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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박 Sep 13. 2020

공동육아는 판타지

구병모 소설 [네 이웃의 식탁]을 읽고


출산율은 점점 저조해지고  문제점이 그리는 미래가 나라의 존폐를 결정지을 만큼 대단히 부정적이다. 별다른 대안 없이 아이만 많이 낳으라고 종용해서는  되는 이유 중에 하나가 바로 '보육' 문제 때문이다. 영아의 보육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출산율 상승은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 맞벌이를 하지 않으면 한국 도시 사회에서 살기 어렵다. (욕심을 부리지 않으면 이런 말은 사양한다. 아파트 가격을 보라) 가장이라고 일컫는 가족 구성원  누군가가 벌어오는 수입으로 자녀를 양육하고 교육하기엔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하여, 아이를 돌보는  중점을 두면서도 벌이가 어느 정도는 되어야만 생활이 윤택해져서 엄마들은 일자리를 찾는다. (여기서  여자가 아이를 돌봐야 하느냐의 말은 차치하도록 한다) 그러나 수많은 엄마들이 어렵게 구했던 일을 그만두는 가장  이유는 바로 아이를 돌봐줄 믿을만한 사람이 없어서다.  역시도 첫째 아이를 낳고서 어렵게 구한 파트타임직을 포기하고야 말았던 것도 아이가 많이 아파서였다.


혼자 아이를 돌보는 엄마도 힘들기는 마찬가지다. 다행히 아이의 아빠가 벌어오는 돈으로 가계가 유지된다고 해도 아이와 24시간 함께 하면서 살림을 병행한다는 것이 쉬운 것은 아니다. 주변에서 또래의 아이를 키우는 엄마들과 교류한다고 해도 어쨌든 오롯이 내 아이를 돌봐야 하는 것은 나의 몫이기 때문에 어렵고 힘들다. 그런데 공동육아라니. 이렇게 좋은 일이 있을까? 혼자 한 아이를 돌보는 게 쉬운가, 여럿이 여러 아이를 보는 게 쉬운가. 당연히 후자일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착각이었다. 공동 육아의 허무맹랑함을 교묘하게 건드린 소설 [네 이웃의 식탁]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꿈미래 실험 공동주택은' 아이를 셋 낳겠다는 조건하에 싸게 분양된 다세대 주택으로 열두 집이 살 수 있는 목가적인 마을에 있다. 이곳에서 만난 네 가족들은 공동육아를 하기로 결정한다. 과거에 유치원 교사였던 단희를 중심으로 네 가족 중에 가정에서 양육을 담당하는 한 명의 사람들이 모여 함께 아이들을 돌보기로 한 것이다. 처음부터 형평성에 어긋났던 것은 단희와 교원의 가정은 아이가 둘인 반면 효내와 요진은 아이가 한 명이기 때문이었다. 특히 효내는 아이가 유모차를 탈 정도로 어리고, 요진의 아이는 여섯 살이었다. 나이차가 그렇게 많이 나면 한 방에 몰아넣고 똑같이 양육하기가 매우 힘들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여섯 살짜리 시율은 동생들을 돌보는 보조 선생님이 되기도 했고, 싸움이 났을 때는 시율이 동생들을 '이해해 줘야' 하기도 했다. 열불 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소설에서 가장 감정이 많이 이입되면서 제일 함께 속상했던 사람은 요진이었다. 요진은 일거리가 없는 남편을 대신해 집안의 가계를 책임져야 했다. 약국에서 일을 하는데 차로 40분은 가야 하는 거리에 있었다. 요진의 남편은 아이를 돌보고 있기는 하지만 아내가 신발을 꿰어 신고 나가는 순간까지도 '여보, 시율이 양말은 어딨어?'라고 묻는 사람이다.


내 주변에 남편과 거의 비슷한 시간에 회사에 나가면서도 나가기 전에 저녁까지 만들어놓고 나가는 사람이 너무나 많이 있다. 남편은 그보다 한 발 앞서서 나가서 아내보다 늦게 들어온다. 남편은 아내보다 상대적으로 많은 돈을 벌어온다. 그렇다고 해서 집에서 저녁밥을 기다리는 아이들을 아내 혼자 낳은 것은 아니다. 이런 와중에 아이를 더 낳으라고 말하는 것은 아내에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저녁시간과 맞물려서 일이 끝나는 아내는 회사 식구들과 회식도 마다한 채 집으로 달려와 저녁을 준비해야 하며, 여의치 않을 때는 배달음식을 시켜먹어야 하고, 먹고 나서는 인스턴트로 아이들 저녁을 때우는 것 같아서 죄책감에 시달려야 한다. 심지어 요진은 혼자 돈을 벌어와야 하니 이런 스트레스가 또 있을까.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다. 이 마을의 가장 큰 잘못은 다수의 의견이 모두의 의견처럼 돼버린다는 것이다. 어른만 여덟인데 여섯이 동의를 하면 두 명의 의견은 전혀 중요한 의견이 아니며, '나는 동의하지 않았으니, 빠질게요.'라고 했다간 '그러게 누가 나오지 말랬냐' , '공동의 이익을 위한 일인데 이기적으로 굴 테냐.'는 말을 들어야 한다. 가장 믿었던 사람부터 그렇게 말하기 시작하니 정말 심각한 문제다.


요진은 단희의 남편인 재강과 출퇴근을 같이 해야 했다. 단희네는 차가 한대인데 처음에는 재강의 차가 고장이 나는 바람에 요진이 카풀을 허락했다. (그것도 모두가 그랬으면 좋겠다는 말에 요진이 울며 겨자 먹기로 허락한 것이었다) 불편했지만 좋은 마음으로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재강이 선을 넘기 시작했다. 무력으로 어떻게 하려는 게 아니다, 이렇다 할 성추행이 있었던 게 아니다. 내 마음속에서는 찜찜한데 말하자니 서로가 불편해지는 그런 상황. 그 미묘한 상황을 작가가 얼마나 잘 써놓았는지 읽으면서 화가 치밀었다. 카풀을 했으면 차만 얻어 타는 게 맞다. 차를 얻어 타는 게 고맙거든 얼마간의 돈을 지불하던지 자기가 뭔데 비싼 브런치를 선물하고, 직장으로 쳐들어와서 주고 가고, 원하지도 않는데 입가에 묻은 부스러기를 털어주고, 이름만 대면 알만한 호화 화장품을 선물하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요진이 예민한 게 아니라 재강이 눈치가 없는 것이다. 그러다가 요진이 화를 내면 '나는 좋은 마음으로 한 것이다.' , '싫으면 싫다고 하지 왜 이제 와서 그러냐.' 고 말할 게 분명했다.


단희가 마을 아이들의 공동 보육을 담당하고 있고, 그것 때문에 차를 두고 오는 일이 많아서 같이 차를 타고 가는 것은 이해가 되지만 재강의 그런 행동은 호의가 아니라 자만이고 허세일뿐이다. 상대가 좋아하지 않는데 그게 잘하는 거라고 믿고 지속적으로 행하는 것은 자만이고 폭력이다. 남의 아내 피부에 신경 쓰고, 예쁘다고 말할 사이에 가정이나 건사하지.


그 방식은 단희도 마찬가지며 요진만큼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효내다. 효내는 미술을 전공하고 동화책 일러스트레이터로 일하고 있다. 낮에는 아이를 돌보아야 하므로 밤에 주로 일을 하다 보니 낮에는 잠이 쏟아져서 아이에게 간혹 소홀할 때도 있지만 내가 보기엔 최선을 다하는 엄마였다. (그마저도 안 하는 엄마가 태반인 것을 우리는 잘 안다) 그러나 잘 살아보겠다고 입주한 이 공동주택에서는 정말 귀찮은 일이 지속적으로 벌어지고 있었다. 재활용 쓰레기 버리는 날도 모두 같이 나와서 해야 하고, 새 식구가 입주하면 (또는 그 보다 자주) 식사를 같이 해야 했다. 효내는 그 모든 게 자기의 라이프타임과 맞지 않아서 나중에 혼자 버리겠다고 하면 단희나 교원은 같이 해야지 왜 겉도냐고 타박을 했고, 그 타박은 다소 싹수없어 보이는 효내에게가 아니라 대체로 협조하는 효내의 남편 상낙에게 이르렀다. 상낙은 그 자리에서는 아내의 동의도 없이 '네, 네' 하고 돌아와서는 집에 와서 피곤한 아내에게 통보하는 식이었고, 효내는 왜 네 맘대로 하느냐고 싸웠다가는 일을 그만두라는 소리가 들릴까 봐 협조하는 척해야만 했다. 그리고 공동육아가 시작된 후로는 아직 어린 아기에 불과한 자기 딸 다림이 하나만 보기도 벅찬데 왜 네다섯 살 되는 남의 아들들까지 함께 돌봐야 하는지 이해가 안 됐다. 효내에겐 집에서 아이만 돌보는 교원과 단희가 하자는 대로 하루를 보내기에는 받아놓은 남의 일이 해결되지 않았다. 프리랜서는 얼마든지 시간이 남아돌 거라는 잘못된 생각이 효내를 냉정한 사람, 비 협조적인 사람, 나아가 이기적인 사람으로 만들고 있었다. 남편의 일은 대단한 일이고, 아내의 일은 소일거리로 치부하는 버릇은 반드시 뜯어고쳐야 하는 터무니없는 사고방식이다.


이 책을 읽고 있자니 15년 동안 겪어왔던 나의 고민과 시련이 죽은 물고기처럼 둥둥 떠올랐다. 공동육아까지는 아니지만 여러 가지의 에피소드들이 장구한 세월을 휘감아 상처로 자리 잡게 했다. 이제는 아이들이 얼추 컸으니 지난날을 추억하기도 하고 어려웠던 시절을 회상하며 훌훌 터는 것처럼 보이지만 조금만 더 차분하게 생각해보면 억울해 미쳐버릴 것 같기도 하다.


아이가 숨을 쉬고는 있지만 대화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혼잣말을 하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너무너무 외로웠던 날들이 지나고 있었다. 아는 사람은 애를 업고 지나가다가 누가 길만 물어도 눈물이 날 것 같았단다. 아이만 돌보는 엄마는 그만큼 외롭다. 산후에 감정 기복도 내 맘대로 안되고, 몸은 이전보다 말을 안 듣고, 하루 종일 남편만 기다리다 보면 회식이네 뭐네 해서 늦게 들오는 남편이 그렇게 미울 수가 없었다. 어쩌다가 외식을 하러 가면 고기가 막 구워져 맛있게 먹을 타이밍에 애가 울기 시작했다. 식당 저 구석에 가서 수유를 마치고 돌아오면 차갑게 식어져 내 앞접시에 올려진 고기 몇 점이 그렇게 서러울 수가 없었다. 아이를 위해서 모유를 택했고 그게 잘하는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잠이 들 때까지 빈 젖을 빨면서 칭얼거리는 아이를 저만큼 던져버리고 싶었던 건 나 혼자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을 만났다. 인터넷 카페에 가입을 해서 글을 남겼다. 우리 아파트에 살고 있고 아이가 개띠면 좋았다. 엄마들이 나보다 나이가 많기도 했고, 또래도 있었다. 돼지띠인데 같이 만나면 안 되냐고 묻는 엄마도 흔쾌히 오라고 했다. 그 엄마들과 4-5년을 같이 지냈다. 밥도 같이 해서 먹고 음식도 많이 하면 이집저집 돌렸다. 다른 사람 험담도 하고, 남편하고 싸운 얘기도 털어놓으면서 잘 지냈다. 그런데 자꾸만 문제가 생겼다. 잘 놀고 있었는데 그 집 애가 우리 애를 때리기도 했고, 반대로 우리 애가 자기 장난감 안 빌려준다며 울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난감했고, 남의 애를 혼낼 수 없어서 내 아이를 혼냈다. 내 아이 것을 빼앗아 남의 아이에게 주고는 우리 아기 착하지, 엄마가 간식 줄까 했다. 지금 그 모든 시간들이 후회되는 건 말할 것도 없다. 그 인연들이 지금까지 이어지는 경우는 아주 드문데 왜 그때 나는 나쁜 엄마를 자초했을까.


친한 친구들을 만나면 문제는 더 심각해졌다. 나는 비교적 결혼을 빨리 해서 친구들보다 아이의 나이가 상당히 많다. (10년 이상 차이도 태반이다) 그래서 대체로 5-6살 많은 내 딸이 보모처럼 아이들을 돌봤다. 어쩌다가 어린애가 막 울면 같이 있던 다섯 살짜리 내 딸을 다그쳤다. 나도 어린아이에게 더 어린아이를 맡겨놓고 이웃과 떠들며 피자나 먹는 그런 엄마였다. 교원과 은오처럼 말이다.


이 책은 나처럼 아이를 길러본 엄마라면 누구나 공감 가는 내용을 담았다. 아주 꼼꼼하게 담았다. 15개월짜리 아기가 30개월 된 내 아이를 힘껏 물었는데 '언니 미안해' 소리에 '괜찮아'라고 답했던 내가 읽고 있자니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로 리얼한 이야기가 세세하게 담겨있다.



육아는 정말 함부로 단정 지을 수 없는 일이다. 누가 끼어들어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다. 분명히 아기가 태어난 것은 축복받을 일인데 그것을 짐으로 지우는 여러 가지 환경들이 조합돼서 문제를 야기한다. 그것을 함부로 해결하려고 하다간 낭패를 본다. 부모가 도움을 요청하면 실질적 힘을 보내줄 수 있는 사회적 시스템은 반드시 필요하다. 제대로 도와주지 못할 바에는 함부로 참견해선 안 되는 것이 또 육아일 것 같다.


육퇴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엄마가 직업 일리는 없지만 육아와 살림은 대체로 직업이다. 인정해 줘야 한다. 그래서 진짜 퇴근이 허락돼 엄마가  엄마다워질 시간이 필요하다. 그래야 엄마는  내일의 일에 종사하며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고객님을 편안하게    있다. 엄마에게 직무 이외의 다른 짐이 지워지지 않도록- 그것이 원치 않는 이웃, 수치심, 가계에 대한 엄청난 부담, 꿈을 포기하는 , 잘하지 못하는 일을 애써 해야 하는  등에서 해방되도록 어떤 판타지가 흘렀으면 좋겠다. 짐을 훌훌 벗어버리는  가능하다면 그게 판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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