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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박 Sep 28. 2021

카톡 공해에서 살아남자

어떤 무리에 끼지 못하는 소외감이란 겪어보지 않은 자는 단연코 함부로 말하지 못할 그 무엇이다. 모두가 알고 있는 크고 작은 소식을 나만 모를 때의 황망함이란 초행길에 어쩔 수 없이 올라타야 하는 버스처럼 나를 아둔하게 만든다. 하지만 어떨 땐 그냥 속하고 싶지 않을 때도 있다. 홀로 있고 싶다.


나이 마흔에 무슨 따돌림 이야기를 하고 있는가. 따돌림 이야기가 아니라 속하여 있는 자의 비감(悲感)이다. 속하고 싶지 않은 공간에서의 탈출. 터치 한 번이면 나갈 수 있으나 차마 그러지 못하는 이유의 치졸함을 말하려고 한다.


아들 세대의 아이들은 카카오톡보다는 페이스북 메신저를 더 많이 쓰지만 여전히 노란색의 그 통신 어플은 압도적으로 많은 사용자를 자랑한다. 사람들은 카카오톡이 디폴트인 것처럼 말한다. 스마트폰의 유용함을 '카톡'이라고 말하는 사람을 본 적도 있다.

나에게도 카카오톡은 누구와도 쉽게 연락할 수 있는 아주 좋은 통신망이다. 요즘은 선물 보내기는 물론 쇼핑까지 그것을 이용하다 보니 메신저의 역할로만 카카오톡을 묶어두기엔 어림없다.

그래도 무엇보다 중요한 기능은 단연코 채팅 기능이다. 귀여운 이모티콘을 구매해 적재에 사용하고, 친하지만 자주 만나지 못하는 친구나 친지들에게 손쉽게 선물을 보낼 수도 있다. 그러면서 우정도 돈독해지고, 꼭 찾아가야만 할 수 있던 인사들도 아무 때나 건넬 수 있으니 순기능이 많다. 게다가 많은 인원과 함께 이야기를 나눌 때, 특히 회의할 때 정말 좋다. 요즘 같은 코로나 시국에는 말할 것도 없고, 사생활은 보호하면서도 함께 시간을 즐길 수 있는 것으로 카톡대화만 한 게 있나 싶기도 하다. 이제 그것은 실존하는 공간이 되어 버렸다.



그러던 어느 날 내게 문제가 있음을 발견했다. 단체카톡방, 이른바 단톡방 때문에 스스로가 치졸하게 느껴지기 시작한 것이다. 지난 명절에 중학교 친구 한 명이 동네 친구들을 모아 그룹 채팅방을 만들었다. 채팅방엔 동창도 있고 아닌 친구들도 있었다. 각자의 안부를 가볍게 묻다가 함께 인연을 좀 더 두텁게 이어가자며 정기적 모임을 갖는 것은 어떤가 의견을 물었다. 모두가 좋다고 말하는데 대답을 안 하기도, 나가버리기도 곤란하여 'Okay' 이모티콘을 보냈다. 하지만 스스로 비열하게 느껴졌다. 좋지도 않고, 하고 싶지도 않고, 급기야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그 채팅방을 만든 친구부터 썩 만나고 싶지 않았다. 채팅방에 들어온 동네 친구들은 모두 여덟 명. 세 명은 비혼, 다섯 명은 기혼이었다. 명절 전날은 혼인의 여부와 상관없이 분주하기 마련이다. 물론 아닐 수도 있지만 남의 사정은 생각도 않고 다짜고짜 정기모임을 만들자니.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안부를 물으면서 활자로는 오해할 수 있는 아리송한 말들을 늘어놓는 것들도 영 불편했다.


소리나 표정을 드러내며 말하는 것과 단문의 글로만 주고받는 대화는 큰 차이가 있어서 자칫하면 기분이 상할 수도 있다. 웃자고 하는 말인데 기분이 상하기도 하고, 기분이 상했다고 하면 웃자고 한 말에 죽자고 덤빈다며 센스 없는 사람을 만들어버린다. 바빠서 대답이 없으면 왜 이렇게 바쁘냐, 장사가 그렇게 잘되느냐고 묻는데 왜 그런지 비아냥 거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채팅방 속 친구들 중에 평소에도 나와 왕래가 있어서 내가 하는 사업을 알고 있는 친구는 두 명뿐이었다. 다른 친구들은 '언제부터 사업하고 있었느냐', '화분이라도 보낼 걸 그랬다', '그 사업  요즘 말이 많다던데' 하면서 걱정인지 간섭인지 모를 말을 늘어놓았다. 친분이 없는 상태에서는 순수하게 말을 건넸다 해도 글자로만은 그 뉘앙스를 정확히 알 수 없기에 멋대로 해석해버리고 마는 게 채팅방의 특징이다. 그의 해석에 나는 책임이 없고, 나 역시 남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다. 그래서 단체 채팅방은 정말 공지사항만 남기길 선호하는 편이다. 하지만 나는 그 방에서 나올 수가 없었다. '세월 지나더니 변했다, 잘난 체한다, 재수 없다.' 아무도 그렇게 말 안 했는데 그런 소릴 들을까 봐 불안했다. 그래도 친구들인데 나가버리는 게 매정하게 느껴졌다. 결국 나는 채팅방 하단에서 '알림 표시 끄기'를 누르는 것 이외에는 별다른 해결책을 찾지 못했다.  


평소에도 단체 채팅방 알림을 꺼놓는 경우가 있다. 여러 사람이 동시에 메시지를 올리면 소리가 상당해서 알림을 꺼두고 망중한에 확인하는 것이 좋다. 하지만 역시 주기적으로 들어가서 '1'이라는 숫자를 지워줘야 하고, 지운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얼마간의 대답을 해주어야 한다. 즐거운 이야기라면 관계없지만 그렇지 않으면 피로한 일이다. 이미 지나간 화두를 대꾸해 다시 흐름을 가져와야 한다는 것은 피곤하다. 그 말에 또 대꾸해주지 않으면 나중에 서운해할까 걱정이다. 문맥을 파악하느라, 행간에서 보이지 않는 감정까지 읽어내느라 고단한 심신을 가눌 길이 없다. 그것이 노란 네모창 안에 갇힌 나의 처지다. 그야말로 카톡 감옥! 카톡 공해!!


"좋아하는 사람들과 행복한 관계를 유지해도 짧은 인생인데 싫은 인연을 억지로 이어가려고 애쓸 필요 없지 않을까요?"


내가 즐겨 찾는 인터넷 독서카페에서 누군가가 한 말이다. 당시 불거진 화두와 별개로 그녀의 말에 마음이 흔들렸다.


나야말로 싫은 인연을 억지로 붙잡는 일을 하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오래된 카카오톡 대화들을 훑어봤다. 일부러 아래까지 내려가서 보면서 올라오다 보니 단체 채팅방이 참 많다. 보다 보니 중간에 나간 사람들이 간혹 보인다. 꽤 많은 사람들이 단체 채팅방에서 나가버렸다. 왜 혼자 그 방에 덩그러니 있는지 헛웃음이 나왔다. 나도 다 나와버렸다. 그리고 명절에 만들어진 그 방에서도 나오기로 했다. 우연히 마주치지 않는 한 그 친구들을 일부러 만날 일은 없을 것이다. 대부분은 그동안 친분을 쌓아온 것도 아니고 별로 친하지도 않은데 중학교 동창들 때문에 엮여 있었다. 서로 안 보고 산지가 수태이며 소식 조차 모르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십오 년 만에 무슨 정기 모임을 한단 말인가. 채팅방은 명절 이후 멈춰있었지만 멤버는 처음 그대로였다. 다행이었다. 가타부타 말도 없이 '나가기' 버튼을 눌렀다. 그러면서 오랫동안 내가 나간 것을 모르길 바랐다.




[프라이드 그린 토마토]라는 소설이 있다. 소설의 주인공은 남 비위 맞추는 데 특화된 사람이다. 그래야 편하다. 하지만 내재된 울분을 알지 못했다. 우연한 기회로 터트리면서 자기를 직시한다. 울분이 있는지까지는 모르겠지만 나 역시 남 비위 맞추는 것을 편하게 생각했다. 이왕이면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게 두루두루 좋다고 생각했다. 내가 어떤 곳에서 그 사람을 다시 만날지 모르고, 나이가 들면서 인맥이라는 게 많아지고 다양해지면 좋은 거라는 생각을 늘 가져왔던 것 같다. 하지만 요즘은 서서히 달라지는 나를 경험한다. 길지 않은 인생을 행복하게 살기 위해 선택과 집중은 필수다. 다른 사람은 수 틀리면 쉽게 돌아서는 얇은 인연을, 나는 뭐 대단한 운명쯤으로 여기고 아등바등했을까! 연락이 뜸해지면 서로 바쁜가 보다 여기고, 진짜로 궁금하면 한 번씩 노란 어플을 열어서 안부를 물으면 된다. 기념일도 챙겨주고 좀 더 마음을 쏟고 싶으면 선물도 좋겠지.


그렇게 해결해야 할 묵은 인연들이 내겐 좀 더 있다. 용기 내서 그 채팅방들을 다 빠져나올 수 있을지는 의문이지만 그래도 해보려고 한다. 소설에서처럼 무례한 아무나를 붙잡고 내 울분까지 다 토해낼 수는 없으니까. 지금부터 천천히, 시간 낭비하지 말고.



카톡 공해를 견디기 위해서 일단 나부터 챙기기로 한다. 어차피 없이 안 되는 것이라면 나부터 단단해지기로 하자. 있기 싫은 곳이라면 과감히 탈출하자. 나갔다고 욕할 거라면 어디서도 그럴 수 있는 사람들이다. 회사나 단체처럼 보다 공적인 모임이라면 알림 끄기 버튼을 누르는 것도 괜찮다. 개인 사정으로 자주 못 볼 수도 있으니 정말 중요한 이야기는 개인 메시지를 보내달라고 부탁하는 정중한 태도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부득이하게 채팅방을 만들어야 한다면 개인에게 먼저 의사를 묻고 만들면 좋겠다. 무턱대고 만들어 버리는 것은 누가 내 목덜미를 잡아 채 다른 집으로 강제 이동시키는 것처럼 불쾌한 일이다. 공적인 영역을 들먹이며 개인을 괴롭히지 말기! 좋은 게 좋은 세상 말고, 나도 좋고 남도 좋은 세상에 살고 싶다.


  

모든 이미지 출처 :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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