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에 엄마가 내게 전화를 걸어 한숨에 울음을 섞어 말했다. 구순이 다 되신 우리 할머니는 엄마랑 옆집에 사는데 근래 들어 자주 넘어지거나 다치고 청력도 많이 약해져서 걱정이 많았다. 옆집이긴 해도 혼자 사는 거라 스스로 음식도 해 잡숫고 하니 아직 정정하시구나 별 걱정 안 하다가도 자꾸 다치시니까 또 다치셨나 싶어 화들짝 놀랐다. 알고 보니 물리적으로 떨어진 게 아니라 노인 등급에 떨어졌다는 거였다.
요즘 길 가다가 보면 자주 보게 되는 간판 중에 하나가 '주간 보호 센터'라는 간판이다. 막 생겨나기 시작했을 때는 저게 뭐하는 덴가 싶었는데 지금은 안다. 간단히 말해 노인 유치원. 낮에 노인들을 맡아서 각종 프로그램을 진행하거나 식사 및 간식을 지급하고 정부로부터 보조를 받거나 보호자에게 원비를 받아 운영되는 곳이다. 거동이 가능하다면 인지능력이나 자유로운 신체 활동이 조금 떨어져도 충분히 이용할 수 있는 시설이라 집에만 있는 무료한 노인들에게는 잘만 이용하면 괜찮은 곳이다. 엄마와 외삼촌은 할머니가 그 시설을 이용했으면 하고 바랐는데 그곳에는 할머니 친구들도 많고, 짜인 시간대로 안전한 공간에서 지낼 수 있으니 혼자 있으면서 다칠 염려가 상당 부분 덜어지기 때문이다. 실제로 할머니는 한 달을 미리 체험했는데 보호센터에 다녀온 주중이 그렇지 않은 주말보다 생기도 있고, 잠도 잘 잔다고 했다. 혼자 있는 시간이 길면 외로운 법이다. 뭐니 뭐니 해도 어울려 지내야 인생이 재밌다.
문제는 비용이었다. 누구나 이용할 수는 있지만 치매나 장애로 등급을 받지 못하면 비용이 많이 들고, 높은 등급을 받으면 아주 저렴한 비용으로 이용할 수 있다고 했다. 삼촌도 엄마도 생활이 넉넉한 형편이 아닌 데다가 이왕이면 적은 비용으로 시설을 이용할 방법이 있다고 하니 저 말은 반가울 수밖에 없다. 게다가 할머니는 가끔 앞뒤에 맞지 않는 소릴 하거나 오지도 않은 손녀딸이 왔다 갔다고 하는 둥의 말을 해서 초기 치매가 예상되기도 했었다. 자꾸 넘어지는 것도 문제점 중에 하나였다. 두 팔이 부러져서 모두 수술을 하고 깁스를 한 팔을 높게 든 채 누운 할머니를 보고 눈물을 쏟은 적도 있다.
그러나 등급 심사를 하는 날이 되면 어김없이 의사 앞에서 늘 또렷한 발음과 말투를 유지하면서 모든 것을 제대로 인지하시니 할머니의 노인 등급은 늘 낮았다. 이번에도 탈락. 그래서 엄마는 거의 울먹였다.
"너도 알다시피 내가 집에만 붙어있는 사람이 아니잖아. 할머니가 거기 가 계시면 안전하고, 재미도 있고 얼마나 좋아. 그런데 등급이 안 나오면 보내드릴 돈도 없고. "
박형서의 소설 [당신의 노후](현대문학)는 현대판 고려장을 다룬다. 노인이 사회의 신선한 물줄기를 콱 움켜쥐고 놔주질 않는다며 일정의 비밀 공무원들이 노인들의 목숨을 거두러 다니는 내용이다. 소설이지만 섬찟하다. 자식들에게 손 안 벌리고 노후를 준비하기 위해서 차곡차곡 쌓아둔 국민건강보험이 만기 되는 순간 노인은 타깃이 된다.
노화라는 국가적 동맥경화를 막기 위해 얼마나 많은 기관에서 외곽 공무원이 암약하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p.59
스릴러의 존재 이유는 경고라던 어느 작가의 말이 기억난다. 이 소설은 숨 막히는 배치가 교묘하게 잘 설정된 스릴러 소설처럼 우리에게 경고의 메시지를 던진다. 네가 점치는 노년은 어떠냐고, 실제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면 너는 어쩔 거냐고.
노인이 모두 존경받아야 마땅한지까지는 모르겠지만 노인도 인간이니만큼 대의를 위해서라며 그들의 목숨을 마음대로 거둬가는 시스템은 어디에서 있어서는 안 된다. 그게 가능한 거라면 장애인이어도, 이주노동자여도, 기초생활 수급자여도, 고아여도 거둬가게 될 것이다. 다수의 인간이, 아니 거의 모든 인간이 소수의 인간의 영달을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니므로 절대로, 어떤 한 번의 시각이라도 그렇게 여겨서는 안 된다. 소설을 읽는 내내 그렇게 생각했다.
장길도는 문득 젊음의 정체가 의아해졌다. 젊은 시절 당연히 누렸던 그 싱그러운 감각이 통 기억나지 않았다. p.127
노인은 누구나 된다. 태어나는 것이 선택이 아니듯 늙는 것도 마찬가지. 자연의 섭리 앞에 차별받아야 사람은 누구도 없다. 소설은 판타지지만 살면서 이토록 괴물 같은 법이 만들어지지 말란 법도 없으니 우리도 움직이자. 지금부터 우리가 노인이 되었을 때를 대비하자. 그 대비는 돈을 많이 벌어두어서 괜찮은 실버타운에 들어가는 게 아니라 지금부터 노인이 살만한 세상을 만드는 데 있지 않을까. 주간 보호 센터가 있다면 어느 노인이나 저렴하게 이용할 수 있어야 하고, 노인을 돌보는 노동자에게는 일할 맛 나는 시스템을 만들어줘야 한다. 애쓰는 움직임은 분명히 있을 것이다. 나도 동참해야겠다.
누군가 말했다. 그래서 달라지겠느냐고, 나는 부정적으로 본다고. 안될지도 모른다고 해서 아무것도 않는 것은 무책임하다. 방법은 있을 것이다. 당장엔 없는 것처럼 보여도.
결국 엄마는 울었다. 엄마가 이해가 되면서도 그래도 할머니에게 너무 하는 거 아닌가 싶어서 나도 모르게 말없이 서 있었다. 위로할 말도 생각나지 않았고, 어쩌면 할머니가 멀쩡해야지 더 좋은 게 아닌가 싶어 뾰로통했다. 그런데 엄마는 할머니가 떨어진 것보다 '나도 나중에 우리 엄마처럼 자식들이 나를 힘들어해 여기저기 보내려고 애쓰면 어떡하지' 싶어서 울었단다. '엄마 내가 안 그럴게. 노인을 도려내야 할 존재로 지정해두는 괴물 같은 세상이 오지 않도록 젊은 우리가 더 애써볼게'라고 말하려다가 자신이 없어서 관두었다. 대신 결심했다. 좀 더 하자고. 아주 힘없는 노인이 되었을 때 그게 누구라도, 자식에게 짐 되지 않으려고 조용히 지게에 올라타는 일이 없도록 노인도 살 수 있는 세상이 사라지지 않게 함께 힘써줄 누군가를 찾아서.
여러분의 노후는 평안하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