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의 열다섯 번째 생일, 못된 엄마 가슴에 피멍 든 이야기
"키우느라 수고 많았어."
남편이 나에게 십만 원을 건네준다.
예쁜 봉투에 담은 것도 아니고
지갑에서 꺼내 척척 세어 준 돈 십만 원.
"오오오. 나 주는 거야?"
하긴 했지만 남들이 들으면 웃을 돈이다. 십만 원이 뭐냐, 십만 원이. 돈으로 환산하면 그 세월을 환산할 수야 있냐마는!!
스물네 살 여름에 내 몸에서 불러 오른 배가 뻥 터져버리지는 않을까 걱정하던 그날 책에서 본 대로 배가 아팠다. 마지막 검진 땐가 배가 10분 간격으로 꾸준히 아프면 병원으로 아무 때나 전화를 걸라고 했다. 7시쯤인가 그날은 중환자실에 계시는 아버지 병문안을 가기 위해 좀 서두르고 있었다. 서울까지 가려면 일찍 서둘러야 했으니까.
어, 이상하다. 배가 자주 아픈데. 그것도 살살. 시간을 재보니 15분도 됐다가 20분도 됐다가 하길래 아닌가 보다 했다. 세상모르고 자는 남편 옆에서 서울 갈 채비를 하며 깨울까 말까 고민하다가 병원에 전화를 걸었다.
"배가 10분 만에 아팠다가 7분 만에 아팠다가 해요."
"아침 먹었어요?"
"아뇨, 아직 안 먹었어요."
"자 환자분 아침을 먹고 병원으로 오세요. 누구랑 같이 있어요?"
소고깃국은 내가 제일 자신 있어하는 메뉴였다. 무를 대강 썰어서 적은 기름에 볶다가 고춧가루와 마늘을 넣고 볶다가 물을 붓고 국간장을 넣고 팔팔 끓으면 고기를 투하. 선홍빛의 한우가 어둡게 변하면 불을 줄이고 좀 더 끓이다가 소금으로 간을 한다. 후추로 감칠맛을 더하면 밥 한 그릇에 국 두 사발은 거뜬이다.
투닥투닥 음식 하는 소리에 남편이 일어났다. 왜 이리 일찍 일어났느냐는 말에 배가 아파서 병원에 전화한 이야길 했다. 아빠한테 가야 되는데.
밥을 먹고 병원에 갔더니 8시나 되었을까. 그 안에 배가 많이 자주 아프기 시작했다. 엄마가 보고 싶었지만 엄마는 서울에 있었다. 병원 한 구석에 마련된 보호자 대기실. 엄마는 한 달 전에 아예 거처를 그리로 옮겼고 외삼촌이 자그마한 침구를 사줬노라고 했다. 중환자실에 가지 못하는 시간은 거의 근처의 교회에서 기도를 했는데 쉬고 싶어 대기실로 와보면 병원에 온 지 얼마 안 되는 다른 보호자가 엄마 이불이 공동 이불인 줄 알고 깔거나 덮고 누워 있었다고 했다. 그 모습이 어찌나 화가 나던지 쏘아붙였다고 했다. 괜히 빈축을 사진 않을까 염려됐었다.
"어머니, ㅇㅇ가 아이를 낳으려고 해요."
두 시간이면 내려올 수 있는 거리건만 저녁에는 아빠가 눈을 뜰까, 폐의 부종이 가라앉을까 해서 좀처럼 내려오지 못하고 애가 타는 엄마였다. 그 작은 방구석에서 외삼촌이 사준 베개를 적시며 울고 있을 엄마를 생각하니 가슴이 시렸다. 하지만 이 시린 가슴도 지금에서나 돼야 떠오르지 그때는 몰랐다.
그렇게 우리의 첫 번째 아이가 태어났다. 남편은 스물다섯, 나는 스물네 살이었다. 친구가 아이를 낳으면 가봐야 한다고 들었는지 양쪽 친구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기저귀에 물티슈에 심지어 떡에 빵을 사 온 친구도 있었다. 주변에 언니가 있거나 이런 곳에 방문을 해본 친구들은 내의를 사 오기도 했다. 배냇저고리가 열다섯 개나 들어와서 세 개 빼곤 다 내의로 바꾸었다.
그날도 오늘처럼 비가 많이 왔다. 남편의 죽마고우는 비가 오는 날 장씨 집안에 아들이 태어났으니 이름을 장마철로 지으면 어떠냐고 우스갯소리를 했다. 우리에게만 첫 아이가 아니라 거의 모든 친구들 사이에서도 우리 아이가 첫 번째 아이였다. 지금 서너 살짜리 아이를 기르는 친구들은 아마 우리 부부와 내 아들을 아주 신기한 눈으로 바라봤을 것이다.
세월이 많이 흘러 아이가 중학생이 됐다. 그리고 15번째 생일을 맞았다. 부풀어 오른 내 뱃속에서 이 세상에 나와 스스로 호흡한 지 14년이 꽉 찼다. 아이의 손과 발 , 머리카락 한 올까지도 우리가 만들었지만 더 이상은 우리 것이 아닌 아이. 14년 동안 먹이고 입히고 재웠지만 이제는 우리가 별개의 존재.
때론 그 사실을 잊고, 내 마음에 왜 차지 않는지, 내가 젊은 날을 널 위해 바쳤는데 너는 왜 내 맘에 따라 움직여주지 않는지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궤변을 늘어놓는 나를 본다.
나를 위해 더 좋은 길을 설명해주려던 엄마에게 왜 엄마는 나를 엄마 마음대로만 하려 하느냐고 우악스럽게 굴던 지난날을 잊고, 나는 자식을 낳으면 엄마처럼은 하지 않겠노라고 다짐했던 오래전 그날은 잊고, 막상 낳아서 기를 때는 내가 잘하고 있다는 생각에 어린아이에게 너무 많은 기준을 강요했던 나를 까맣게 잊고 내 맘대로 아이를 휘두르는 나를 본다.
어제는 아이와 다퉜다. 시험기간인데 공부하고는 담쌓은 아들을 보면서 공부 좀 하는 게 어떻겠냐고 했다가 늘 그렇듯 원래의 취지와는 어긋나게 다투고 말았다. 나도 진심이 아닌 말을 폭포처럼 쏟아붓고, 아이도 주워 담을 수 없는 모진 말을 불 화살처럼 쏘아붙였다. 고성과 비난이 수도 없이 오고 간 후에 아들이 했던 말,
"그렇게 싫으면 낳지 않았으면 됐잖아. 존재만으로 감사하다고 하지 않았어?"
나는 자리에 얼어붙었다. 눈물이 고름처럼 뺨을 타고 흘렀다. 다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들키지 않으려고 발가락에 더욱 힘을 주고 버텼다. 아이는 나를 스쳐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아걸었다.
"아이를 다음에 낳으면 어떨까? 나는 아직 어리고 학교도 마치질 못했는데. 부모님한테 손 벌릴 자신이 없어서 그래."
"돈은 내가 벌고 있어. 네가 낳지 않는다고 하면 나 혼자서라도 낳을 거야. 내가 책임질 거라고."
눈이 많이 오던 어느 날 스물넷의 남편이 나에게 건넨 말이었다. 하얀 눈밭에 우리 차만 덩그러니 서서 스물넷의 남편과 스물셋의 내가 울고 있었다.
"엄마, 나 임신했어. 미안해."
"낳지 마. 안돼.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
"엄마, 그럼 얘를 죽여?"
"아, 이 사람 무슨 이야기 하는 거야. 울지 마. 울지 마. 낳아야지. 무슨 말이야."
그때 아빠가 아니었다면 나는 엄마의 고함에 못 이겨 병원으로 갔을지도 모른다. 애 아버지도 내 엄마도 나의 앞날을 걱정하며 포기하라던 그 아이를 내 의지로 선택해 낳았고, 길렀고 지금까지 왔는데 이제는 내 이마보다 한 뼘이 자라서 , 덩치도 커져서 내 앞을 딱 가로막고 섰다가 삿대질하는 내 손을 잡아서 뒤로 홱 밀어버린 아들이 야속해 독사처럼 쏘아붙인 말을 기억해냈다.
"내가 스물넷 그 어린 나이에 널 넣고 어떻게 살았는지 알아? 내 청춘 다 바쳐서 키웠어, 이 나쁜 새끼야."
눈이 어묵처럼 되도록 울다가 잠이 들었다. 아이가 했던 모진 말들보다 내가 쏟아부은 독기 어린 말들이 다시 내 가슴에 와서 꽂혔다. 그러기에 주워 담지도 못할 말을, 금세 후회하고 내가 더 아플 말들을 왜.
십만 원만큼도 칭찬받을 자격이 없는 엄마였다. 내 방문 앞에서 서성서성 거리던 아들을 모른 체했던 속 좁은 엄마였다. 생일상은커녕 미역국도 끓이기 싫었다. 내내 아이를 용서하지 못했다. 아니, 나를 용서하지 못했다.
"엄마, 오빠 생일인데 밥 안 줄 거야?"
나는 일어나 씻고 갈비탕을 사러 갔다. 아들이 엄청 좋아하는 메뉴다.
"미역국은 네가 싫어해서 안 끓인 거야. 그리고 미역국을 먹어야 할 사람은 나야, 알아?"
짐짓 호기롭게 말했지만 절반 이상 마음이 풀렸다는 것을 눈치챈 아들이 전날의 전투는 다 잊었는지 맛있겠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엄마, 내가 생각해봤는데 말이야. 어제 미안했어. 내가 엄마에게 심하게 굴었어."
끝내, 아냐 나도 미안해라고 말하지 못하고 눈물조차 보이기 싫어서 휴대폰만 들여다보던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국에 만 밥을 우걱우걱 입에 넣는 아들이었다. 내가 아이를 기르는 게 아니라 아이가 날 기르는 것 같다.
이젠 더 이상 나의 아이가 아님을, 단지 비가 많이 오는 날 태어난 아주 오래전 나의 아기였음을 인정하고, 이제는 아들을 놓아주어야겠다. 내 아이가 아닌 그저 7월 25일생 장아무개로.
예전에 누가 그랬더라, 아이를 잘 기르려면 옆집 아이인 것처럼 대하라고. 그러면 함부로 대할 수 없다고.
그래, 이제 헤어지자. 나의 아기, 나의 생명. 내가 오랫동안 품었고, 사랑했고 기대했던 나의 아이에서 너를 너로 독립시키고 묵묵히 응원하는 엄마가 될게.
"엄마가 했던 엄청나게 모진 말들의 거의 모든 말들이 진심이 아닌 거 알지?"
"알아, 나도 다 거짓말이었어."
"생일 축하해 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