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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박 Apr 21. 2022

글을 더 못 쓰게 되었지만

그림책 좋아하세요?

내 주변엔 그림책 모임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성인이 그림책을 읽는 것을 이상하게 여긴 적 없고 활자로 된 다른 책에 비해 그림책을 폄하한 적도 없지만 날더러 그림책을 권하면 대부분 웃음으로 때우고 말았다. 솔직히 말하면 항상 읽고 싶은 책이 쌓여있는 나로서는 그림책을 붙잡고 천천히 사고(思考) 할 자신이 없었다. 아니 필요를 못 느꼈다고 하는 게 더 맞겠다. 아이들도 다 큰 마당에 무슨 그림책을 읽어, 내가 읽을 책이 얼마나 많은데!


그런 중에 북 큐레이션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서점을 운영할 깜냥은 안되지만 언젠가 온전히 책과 책 읽는 사람을 위한 공간을 만든다면 멋지게 꾸며보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을 하긴 했었다. 얼마 전 예능 프로에서 정재승 박사가 자신의 서재를 공개하면서 나름대로 큐레이션 해 놓은 것을 보고 나도 저렇게 한 번 해봐야겠다 다짐하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글쓰기 모임의 M이 북큐레이터를 양성하는 프로그램이 있는데 같이 들어보자고 했다.


북큐레이터는 1급과 2급으로 뉜다. 1급을 따려면 2급을 먼저 들어야 하는데 마침 그림책 큐레이터 2 과정이 가까운 곳에서 열렸단다. 종내에는 1 북큐레이터가 되는 게 목표지만 그림책 분야와 교차로도 지원이 가능하니 이번엔 그림책 큐레이터 강의를 듣자고 했다. 반갑고 좋았다. 문제는 그림책에 대해서 전혀 모른다는 . (읽어본 책도 손에 꼽는다)


아니나 다를까, 첫 시간부터 강사님은 '여러분 OOOO 아시죠?'로 시작했다. 수강생들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연신 안다고 대답했다. 약간 당황했다. 생전 처음 보는 그림책들이 눈앞에 지나갔다. 개괄을 끝낸 강사님에게 '나는 그림책을 거의 본 적이 없는데 수강이 가능한가' 물었다. 강사님은 그럴수록 좋다며 격려했다. 강사님은 그냥 전문가보다 더 전문가 같은 포스를 풀풀 풍기며 재밌게 수업을 진행했다. 설렜다. 놓치지 않으려고 열심히 들었다.


강사님은 자꾸만 그림책을 보여주었다. 대충 말하고 넘어가는 경우도 있었지만 내용을 조금 읽어주기도 했는데 이야기라면 사족을 못 쓰는 나의 특성상 빨려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듣다 보니 그림책이 정말 아이들만을 위한 건 아니구나, 어른들도 사고의 폭을 깊고 넓게 확장할 수 있겠구나 생각했다. 어떤 이야기는 너무 슬퍼서 눈시울이 붉어지기도 했다. 거의 처음 듣는 이야기들에 약간의 쇼크를 경험 중인 나와는 달리 다른 사람들은 원래부터 아는 책이라는 듯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수업이 끝나고 도서관으로 달려갔다. 그림책이 어디 있는지 조차 몰라서 두리번 대다가 아동문학코너로 들어갔다. 이제야 비로소 도서관 큐레이션이 보이기 시작했다.  전에는  관심도 없었고 이게 큐레이션이구나 싶은 생각이 전혀 없어서 눈에 띄지 않던 것들인데 오늘은 한눈에 보였다. 지구의  기념으로 원화 전시를  놓았는데 마침 강사님이 소개해  책이었다. 저작권 때문에  보여주지는 못하고 살짝 이야기해줬는데 울컥했다. 사람들이 북극곰은 싫어하는 반면 판다는 좋아한다는 것을 알게  북극곰이 배가 고파서 눈두덩이와 팔에 흙을 발라서 판다처럼 변장하고 마을로 내려가는 장면에서 뭔가 뜨거운  올라왔었다. 전시된 책을 집어 들고 직접 읽었다. PPT 소개받을  몰랐는데 직접 보니 표지의 일부에 볼드 처리가  있었다. 표지의 물성을 느끼며 찬찬히 살펴보았다.


뿐만 아니었다. 걷지 못하는 아이가 밖에 나갈 수 없어서 집에 갇힌 채 하염없이 아래를 내려다본다. 밖의 모든 사람들은 분주히 지나가지만 집 안의 아이는 사람들의 정수리 밖엔 볼 수가 없다. 그러다가 우연히 지나가던 다른 아이가 높은 곳에서 밖을 보는 아이에게 자신의 모습이 잘 보이도록 땅에 발라당 누웠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작은 탄식을 뱉었다. 그리고 코끝이 찌릿 거렸다. 이거구나, 그림책이라는 건. 그림과 적은 활자로 담아낸 이야기가 뻣뻣한 독자의 마음을 제대로 녹여 부들부들하게 하는구나. 그래서 사람들이 위로도 됐다고 하고 기쁨을 얻었다고도 하는구나. 그림책의 매력에 흠뻑 빠졌다. 아들을 데리러 갈 시간도 잊고 내내 그림책 찾기에 열중했다.


선생님이 추천한 책들은 교훈이나 성찰에 매인 책이 아니라 낯선 세계와 조우하게 하는 책이었다. 계속된 고정관념에 갇혀 살던 내게 이상한 훈풍을 불어다 주는 책들이었다. 다량의 그림책들이 비치된 유아도서실로 신발을 벗고 들어가서 무릎을 꿇고 책 등을 훑었다. 마음에 드는 제목도 빼들었고, 강의 때 들어본 외국 작가들의 책도 보이는 대로 빼 들었다. 숫제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서 차근차근 읽었다, 아니 보면서 느꼈다. 그러면서 나의 글을 떠올렸다. 에세이라는 이름 아래서 독자가 생각할 겨를은 주지도 않고 나 혼자 주절주절 너무 많이 뱉어내고 있지는 않은가?


그러면서 또 생각했다. 표지와 내지, 글자크기와 색깔 하나하나까지 온갖 정성을 들여 고심해서 만들어 내는 그림책을 이렇게 후루룩 읽어내도 되는 걸까? 그럼 나는 글 한 편을 쓰면서 고민이라는 걸 하긴 하나. 퇴고랍시고 하고는 있지만 사실 비문을 고치는 것에 불과하진 않았나? 내 글이 누군가에게 상처가 될 수도 있음을, 내 글 때문에 내가 더 갇히고 있음을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하는 근본적인 물음에 도착했다.


소설가 황정은은 자기의 에세이에서 고백한다. 공포나 더러움 혹은 죽음에 대한 이미지를 구축하기 위해서 사용한 검정이라는 색채가 피부가 검은 사람들이 볼 때는 괜찮은가에 대해 고려하지 않았음을. 수업 중에 강사님도 말하였다. 백희나 작가도 공전의 히트를 친 자신의 책 <구름빵>에서 '마치 4인 가족이 정상'인 것처럼 그렸음을 반성한다고 말이다. 에세이든 그림책이든 생산자의 책임감이란 그렇게 막중한 것임을 작가들도 인지하고 있었다. 여태 나는 어떤 글을 썼나! 내 글이라는 이유로  마구 썼다. 어떡해, 이제 나 글 못 쓰겠어.



"나 아무래도 작가는 못될 것 같아. 난 너무 속이 좁아. 화도 안 가라앉고."

"야, 무슨 그런 걸로 작가가 안될 것 같다고 해. 작가도 사람이야."


작가도 사람이다. 맞는 말이다. 작가가 사람이라면 사람 같이 말하고 사람 답게 생각해야 한다. 내 글을 읽고 다른 사람이 사람 다운 마음을 갖는데 방해가 되면 절대로 안된다. 어쩌면 나는 내가 보고 싶은 것에만 나를 가두고 사람다움으로 가는 길에 재를 뿌리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다독이라는 강력한 마취제로 내 사고의 기회에 화살을 쏴서 혼자만의 만족에 취하도록 만들었던 것도 같다. 그래서 이제 고정된 관념을 완전히 부수고 사람다운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연습을 해야 하겠다. 그림책은 잔잔하지만 세게 나를 뒤흔들고 있다. 분명히 나의 사고는 좀 더 사람을 향해 열릴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어떤 일을 잘하고 싶으면 믿음을 갖고, 더 잘하고 싶으면 노력을 하고, 가장 잘하고 싶으면 포기하지 말라고 했다. 일주일에 한 편을 꼭 쓰기로 다짐한 지 9개월 째인 나는 명절 한 번을 제외하고는 한 번도 쉰 적이 없다. 글쓰기 모임에서의 약속이기도 하지만 나와의 약속이기도 했다. 꾸준히 쓰다 보면 뭐가 되어도 되겠지 싶어 열심히 썼다. 언젠가 물성 있는 내 책을 만들어 내는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해서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이번 주는 포기하려고 했다. 다시 한번 작가가 무엇인지 새기고 나니 도저히 내 글을 내밀기가 어려워서다.


그러나 다시 생각한다. 나는 글 쓰는 일을 참 잘 해내고 싶다. 그래서 여태껏 노력해 왔다. 그런데 가장 잘하고 싶은 마음을 갖고 있으면서도 포기하려고 했다. 남의 글이 너무 좋아서 나의 졸필은 가치가 없다고 마음대로 판단하고 끝내려고 했다. 그렇지만 이것 역시 사람을 위한 작가가 돼가는 과정임을 상기한다. 다시 한번 해보면 된다. 조금 더 다양한 시각을 기르기 위해서 그림책을 보자. 일일이 설명해 주지 않았지만 가슴 어딘가에서 울컥하며 치밀어 오르는 그 마음을 외면하지 말자. 그러다 보면 언젠가 나도 사람을 향한 사랑의 글로 많은 이에게 위로가 되지 않을까? 그러니 계속 가자. 아무래도 포기는 내게 어울리지 않아.


그림책 같이 읽으실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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