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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박 Apr 14. 2022

왜 네가 내 마음을 판단하는데?

행동에 대한 우리의 해석은 불완전하다.

즐거운 산책길에서 부부 싸움이 났다.


남편에게 "달걀도 떨어지고, 가게에서 필요한 잡동사니를 사야 해서 집 근처 마트에 걸어서 다녀오면 어떻겠냐" 물었다. 남편은 좋다고 하며 접이식 손수레를 꺼내 들었다. 가는 내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화기애애했다. 문제는 돌아오는 길에서였다.


회사에서 확진자들이 속출하고 있어서 인력이 많이 빈다고 푸념하듯이 말하던 남편은 우스갯소리를 던졌다. 웃자고 하는 말이었지만 충격적이었고, 남편의 그런 말을 아이들도 본받을까 염려되었다.


"아유, 요즘 회사에서 확진자들 때문에 내가 할 일이 너무 많아. 차라리 나도 코로나에 걸려서 며칠 쉬고 싶어. 확진자 마스크 내가 빌려 써야겠어."

"아니 무슨 말을 그렇게 하냐? 코로나에 걸리고 싶다니. 당신 그거 확진자에 대한 모욕이야, 알아? 거의 조롱이라고."


요즘 애들 말로 '급발진'했다. 급발진된 차처럼 '부아앙' 쏘아붙이자 남편은 에휴 한숨을 쉬곤 반대편 도로로 건너갔다. 반대편에서 차가 신호를 받고 신나게 달려오는데도 홱 건너 버렸다.

그곳은 거의 모든 사람이 무단 횡단을 하는 좁은 2차선이다. 불가피하게 건너야 하는 구간이라 우리는 항상 주위를 살피고 차가 안 올 때 부리나케 건넜다. 남편과 나는 간혹 운전 중에 무리해서 도로를 횡단을 하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들리지도 않는 지청구를 날리면서 아무렴 사람보다 차가 느리겠냐고, 누구 인생을 망치려고 저런 식으로 찻길을 건너느냐고 열을 올렸다. 남편은 차가 올 때 막 건너는 사람이 아니었다. 내가 그러면 오히려 말렸다. 그런데 건너버렸다. 그의 태도는 나를 향해 불편의 날을 세우고 있었다.


내가 맞는 말을 하긴 했지만 쏘아붙이듯이 말을 했기 때문에 이미 마음이 상했을 것이다. '모욕'이나 '조롱'처럼 악질적으로 부정적인 단어는 그의 귀와 머리에 그대로 꽂혔을 것이고 어차피 대거리해봤자 싸움밖에 안될 테니 소심한 저항의 의미로 길을 확 건너버렸을 거다. 하지만 나는 그예 더 화가 났다.


길에서 더 이상 다투고 싶지 않았다. 달려오던 차 두대가 속도를 줄여 지나간 후 저 멀리 보이는 신호등이 붉은 빛을 내고서야 나는 조심해서 길을 건넜다. 남편은 수레를 잡고 기다리고 있었다. 어차피 기다릴 걸 뭘 그리 볼썽사납게 건넜느냐고 말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혼자 성큼성큼 걸어갔다. 삼사 분쯤 지나자 남편이 같이 가자고 목소리를 냈다. 나는 못 이기는 척 발걸음을 늦췄다.


한참을 말없이 함께 걷다가 우리 가게랑 비슷한 무인 편의점에 다다르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걸음을 멈추고 기웃거렸다. 한 번도 못 본 신기한 자판기가 있어서 나도 모르게 말을 걸었다. 몇 마디 대화가 오가고 다시 길을 재촉했을 땐 뾰족한 분위기가 좀 더 누그러졌다.


"계란 이리 줘. 내가 들게. 무겁지."

"됐어, 손수레나 열심히 끌어."

"그럼 당신이 수레를 끌래? 계란 그렇게 드는 거 은근 팔 아파."

"뭐야, 아까는 혼자 삐쳐서 길을 확 건너버리더니 이젠 내 걱정하는 거야? 내가 바른말했다고 토라지기는!"


농담 같은 투정을 던지고 성큼 걷는데 으레 들려야 할 바퀴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문득 뒤를 돌아보니 남편은 아까보다 싸늘해진 표정으로 서 있었다. 내가 우두커니 섰자 남편이 몇 초의 간격을 두고 걸어왔다. 남편이 말했다.


"당신은 왜 내 마음을 멋대로 판단해?"

"뭐?"

"그렇잖아. 난 삐치지도 않았고, 화도 안 났어. 당신이 한 말을 듣고 그럴 수도 있구나 생각했어. 건너도 되는 타이밍이어서 건넜고, 심지어 건너자고 말도 했어."


원래 어지간한 것은 내게 맞춰주려고 하는 사람이다 보니 나의 말투를 타박하거나 생각 자체를 부정하며 따지는 일이 드물었다. 나에게 불편함을 느껴서 하는 말인데도 불구하고 나는 남편에게 혼나고 있다는 생각이 팍 들었다. 사실은 화가 났으면서 아닌 척하다가 내가 좀 풀리는 것 같으니까 때는 이 때다 싶어서 화를 내고 있는 게 분명했다.


"아니, 거짓말하지 마. 당신은 화났어. 화나서 평소보다 부주의하게 길을 건넜어. 지금도 그냥 넘어갈 수도 있는 말에 꼬리를 잡아서 나랑 다투려고 하고 있어. 내 말이 틀려?"



뇌과학자 닉 채터는 자신의 저서 [생각한다는 착각]에서 타인의 행동을 해석하는 것을 위험하다고 말한다. 생각이라는 것은 무의식의 발현도, 의식의 확립도 아니다. 깊은 정신세계란 존재하지 않으며 즉흥적인 의식의 흐름이 생각일 뿐 어떠한 의미도 없단다. 그러니까 그의 말에 따르면 남편이 나를 자극하고 싶어서 길을 건넌 게 아니라 마침 그가 길을 건너려는 상황과 자동차 두대가 오고는 있지만 멀리 있기 때문에 지금 건너도 차에 치이지 않을 거라는 선험 지식이 그가 '건너가도록' 했다는 것이다. 이 뇌과학자의 주장을 읽는 순간 남편에게 슬쩍 미안했다. 그의 행동을 해석할 근거는 아무 데도 없으며 나 역시 분노의 원인을 다른 데서 찾는 게 마땅했다. 이를테면 그가 길을 건너고 남겨진 내가 무시당한 느낌을 받았다든가, 과거의 경험- 남편은 길을 건널 때 좌우를 살피고 나를 데리고 건넌다-과 현재의 상황이 교묘하게 어긋나서 어색함 끝에 도달한 평가라든가. 내 마음은 그렇게 평평했고, 남편의 마음도 그게 전부였는데 나는 혼자 판단하고 씩씩 거리느라 트러블을 만든 거였다.


물론, 남편의 말과 태도는 잘못된 게 맞다. 코로나로 아픈 사람도 많고 심지어 죽은 사람도 있는데 그렇게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 앞에서 당당하게 공표한 이야기도 아니고 길을 걷다가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푸념하듯이 늘어놓은 실수였다. 힘들었구나 말한 후에, 말에 오류와 무례가 섞였음을 얘기했어도 늦지 않는데 무턱대고 비난부터 하고 들었으니 기분이 상했을 것이다. 길에서 남편이 나를 그렇게 비난하듯 말했으면 아마 나는 며칠 동안 말도 안 하려고 했을 게 뻔하다. 내 마음은 잘 알면서 왜 남편의 마음은 잘 몰라줄까.


생각해보니 나는 타인에 대한 판단을 너무 쉽게 내리는 경향이 있다. '누구에게든 판단을 유보하라'는 말을 어디서 읽고, 적어두고, 써먹기도 했으면서 내내 어기고 있다. 불합리한 것에 저항하고 싶어 하면서 내가 가장 불합리한 일을 많이 저지르고 있었다. 언제쯤 나라는 모순 덩어리는 깔끔하게 부서지고 흩어질 수 있을까.


우리는 자기 마음을 알기는커녕 자신의 경험을 이해하기 위해 끝없이 고군분투하다가 잘못된 결론에 도달할 수도 있다.
                                                                                           닉 채터 [생각한다는 착각] 중에서


책을 읽다 보니 내 마음도 모르는 주제에 남의 마음을 해석하려고 든 내가 얼마나 어리석은지 깨닫는다. 또, 남의 말을 곧이곧대로 듣지 않고 상대의 말과 행동을 나름대로 해석하느라 골머리를 앓았던 지난 시절이 아까웠다. 내가 이 책을 읽지 않았다면 나는 여전히 남편의 행동을 서운해하며 그를 난처하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타인이 즉흥적으로 한 말에 의미를 두고 일어나지도 않을 경우의 수를 가늠하느라 몸살을 앓을 것이다. 함부로 예단하고 걱정하는 나를 답답해하던 아이들도 문득 떠오른다. "엄마는 왜 있지도 않은 일을 이야기해" 쏘아붙이면 "다 너희를 생각해서 그래"라고 말하던 믿음. 그것은 여지없이 착각이었다.


하지만 자책하는 것도 일종의 고안된 것에 불과하다는 닉 채터의 말을 떠올린다. 나 역시 즉흥적인 의식의 흐름이었을 뿐이다. 이제 알았으니 조심하면 되는 거다. 이것은 나의 경험이 되어 어떠한 상황에서 새로운 생각의 순환으로 재사용될 것이다. 그러다 보면 채터의 말처럼 점차로 훌륭해질 수 있겠지. 적시에 좋은 책을 만나서 아주 다행이다.


"여보 미안해. 다음부턴 판단하거나 멋대로 당신 마음을 해석하지 않을게."




*사진 출처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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