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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박 May 05. 2022

북유럽 풍 도시락 통은 못 샀지만...

"엄마, 나 금요일에 학교에서 소풍 간대."

소풍이라는 말이  이렇게 어색한지. 언제부턴가 학교에서는 소풍을 '체험학습'이라고 부른다. 팬데믹까지 덮치면서 단체 나들이의 개념은 어디론가 쑤욱 들어가 버린  오래다. 소풍 간다는 말이 낯설고 못 미더워 무심히 딸을 쳐다보았다. " 소풍? 그럴 리가."


딸이 내민 유인물 어디에도 '소풍'이라는 말은 없었다. 이름은 진로 체험 학습. 금요일 하루 버스를 대절해 두 반씩 묶어 각기 다른 곳으로 떠나는 체험 행사였다. 이게 무슨 소풍이냐 싶었지만 딸은 신났다. 그러고 보니 벌써 몇 년째 체험학습을 가지 못하고 있었다. 초등 4학년에 가는 수련회, 5학년 때 가는 수학여행, 6학년에 가는 졸업여행 모두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봄가을 소풍, 운동회도 마찬가지였다. 거리두기가 아예 해제되고 코로나에 대한 인식이 보다 편안해지면서 학교도 슬슬 이전의 행사들을 되찾는 모양이었다. 2006년생 첫째는 모두 자연스럽게 참여한 행사들을 2009년생 둘째는 아무것도 맛보지 못해서 안타까웠는데 다행이었다. 나도 반가웠다.


문제는 도시락이었다. 가까운 곳이 목적지여서 급식을 먹는 줄 알았더니 웬걸, 도시락을 싸 오라고 한다. 딸은 당연히 엄마표 참치김밥을 선택했다. 큰 아이 때는 소풍마다 참치김밥, 과일, 귀여운 모양의 소시지 등을 곱게 담아서 칸칸이 넣어주었는데 예전에 그걸 내가 어떻게 했더라?

그땐 오후에 출근을 했으니 온갖 열정을 다 담아서 도시락을 준비했다. 색색이 다채롭던 아이들의 도시락. 허나 너무 과거의 일이었다.  큰 애 초등 3학년 이후로 도시락을 싸가지고 가지 않았으니 근 7년 만에 다시 해보는  김밥 도시락싸기라니, 살짝 겁이 났다. 새벽같이 일어나서 재료를 준비하고 시간 맞춰 보낸 후 나까지 일하러 가야 하는데 과연 가능할까 싶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요리에 소질이 없는 엄마를 둔 게 아이 탓도 아니고 실로 오랜만에 떠나는 교외 행사로 흥분 상태인 딸에게 참치김밥 말고 다른 건 안 되겠느냐고 물을 계제도 아니었다. 그래, 부지런히 싸서 일터에도 가지고 가서 먹으면 되지 하면서 머릿속으로 열심히 그날의 도시락을 설계해 보았다.


"엄마, 근데 도시락 통 있어?"


월요일 저녁에 식사를 준비하는데 아이가 물었다. 당연히 있다고 말했더니 "설마 토마스에다가 가지고 가라는 거 아니지?" 하고 물었다. 찬장을 열어보니 어린이 애니메이션 <토마스와 친구들>의 주인공 토마스가 뚜껑에 떠억 하니 그려진 도시락 통이 날 불렀느냐는 모습으로 당당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그렇다. 이제는 고1이 되어버린 아들 녀석이 어린이집을 다니던 시절에 개비해 둔 토마스 도시락통이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참고사진 출처 예스24


내가 생각해도 저건 좀 심하다 싶었다. 인터넷 창을 열어 부랴부랴 주문을 넣었다. 월요일 밤에 시켰으니 화요일에 업체에서 보내주면 수요일에는 오겠지 생각했다. 언뜻 보기에 '오후 2시 이전 입금 시 당일 발송'이라는 말이 있는 것 같았다. 얼른 주문을 넣고 딸에게 으스대며 보여주었다. '이 엄마께서 오직 너를 위해 새로운 도시락 통을 주문했노라' 짐짓 근엄한 목소리를 섞어 자랑했다. 딸은 깔깔 웃었다.


그러나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게 있으니 목요일이 어린이날인 것과 도시락통 판매 업체가 화요일에 물건을 보내지 않을 수도 있단 사실이었다. 하필이면 화요일이 너무 바빠서 도시락 통이 발송되었는지 아닌지 확인도 못한 채 하루를 보냈고, 수요일이 돼서야 확인을 하니 택배가 곤지암 허브에 묶여 있다는 표시가 보였다. 아, 이걸 어쩌지. 어린이날, 어버이날을 앞두고 택배가 몰린 모양인데...

도시락 통이 뭐가 중요하냐며 토마스 싫으면 깔끔한 반찬통에 싸 가자던 나조차도 너무 실망스러웠다. 인스타 감성에 심취한 딸을 위해서 모던한 색의 통을 고르고 감각적인 북유럽풍 체크가 가미된 복조리 모양 주머니까지 골랐었단 말이다. 가방에서 딱 꺼내면서 흐뭇했을 딸아이를 기대했건만 나름 거금을 투자해 구매한 도시락 통은 곤지암 허브에 있었다. 금요일에 도착한다고 해도 이미 다른 도시락 통을 가지고 등교한 후일 것이다. 아, 하루만 더 있었으면. 하루만.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찬장을 뒤지기 시작했다. 이사 오면서 잘 안 쓰는 물건은 더 깊이 치워 두었기 때문에 샅샅이 살폈다. 사진에서 보던 것만큼은 아니지만 그에 필적하는 도시락통이 하나 더 발견되었다. 다행이었다. 북유럽풍은 아니어도 중1 여학생이 사용하기에 무난한 모양에 깔끔한 디자인의 도시락 통이 왜인지 우리 집에 준비돼 있었다. 조금만 찾아봤으면 도시락 통을 사네, 마네 번잡스럽게 굴지 않고 내일 올 도시락 통을 돌려보내는 비용을 지불하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나는 내일 올 택배를 뜯어보지도 않고 돌려보낼 예정이다)


 하지만 도시락 통을 산다, 참치김밥을 싼다 분주한 시간을 보내면서 아이보다 더 상기된 나를 발견했다. 귀찮다고 말하면서도 은근히 아이들을 위한 이벤트를 즐기는지 이왕이면 예쁜 도시락을 만들어주자 다짐하곤 흥분했다. 마치 아이들이 어렸던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라 두근두근 했다. 토마스 도시락 통을 꺼내 들고 깔깔 웃던 우리의 모습도 나쁘지 않았다. 아들은 우리의 대화를 들으면서 아직도 그 도시락 통을 갖고 있느냐며 좀 버리라고 훈수를 두었고, 멀쩡한 걸 왜 버리냐고 놔두면 언젠가 쓸 거라는 내 말에 '외할머니 닮았다'하며 또 한 차례 웃음으로 쓸고 가는 남매의 대화도 너무 좋았다. 저녁이면 각자의 방에 들어가서 나와보지도 않는 아이들과 옛날이야기, 요즘 이야기를 하며 저녁 내 웃던 시간이 소풍만큼 좋았다.


또 이전 같으면 꿈도 못 꿀 체험학습을 떠나게 된 아이를 보는 것도 좋았다. 세계사 속에서만 보던 전염병이었다. 일상이 묶이고 평범이 바닥나 버린 시절 속에서 아이들은 여전히 학생이었지만 이전과 같지 못했다. 모든 행사가 취소되고 대면 수업조차 할 수 없어서 컴퓨터 앞에 아이들을 고정시키며 속상해하던 시간들이 떠오른다. 완벽하게는 아니지만 기어이 코로나 시대가 끝나고 있다. 끝을 알리는 시작점에 내 도시락이 서 있는 기분이다. 즐겁다.


그러니 통 걱정일랑 집어치우고 내일을 잘 준비해야겠다. 오늘은 매일 보던 책도 좀 덜 보고 일찍 잘 것이다. 살짝 정신 사나운 주방도 깔끔하게 정리하고 자야지. 아침에 아이가 먹을 반찬도 미리 준비해 두어야겠다. 정말이지 오랜만에 떠나는 소풍 아닌가. 학교에서는 진로체험학습이라고 종이로 못 박았고 교복까지 입으라고 했지만 김밥 도시락 싸서 친구들과 버스 타고 떠나면 그게 소풍이지 뭐.


인스타 감성의 북유럽풍 도시락 통은 다시 곤지암 허브를 통해 돌아가겠지만 맛난 거 꽉꽉 채운 엄마표 도시락 먹고 중학생 감성 물씬 풍기며 즐겁게 다녀오길 바라며. 잘 다녀와,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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