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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박 Sep 13. 2021

추석이 온다


명절이라 지독하게 막히는 고속도로는 누군가에겐 지옥도 일지 몰라도 내겐 부러운 경험이었다. 뉴스에서 연일 보도하는 민족의 대이동에 나도 껴보고 싶었다. 친척이 거의 가까이 살기 때문에 도로가 막히는 것을 경험할 수 없었고, 멀리 있는 친척집에 다녀온 아이들의 무용담과 용돈 자랑은 나를 쓸쓸하게 만들기까지 했다.  


남보다 이른 나이에 결혼을 하고 가장 좋았던 것 중에 하나는 드디어 명절에 나도 고속도로를 탈 일이 생겼다는 것이었다. 남편의 본가는 나와 같은 충청북도지만 어머님은 강원도 사람이라 명절날 오후에는 늘 당신의 친정으로 향했다. 결혼 초반에는 나도 따라나섰다. 여행 가는 기분이었다. 길은 당연히 막혔지만 자주 가다 보니 어느 구간에서 국도로 내려가는 것이 유리한지 알아서 평범한 주말과 거의 비슷하게 도착시간을 맞추곤 했다. 솔직히 좀 오래 걸린대도 괜찮았다. 중간에 휴게소에서 서서 사 먹은 잘 굴려진 버터 감자(소금의 풍미를 잊을 수 없다), 꾸덕꾸덕한 맥반석 오징어, 한잔에 4천 원이 넘냐며 한마디 듣지만 비길 곳 없이 달콤했던 카페모카까지.

휴게소 중간중간 잘 꾸며 놓은 포토존에서 아이들 사진도 찍어주고, 아이들을 혼자 화장실에 보내면 일어나는 괴담들도 남발하고 흥겨운 귀성길이었다.


도착하면 6남매인 어머님 친척들이 다 모였다. 여기저기 그룹을 지어 놀았다. 어른들은 화투도 치고, 윷도 놀고, 아무거나 찾아먹고, 아무데서나 있어도 좋았다. 애들은 나에게 매달릴 시간도 없었다. 남편의 사촌들은 아이들이랑 잘 놀아주었다. 결혼했을 무렵의 남편에겐 여섯 살짜리 사촌동생도 있었다. 여섯 살이 열 살이 되자 네 살짜리 아들은 그 애의 독차지였다. 나는 할 게 없었다.


그러나 아이들이 자라면서 명절 강원도행(行)은 많이 좌절되었다. 우선 남편의 일이 많아지면서 다녀갈 시간이 적어졌고, 거길 따라가려면 본가에서 차례를 마치고 급히 떠나야 했기 때문에 친정은 들를 시간이 없었다. 딸의 가족을 기다리던 엄마가 섭섭해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점차로 강원도 가는 빈도가 줄었다. 

순간순간 마주하는 며느리의 자리 때문이기도 했다. 늦잠 좀 자고 싶은데 눈치가 보여서 일어나기도 하고, 식구가 많은데 계속 뭔가를 먹기 때문에 설거지가 많이 담기게 되면 저걸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돼 우왕좌왕했다. 자진해서 개수에 손을 담고 있자니 어디선가 자잘한 그릇이 계속 날라져 왔다. 아이들이 먹은 것만 냅다 씻어놓고 싱크대를 떠나려 해도 어딘가에서 또 그릇이 도착했다. 눈치 없는 아이들은 올해도, '엄마 강원도 또 안가? 나 가고 싶은데.'라며 속 시끄러운 소리를 늘어놓았다. 하지만 결국 명절에 그곳을 가지 않은 건 이른바 송기영 사건 이후였다.


눈이 많이 오던 설이었다. 무슨 용기가 생겼는지 남편도 없이 어머니만 모시고 애들을 태웠다. 운전하는 것을 좋아하는 데다가 연휴도 길었고, 그 눈발을 겁내는 마음을 사르는 여행 욕구가 나를 잠식해서 운전대를 잡았다. 길어야 네 시간 걸렸었는데 눈이오니 장장 일곱 시간 반이나 걸려 목적지에 도착했다. 사람들은 이 눈 속에 어찌 왔냐며 운전실력까지 칭찬해주었다.


다음날 아침이 되었다. 눈은 그쳐 있었고, 남자 어른들은 낚시를 간다고 준비 중이었다. 부산한 아침 풍경이었다. 여자들과 아이들은 아침식사 전이었다. 거실에 놓인 밥상만 네 개. 치우고 다시 차리는 일이 재빠르게 진행되고 있었다. 시이모들이 반찬을 담으면 쟁반을 들고 기다렸다가 나르면 되었다. 어머니는 밥을 푸고, 막내 이모는 국을 떴다. 이리저리 나르다가 미처 못 돌아오면 이모들은 자기 딸들 이름을 힘껏 불렀다. 비교적 사이좋게 밥상이 꾸려졌다.


문제는 밥을 다 먹고 난 다음이었다. 셋째 이모가 갑자기 말했다.


"며느리들이 설거지 하자."


여기서 며느리들이란 남편의 막내 외숙모와 나였다. 주섬주섬 일어섰다. 꼭 하라고 안 해도 할 건데 하라고 미리 지정까지 해주니 마지막에 삼키려던 밥이 목에 걸린 것 같아서 작게 컥컥 댔다.


"엄마, 왜 한박 언니가 설거지를 해야 돼?"

"뭐?"

"그렇잖아. 여기가 저 언니 시댁이야? 아니잖아. 세상에 남편도 없이 시어머니 모시고 시어머니 친정에 놀러 오는 착한 며느리가 어딨어? 막말로 내가 그렇게 한다고 했어봐, 엄마도 나한테 엄청 뭐라고 할 거면서!"


가족들이 모두 놀라 쳐다보았다. 쟤가 우리가 아는 기영이 맞나?

기영 아가씨는 삼 년 전에 결혼해서 돌쟁이 아이를 키우는 중이었다. 명절이면 늘 만나기 때문에 나하고도 친했고, 고등학생 때는 방학에 우리 집에 놀러 와서 며칠씩 자고 가기도 했다. 예전에는 내가 설거지 더미를 끌어안고 있어도 본체만 체 하더니 결혼 후 젠더 감수성을 획득한 걸까? 집중된 이목에 내 얼굴이 달아올랐다.


"너는 대체 누구 딸이냐? 그래, 안 시킨다. 안 시켜! 제가 할 것도 아니면서!"

"엄마가 새롬이 안고 있어. 내가 할게."


새롬이가 울어주는 바람에 기영도 설거지를 하지는 못했지만 나는 모른척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생각해보니 정말 그렇다. 나는 손님이었다. 이미 명절 전날 시집에 가서 그들이 원하는 순전한 며느리로서의 모든 일을 마무리 짓고 왔고, 어제부터 오늘까지 편히 쉴 수 있는 사람이었다. 이곳에 온 순수한 목적은 여행이지, 며느리로서의 일을 연장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솔직히 고마웠다. 하지만 나는 명절에 다시는 강원도로 가는 고속도로를 타지 않았다.


애초에 이 북적북적한 것은 내 것이 아니었다. 나는 장 씨 집안에 시집 온 박아무개 이외에는 별 게 아니었다. 여전히 외롭고 내 것이 아닌 것 중에서 적응하려고 애를 쓰는 이방인일 뿐이었다. 사촌 시누의 저 이야기를 듣기 전까지는 나조차도 내가 당연히 저 집의 며느리라고 생각했다. 이상한 노릇이다. 나마저도 나를 외롭게 만들고 있었다는 게.


 



이제는 명절 귀성길을 부러워하지 않는다. 예전만큼 그렇게 막히지도 않고, 코로나 때문에 가는 사람도 줄어들었다. 시집 식구들과의 2박 3일에 뛰어들 만큼 순진하지도 않고, 아이들도 사춘기라 별로 내켜하지 않는다. 북적대는 집안을 화목하게 하는 데 얼마나 많은 손길이 '여자'라는 이름으로 소비되고 있는지 내처 알아차리기도 했고. 아무튼 추석은 온다. 한가로움이 더 이상 외로움이 아닌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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