는 '봉지 하나 주세요'라고 손님이 말해도 듣고 건네줄 사람이 없으므로, 알아서 봉지를 사용하고 양심껏 값을 지불해야 한다.


 개업 초기에 나는 비닐봉지를 서비스 개념으로 가져가게 했는데, 남편이 펄쩍 뛰면서 위법이라고 빨리 저금통을 하나 사다가 비치하라고 했다. 그게 야박해 보여서 썩 내키지 않았지만 법을 어길 수는 없으니 다이소에 가서 캔 모양 저금통을 사 가지고 돌아왔다. 저금통 바닥에 양면테이프를 잔뜩 붙여 넘어지거나 분실되지 않게 고정을 했고, 그 위에는 '정부 시책으로 비닐봉지는 유상으로 판매합니다. 20원을 넣어주세요'라고 적었다.


 청소를 하다가 우연히 저금통을 들여다보니 돈이 꽉 차서 입구를 막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열 달 동안 한 번도 열지 않았구나 싶어 뜯어보았다. 돈이 꽤 많았다. 봉지는 겨우 20원이건만 100원짜리와 500원짜리도 들어 있어서 놀랐다. 십 원짜리 중에는 작은 사이즈로 바뀌기 전에 쓰던 큰 구리 동전들도 있어서 반가웠다. 아니 잘 쓰지 않는 십 원짜리 자체가 반가웠을지도.



 솔직히 말하면  저금통은  전에 뜯었어야 했다. 생각보다 늦게 뜯은 이유는 저금통이  차지 않아서인데 그만큼 봉지를 그냥 가져간 사람이 많다는 뜻이다. (비닐봉지  묶음은 금세 떨어지곤 했다) 봉지 하나당 가격은 20원을 훨씬 웃돌지만 처음부터 20원만 받은 이유는 나름대로의 서비스였다. 찾아와  손님에게 고마운 마음에서였다. 이를테면 덤의 개념이랄까. 돈을 남기고자 봉지를 판매할 생각은 없었지만 환경 보호의 취지로 유상이  만큼  값을 치르게 하는 것이 옳았다. 하지만 나는  받아도 그만이었다. 청소나 정리를 하고 있을  누군가 다가와 봉지 값이 지금 없는데 나중에 줘도 되냐고 묻거나 키오스크로 카드 결제를 이미 마쳤는데 봉투 값을 미처 못냈다,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묻는 경우가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괜찮아요, 다음에 주세요" 연발하며 만약에 다음이 없다고 해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일까, 사람들은 자주 봉지를 그냥 뜯어갔다. 가게에 머무르면서 봉지 가격을 치르는 사람들을 거의 보지 못했다. 봉지를 사는 비용은 판매 수익에 의존했고, 장당 20원의 금액도 형식에 불과했다.


 여기서 성격을 논하기엔 무리가 있지만 나는 성격상 계산을 않고 가는 사람을 붙잡아서 '계산 안 했는데요'라고 말하는 게 어려웠다. 물론 다른 물건이야 주인이 청소하는데 들고나가는 사람은 없지만 비닐 정도는 못 본 척하고 그냥 뜯어가는 사람이 종종 있었다. 그럴 때마다 하던 일을 팽개치고 달려가 "손님, 비닐봉지 계산 안 하셨어요"라고 말할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 특히, 손자가 좋아한다고 망고맛 하드만 열다섯 개씩 사가는 할아버지를 비롯해 대다수의 노인 손님들에게는 더욱 말을 꺼내지 못했다. 한 번은 용기 내서 말했는데 '요즘 누가 십 원짜리를 가지고 다니냐'는 이야기를 듣고 얼굴이 붉어졌다. 20원 가지고 야박하게 그런다고 핀잔 주는 것처럼 느껴졌다. 내 돈을 낼지언정 두 번 다시는 못 말하겠어!!


 그런데 꽉 찬 저금통을 보아하니 실수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돈이 많아지니 욕심이 나서가 아니라 정당한 금액을 지불하고 돌아간 사람들의 양심에 내가 찬물을 끼얹은 것 같아서였다. 돈이 있어서 내고 간 게 아니라 마음이 있어서 내고 간 사람들이었다. 선한 의도를 모른 척 한 건 바로 나였다. 봉지 값을 넣으라고 말하는 게 불편해서, 단지 싫은 소리를 건네 뒷말 듣기 싫어서.


 저금통에서 나온 동전들은 '지킬  지키겠다는 사람들의 마음'이었다. 비닐봉지를 쓰면서 값을 치르는 것으로 환경에 대한 부채가 덜어지겠냐마는, 적어도 법과 양심은 지키겠다는 선언이었다. 거스름돈을 돌려받을  없는 100원짜리, 500원짜리가  증거였다. 정한 값보다 훨씬 클지언정 돈을 내고 봉지를 사용하는  정직함에 나는 무슨 일을 벌였던가.


 뒤로  책가방을 앞으로  돌리고 자기가  물건을 척척 담는 어린 학생들이나 장바구니나 에코백을 들고 아이스크림과 과자를 한아름 사가는 손님들을 보면 고마웠다. 그동안 환경에 대한 생각들이 많아지면서 비닐이 너무 많이 나와서 찔리는 마음이 있었는데 오늘 보니 ' 쓰레기로 변신할' 비닐봉지를 쉽게 줘버린  태도가 매우 나빴음을 깨달았다. 불편해도 지킬  지키자고, 최대한 줄일  있으면 줄이자고 말해야 했는데 나도 모르게 함부로 주고, 그냥 가져가도 모른 척했었다. 반성했다.


 저금통에서 동전을 수거한 , 메모지를 새로 붙였다. '정부 시책으로 봉지는 유상 판매합니다. 20'이라는 문구를  버리고 '환경을 생각해서 봉지는 유상 판매합니다. 절대로 그냥 가져가지 마세요. 50'이라는 문구를 새로 붙였다. 봉지가 하나라도  판매돼서 조금이라도 쓰레기가 줄길 바란다. 장바구니 할인도 생각해  예정이다. 앞으로는 절대 비닐봉지를 무료로 사용하는 사람을 그냥 보내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지킬  지켜야 하니까. 그러다 보면 사용 빈도도 점점 줄겠지. 자못 진지하게 결심하고 나니 잔돈 없다고 모른 체하지 않고 봉지 값을 지불하고 돌아가 주신 손님들께 다시 한번 고마운 마음이 선다.


 무인 편의점에 양심 있어요.


우리의 지구는 상태가 좋지 못하다. 그 징후가 걱정스러울 정도이기에 그대로 두면 나아지지 않을 것이다. 행동할 수 있었을 때 그 얼마 안 되는 가능성을 이미 다 써버린 우리에게는 시간이 부족하다. 주위의 많은 것이 이미 사라지기 시작했기 때문에 알 수 있다.

                                                          호프 자런,[나는 풍요로웠고, 지구는 달라졌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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